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공자의 생애
2. 주요사상
1) 인(仁)
2) 덕(德)
3) 효(孝)
4) 예(禮)
3. 경영/전략적 의미
1) 발전을 위해 환경을 바꿔라
2) 부하직원의 능력을 신뢰하라
3) 상사라면 좋은 인격을 갖춰라
4) 높은 사람이라면 행동에서 모범이 되라
5) 리더라면 먼저 말단사원을 배려하라
6) 리더라면 우선 자신의 몸가짐부터 바로 하라
7) 신뢰를 얻으려면 먼저 진심으로 대하라
4. 사례
1) 페덱스 익스프레스(FedEx Express)
2) 멘스웨어하우스
3) 도요타
4) 스타벅스
5) 미라이 공업
Ⅲ. 시사점 및 결론
<참고문헌>
Ⅱ. 본론
1. 공자의 생애
2. 주요사상
1) 인(仁)
2) 덕(德)
3) 효(孝)
4) 예(禮)
3. 경영/전략적 의미
1) 발전을 위해 환경을 바꿔라
2) 부하직원의 능력을 신뢰하라
3) 상사라면 좋은 인격을 갖춰라
4) 높은 사람이라면 행동에서 모범이 되라
5) 리더라면 먼저 말단사원을 배려하라
6) 리더라면 우선 자신의 몸가짐부터 바로 하라
7) 신뢰를 얻으려면 먼저 진심으로 대하라
4. 사례
1) 페덱스 익스프레스(FedEx Express)
2) 멘스웨어하우스
3) 도요타
4) 스타벅스
5) 미라이 공업
Ⅲ. 시사점 및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제점의 해결을 위한 열쇠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같은 덕목은 문명충돌, 환경파괴, 인권유린과 같은 인류사적 문제는 물론 지역갈등, 빈부격차, 노사문제, 교육문제 등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숙제에 명쾌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한때 유학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발간될 정도로 유학을 버려야 할 유산으로 치부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세계가 유학을 재조명 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유학의 본질은 물론 유학이 가지는 현대적 가치를 철저하게 규명해야 하는 시대적 요구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사고에 입각하여 공자가 추구하는 유학의 ‘조화’사상이 현재 글로벌 경제 및 각 기업에 어떻게 적용되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공자의 생애 http://nagizibe.com.ne.kr/ (공자를 찾아서)
http://www.fopra.com/sasang/gongja.htm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가교) 참조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공자(孔子)는 周靈王(주영왕)21년 즉 노나라 양공 21년(BC551)에 아버지 숙양흘(叔梁紇), 어머니 안징재(安徵在) 사이에 창평군 추읍(邑)에서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머리의 중앙이 들어가고 나온 데가 있어 언덕같이 생겼다고 해서 이름을 구(丘)라 했고 니산(尼山)에 기도를 드려 낳았다고 하여 니(尼)자와 항렬을 표시하는 중(仲)을 붙여 자를 중니(仲尼)라고 했다. 공자(孔子) 나이 3세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를 모르고 자랐으며 소년 시절 그는 생계를 위해 노나라의 계씨(季氏) 집의 창고 관리인 노릇도 했고 가축의 관리인 노릇도 했다. 곡물 출납이 공정했고 가축도 급속도로 번식시켰다. 공자가 태어났을 때에 가정환경은 매우 어려웠다.
그의 나이 24세(BC528)에 어머니마저 돌아 가셨는데, 그때에는 아버지의 무덤도 몰라 이웃 사람들에게 물어 합장했다 하였으니, 부모의 장례도 여의치 못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던 듯하다. 그 뒤 그의 직무 능력의 충실함이 알려져 노(魯)나라의 사공(농공국장쯤 되는 벼슬)이라는 공적인 직책을 맡았다. 그러다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뜻을 세워 여러 나라를 전진하여 노나라에 돌아와 예(禮)를 철저히 탐구하였다. 예를 탐구하다 보니 자연히 고대의 역사정치사회윤리도덕예술 등 각 방면에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광범위한 지식을 어느 한 사람에게만 배울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문인 남궁경숙(南宮敬叔)과 더불어 다시 주나라로 가서 옛 의례(依例)를 연구하고 노자(老子)를 만나 예를 묻기도 했다. 이때는 공자의 나이 30세 이전의 일이다.
주(周)나라에서 다시 노(魯)나라로 돌아오자 공자의 명성이 이미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경공(景公)이 안영(晏)을 데리고 노나라를 방문하여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을 때는 공자의 나이 30세였다.
