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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e.naver.com/firstnonsul/408, 중학논술연습실 카페 내 검색-
위의 글은 ‘모택동이 들려주는 건국이야기’ 라는 글을 요약해 놓은 것이다. 제목처럼 언제까지나 모택동 입장에서의 글이지만, 흔히 이렇게들 생각하고 있을 것 이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도 모택동은 전술의 귀재인데다가 천운까지 따라준 영웅인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9만리 장정을 할 정도로 의지도 강했고, 충성스런 동료들과, 대중의 맘을 사로잡은 희대의 영웅. 그리고 모택동이 중국을 통일한 후 비로소 중국전역에서 내란과 외란이 끝이 나고 국가가 안정을 되찾았으니까. 비록 문화대혁명기에 3천만이 굶어죽고, 발전없는 세월과 가난은 계속 이어졌지만 말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모택동이 훌륭한 업적을 세웠음에도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다 상관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김구의 상해임시정부를 물심양면 도왔던 것은 오히려 모택동이 아니라, 장개석의 국민당정부이며, 안중근, 윤봉길, 나석주, 청산리, 봉오동 등의 전투에 감명 받은 장개석은 ‘무능한 중국군 수십수백만이 있다한들 조선청년 몇 명의 쾌거를 이룰 수 없다’라고까지 한탄했다고 한다. 또한, 상해임시정부에 돈과 무기등을 꾸준히 보급하였고, 1937년 이후 일본의 공세가 거세질때면, 우선적으로 상해임시정부에게 알려주고, 차량을 보내 먼저 빼주고, 후방에 청사까지 지원하는 등 그야말로 물심양면의 지원이었다고 한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좀 특이해 보일지는 몰라도 흥미를 느꼈다. 나 역시 조사 내내 모택동의 편(?)이었기에 마지막 조사를 마치며 모택동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낼 참이었기 때문이다. 이 비하인드 스토리에 유치하게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잠시 동안 흔들리기도 했다. 아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모택동과 장개석의 차이는 분명하다.
다시 되짚어 보자면, 모택동을 존경하는 이유는 13명으로 시작한 공산당이 국민당에게 쫓겨 연안대장정을 진행하면서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크게 성장하게 만든 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연안대장정에서 그가 보여준 여러 일화들은 그의 성품을 짐작케 한다. (식량은 자급자족하고 자기위해 떼어놓은 문짝도 떠나면서 있던 자리에 달아놓을 정도였다.)
반면에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지나간 자리는 착취와 강탈등이 난무했으며 군대도 많았고, 공산당은 물론 일본군에게까지 무기를 팔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모택동이 우리나라에 파병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보낸 중공군 가운데에는 그의 아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 아들은 평양 근교에서 전사하였다. 전 중국을 틀어쥐고 있는 권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사지로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반면에 장개석은 대만으로 쫓겨 간 이후 능력있는 사람이 아닌, 바로 아들 장경국에게 권력을 승계하였다. (이 부분은 같은 남자로서 날 완벽하게 모택동을 존경하게 하였다.)
이념적으로 보면 우리와는 반대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나 모택동은 충분히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다.
쓰다 보니, 결국은 모택동 쪽으로 기울기는 했지만 이렇게 다른 면모를 보였기에 3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모택동의 훌륭한 성품이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라의 진정한 주인은 국민이다. 모택동과 장개석 둘 다 그렇게 말하였지만 그것을 진실로 실천한 사람은 모택동이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도 다시금 되새기며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생각과 말, 말과 실천이 같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는 모택동의 말은 중국, 대한민국과 같이 각 나라를 떠나서 개개인이 가슴에 지녀야 한다고 본다.
-THE END-
위의 글은 ‘모택동이 들려주는 건국이야기’ 라는 글을 요약해 놓은 것이다. 제목처럼 언제까지나 모택동 입장에서의 글이지만, 흔히 이렇게들 생각하고 있을 것 이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도 모택동은 전술의 귀재인데다가 천운까지 따라준 영웅인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9만리 장정을 할 정도로 의지도 강했고, 충성스런 동료들과, 대중의 맘을 사로잡은 희대의 영웅. 그리고 모택동이 중국을 통일한 후 비로소 중국전역에서 내란과 외란이 끝이 나고 국가가 안정을 되찾았으니까. 비록 문화대혁명기에 3천만이 굶어죽고, 발전없는 세월과 가난은 계속 이어졌지만 말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모택동이 훌륭한 업적을 세웠음에도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다 상관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김구의 상해임시정부를 물심양면 도왔던 것은 오히려 모택동이 아니라, 장개석의 국민당정부이며, 안중근, 윤봉길, 나석주, 청산리, 봉오동 등의 전투에 감명 받은 장개석은 ‘무능한 중국군 수십수백만이 있다한들 조선청년 몇 명의 쾌거를 이룰 수 없다’라고까지 한탄했다고 한다. 또한, 상해임시정부에 돈과 무기등을 꾸준히 보급하였고, 1937년 이후 일본의 공세가 거세질때면, 우선적으로 상해임시정부에게 알려주고, 차량을 보내 먼저 빼주고, 후방에 청사까지 지원하는 등 그야말로 물심양면의 지원이었다고 한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좀 특이해 보일지는 몰라도 흥미를 느꼈다. 나 역시 조사 내내 모택동의 편(?)이었기에 마지막 조사를 마치며 모택동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낼 참이었기 때문이다. 이 비하인드 스토리에 유치하게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잠시 동안 흔들리기도 했다. 아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모택동과 장개석의 차이는 분명하다.
다시 되짚어 보자면, 모택동을 존경하는 이유는 13명으로 시작한 공산당이 국민당에게 쫓겨 연안대장정을 진행하면서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크게 성장하게 만든 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연안대장정에서 그가 보여준 여러 일화들은 그의 성품을 짐작케 한다. (식량은 자급자족하고 자기위해 떼어놓은 문짝도 떠나면서 있던 자리에 달아놓을 정도였다.)
반면에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지나간 자리는 착취와 강탈등이 난무했으며 군대도 많았고, 공산당은 물론 일본군에게까지 무기를 팔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모택동이 우리나라에 파병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보낸 중공군 가운데에는 그의 아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 아들은 평양 근교에서 전사하였다. 전 중국을 틀어쥐고 있는 권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사지로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반면에 장개석은 대만으로 쫓겨 간 이후 능력있는 사람이 아닌, 바로 아들 장경국에게 권력을 승계하였다. (이 부분은 같은 남자로서 날 완벽하게 모택동을 존경하게 하였다.)
이념적으로 보면 우리와는 반대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나 모택동은 충분히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다.
쓰다 보니, 결국은 모택동 쪽으로 기울기는 했지만 이렇게 다른 면모를 보였기에 3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모택동의 훌륭한 성품이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라의 진정한 주인은 국민이다. 모택동과 장개석 둘 다 그렇게 말하였지만 그것을 진실로 실천한 사람은 모택동이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도 다시금 되새기며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생각과 말, 말과 실천이 같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는 모택동의 말은 중국, 대한민국과 같이 각 나라를 떠나서 개개인이 가슴에 지녀야 한다고 본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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