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의 국민당 왜 몰락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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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의 국민당 왜 몰락했는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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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 작전상의 조정을 하려 들지 않으며, 혹은 다른 부대의 구원을 하려 하지 않았음이 공산군의 전력을 강화해 주었다. 그래서 국부군을 개별격파 할 수 있었고 이렇게 함으로써 국부군의 종국적 패배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일본군이 항복한 뒤에 국부군부대가 공산군에 첫 투항을 한 것은 1945년 10월 31의 일로 하북성에서 고수훈 장군이 군부대 전부를 데리고 공산군에게 투항한 것이다. 그 뒤부터 부대의 투항수는 급속히 늘어났다. 투항은 전투 진행 중에 일어났으며 많은 전투는 이 같은 투항으로 결판이 났다. 공산군은 이렇게 투항해 오는 국부군을 친절히 대하였고 이 같은 조치는 국부군의 투항을 용이하게 하였다. 투항을 하는 부대는 거의 지방군이었는데, 그들은 중앙당국이 그들을 공산군과 싸우게 하여 그들을 쓸어 없애고자 본거지 성을 떠나 싸우게 하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투항이 많아지자 중앙군은 규모가 큰 지방군을 분해해서 중앙정부에 충성심을 갖고 있는 부대안으로 섞어 놓았다. 이런 조치는 지방군들의 투항률을 줄이기는 했으나 그들의 전투정신을 강화하지는 못했다. 국부군의 사기가 저하되고 있었다는 것이 대부분의 투항의 바닥에 깔려 있었는데, 사기가 가장 낮은 곳은 부대의 하위층이었다. 징병제도는 너무나 부패해 있었기 때문에 보충병력을 적절하게 확보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들에 대한 식사 보급률도 낮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단위부대 병력은 규정되어 있는 병력보다 적었고, 억지로 군대에 끌려온 국부군 병사들은 싸움에 관심이 없었다. 공산군은 국부군의 불만을 교묘하게 이용해 심리적, 정치적 무장이 가장 약한 곳을 향해 집중적인 선전을 폈다.
대부분의 국부군들이 일관되게 불평하고 있는 것은 공산군에 대한 정보의 부족이었다. 첩보활동은 형식적이고 관료적이어서 국부군첩자는 공산군조직 속으로 침입할 수 없었고 반대로 공산군의 함정에 빠졌다. 이와는 반대로 공산군 첩자들들 총사령관의 사무실에서부터 각급 사령부의 사무실에 이르기까지 전부 침투해서 비밀을 캐고 역정보를 뿌렸다. 또한 많은 첩자들이 중요한 직책을 갖고 있었다. 1948년 9월 제남전투 때 제2평정사령부의 책임자는 국부군의 작전계획 전부를 적에게 알려주었고, 내전기간을 통해 국부군 전체의 참모차장으로 있던 유비는 동시에 공산군의 첩자였다. 그들 중 가장 유명한 이는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으로 장개석의 신임을 받던 대융광이었다. 그는 4월 20일 공산군이 양자강을 도하하는 수?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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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0.13
  • 저작시기2004.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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