공자가 35세가 되었을 때는 이미 전국의 혼란 속에서 여러 제후들의 상담역이 되어 있었다. 노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제(齊)나라로 다시 건너간 공자는 제나라의 낙관(樂官)의 장(長)인 태사(太師)와 음악을 논하고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 배우는 데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었다고 한다. 제나라 경공(景公)이 어느 날 선정(善政)에 관해 물었을 때, “선정이란 국비를 절약하는 데 있다”고 한 공자의 논리는 많은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렇게 되자 제나라 신하들 가운데는 공자를 시기하여 추방하는 음모가 꾸며졌다. 이를 안 공자는 홀연히 제나라를 떠나 다시 고국 노나라로 돌아왔다.
42세가 된 공자는 마침내 정치에 관여하기를 단념하고 학문을 탐구하면서 역사와 음악에 관한 서적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50세가 된 공자는 학문이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날마다 모여드는 제자와 더불어 인생과 경륜을 논하고 가르쳤다. 그의 명성은 더욱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노라의 정공(定公)은 공자(孔子)를 등용하였다. 처음 중도(中都)라는 고을의 장관으로부터 점차 승진하여 대사구(大司寇)가 되었고, 그 후에는 재상의 일까지 섭행하게 되었다.
공자의 등용 이후 그때까지 어지럽기만 하던 노나라의 질서가 잡히고 이웃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그들은 공자를 제거할 간계를 꾸미기 시작했다. 헌납만을 가장한 이웃 사람의 간계에 빠져 처녀 연예인 80여 명과 치장을 한 말 120여 필을 받아들인 정공과 재상 계환자(季桓子)가 정사를 그르치자 공자는 마침내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위송진채초정 등 여러 나라를 14년 동안이나 유랑하여 갖은 고생과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기도 했다.
60세 노령의 몸으로 천하를 주유하면서 인에 의한 덕치를 실현하고자 했으나, 공자의 이상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무력에 의한 영토 확장, 권모술수에 의한 권력 쟁탈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공자의 눈에 비친 제후들은 실망과 탄식만을 안겨 주었다. 도덕적 질서를 바로 잡는데 회의를 느낀 공자는 드디어 벼슬하기를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의 교육과 시서역예락춘추 등 문헌의 정이에 몰두하다 B.C 479년 세상을 떠났다. 이때 공자의 나이 74세였으며 제자는 모두 3000명인데 몸소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가 72인 이었다.
우리는 공자가 이러한 어린 시절의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성인으로 후세에 추앙 받기에 이른 그의 생애와 사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개인 문제나 가정생활의 문제를 벗어나 어지러운 만심을 바로잡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관심을 옮기게 되었고, 그의 명성도 커져서 문하에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의 명성이 알려지게 되면서 정계에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50세부터는 노(魯)나라의 정공에 임용되어 중도의 재(宰), 사공을 거쳐 대사구(大司寇)라는 하대부의 위치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노나라의 질서와 제도의 혼란에 따른 사회적 부패와 모순을 바로 잡으려고 하던 그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56세부터 13년간(BC497-484)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제후를 찾아 유력 생활을 떠났다. 비록 제자들과 함께 여행하는 중 양식이 떨어져 굶주리기도 하고, 죽음의 고
인의예지(仁義禮智)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같은 덕목은 문명충돌, 환경파괴, 인권유린과 같은 인류사적 문제는 물론 지역갈등, 빈부격차, 노사문제, 교육문제 등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숙제에 명쾌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한때 유학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발간될 정도로 유학을 버려야 할 유산으로 치부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세계가 유학을 재조명 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유학의 본질은 물론 유학이 가지는 현대적 가치를 철저하게 규명해야 하는 시대적 요구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사고에 입각하여 공자가 추구하는 유학의 ‘조화’사상이 현재 글로벌 경제 및 각 기업에 어떻게 적용되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공자의 생애 http://nagizibe.com.ne.kr/ (공자를 찾아서)
http://www.fopra.com/sasang/gongja.htm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가교) 참조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공자(孔子)는 周靈王(주영왕)21년 즉 노나라 양공 21년(BC551)에 아버지 숙양흘(叔梁紇), 어머니 안징재(安徵在) 사이에 창평군 추읍(邑)에서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머리의 중앙이 들어가고 나온 데가 있어 언덕같이 생겼다고 해서 이름을 구(丘)라 했고 니산(尼山)에 기도를 드려 낳았다고 하여 니(尼)자와 항렬을 표시하는 중(仲)을 붙여 자를 중니(仲尼)라고 했다. 공자(孔子) 나이 3세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를 모르고 자랐으며 소년 시절 그는 생계를 위해 노나라의 계씨(季氏) 집의 창고 관리인 노릇도 했고 가축의 관리인 노릇도 했다. 곡물 출납이 공정했고 가축도 급속도로 번식시켰다. 공자가 태어났을 때에 가정환경은 매우 어려웠다.
그의 나이 24세(BC528)에 어머니마저 돌아 가셨는데, 그때에는 아버지의 무덤도 몰라 이웃 사람들에게 물어 합장했다 하였으니, 부모의 장례도 여의치 못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던 듯하다. 그 뒤 그의 직무 능력의 충실함이 알려져 노(魯)나라의 사공(농공국장쯤 되는 벼슬)이라는 공적인 직책을 맡았다. 그러다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뜻을 세워 여러 나라를 전진하여 노나라에 돌아와 예(禮)를 철저히 탐구하였다. 예를 탐구하다 보니 자연히 고대의 역사정치사회윤리도덕예술 등 각 방면에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광범위한 지식을 어느 한 사람에게만 배울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문인 남궁경숙(南宮敬叔)과 더불어 다시 주나라로 가서 옛 의례(依例)를 연구하고 노자(老子)를 만나 예를 묻기도 했다. 이때는 공자의 나이 30세 이전의 일이다.
주(周)나라에서 다시 노(魯)나라로 돌아오자 공자의 명성이 이미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경공(景公)이 안영(晏)을 데리고 노나라를 방문하여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을 때는 공자의 나이 30세였다.
공자가 35세가 되었을 때는 이미 전국의 혼란 속에서 여러 제후들의 상담역이 되어 있었다. 노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제(齊)나라로 다시 건너간 공자는 제나라의 낙관(樂官)의 장(長)인 태사(太師)와 음악을 논하고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 배우는 데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었다고 한다. 제나라 경공(景公)이 어느 날 선정(善政)에 관해 물었을 때, “선정이란 국비를 절약하는 데 있다”고 한 공자의 논리는 많은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렇게 되자 제나라 신하들 가운데는 공자를 시기하여 추방하는 음모가 꾸며졌다. 이를 안 공자는 홀연히 제나라를 떠나 다시 고국 노나라로 돌아왔다.
42세가 된 공자는 마침내 정치에 관여하기를 단념하고 학문을 탐구하면서 역사와 음악에 관한 서적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50세가 된 공자는 학문이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날마다 모여드는 제자와 더불어 인생과 경륜을 논하고 가르쳤다. 그의 명성은 더욱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노라의 정공(定公)은 공자(孔子)를 등용하였다. 처음 중도(中都)라는 고을의 장관으로부터 점차 승진하여 대사구(大司寇)가 되었고, 그 후에는 재상의 일까지 섭행하게 되었다.
공자의 등용 이후 그때까지 어지럽기만 하던 노나라의 질서가 잡히고 이웃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그들은 공자를 제거할 간계를 꾸미기 시작했다. 헌납만을 가장한 이웃 사람의 간계에 빠져 처녀 연예인 80여 명과 치장을 한 말 120여 필을 받아들인 정공과 재상 계환자(季桓子)가 정사를 그르치자 공자는 마침내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위송진채초정 등 여러 나라를 14년 동안이나 유랑하여 갖은 고생과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기도 했다.
60세 노령의 몸으로 천하를 주유하면서 인에 의한 덕치를 실현하고자 했으나, 공자의 이상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무력에 의한 영토 확장, 권모술수에 의한 권력 쟁탈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공자의 눈에 비친 제후들은 실망과 탄식만을 안겨 주었다. 도덕적 질서를 바로 잡는데 회의를 느낀 공자는 드디어 벼슬하기를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의 교육과 시서역예락춘추 등 문헌의 정이에 몰두하다 B.C 479년 세상을 떠났다. 이때 공자의 나이 74세였으며 제자는 모두 3000명인데 몸소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가 72인 이었다.
우리는 공자가 이러한 어린 시절의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성인으로 후세에 추앙 받기에 이른 그의 생애와 사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개인 문제나 가정생활의 문제를 벗어나 어지러운 만심을 바로잡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관심을 옮기게 되었고, 그의 명성도 커져서 문하에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의 명성이 알려지게 되면서 정계에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50세부터는 노(魯)나라의 정공에 임용되어 중도의 재(宰), 사공을 거쳐 대사구(大司寇)라는 하대부의 위치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노나라의 질서와 제도의 혼란에 따른 사회적 부패와 모순을 바로 잡으려고 하던 그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56세부터 13년간(BC497-484)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제후를 찾아 유력 생활을 떠났다. 비록 제자들과 함께 여행하는 중 양식이 떨어져 굶주리기도 하고, 죽음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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