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팬픽(팬픽션)의 정의
Ⅲ. 팬픽(팬픽션)의 특징
Ⅳ. 팬픽(팬픽션)과 여성문화
Ⅴ. 팬픽(팬픽션)의 사례
Ⅵ. 판타지소설(환타지소설)의 정의
Ⅶ. 판타지소설(환타지소설)의 배경
Ⅷ. 판타지소설(환타지소설)의 범주
Ⅸ. 판타지소설(환타지소설)의 문제점
Ⅹ. 결론 및 제언
참고문헌
Ⅱ. 팬픽(팬픽션)의 정의
Ⅲ. 팬픽(팬픽션)의 특징
Ⅳ. 팬픽(팬픽션)과 여성문화
Ⅴ. 팬픽(팬픽션)의 사례
Ⅵ. 판타지소설(환타지소설)의 정의
Ⅶ. 판타지소설(환타지소설)의 배경
Ⅷ. 판타지소설(환타지소설)의 범주
Ⅸ. 판타지소설(환타지소설)의 문제점
Ⅹ. 결론 및 제언
참고문헌
본문내용
비판하는 것은 물고기를 잡는 그물로 참새를 잡으면서 왜 한 마리도 안 잡히냐고 투덜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판타지 소설의 문학성은 감동이 아니라 재미이며, 갈등을 통한 자아와 세계의 충돌과 거기에서 기인하는 비극성이 아니라, 대립을 통한 자아와 세계의 충돌과 궁극적인 승리가 독자에게 제공해주는 쾌락적 환기이다. 문학성이 고정되고 불변한 고유명사가 아니라면, 당연히 판타지 소설의 문학성은 여타 소설의 문학성과 달라야 옳다. 지금 10대들이 토지나 장길산을 읽고 느낄 답답함과 40대 들이 드래곤 라자나 용의 신전을 읽고 느낄 황당함 사이에 존재하는 분명한 문학적 거리를 우리는 인정하여야 한다.
가뜩이나 위축된 순수문학시장을 판타지 소설들이 잠식해 들어간다는 우려는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한심한 지적이다. 파이가 커지면 그만큼 분배의 크기도 커질 것이다. 우리가 정작 우려해야 할 것은 독서 시장의 위축이지 순수문학시장의 위축이 아니다. 더구나 순수문학시장이 위축된 것은 문학이 응당 갖추어야 할 시대 조응력과 응전력을 본격문학이 도외시한 당연한 결과일 뿐 판타지문학의 성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판타지 소설이 너무 지나친 서구 지향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비판 역시 판타지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심정적인 비난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들은 물론이거니와, 마법의 이름, 무기나 방어구의 이름, 지명까지 모두 외우기도 힘든 외래어 일색이다. 배경이나 상황은 중세 유럽을 연상시키며, 서구의 신화가 소설의 주요한 모티브로 기능하고 있다. 이는 판타지 소설의 전통이 서구에서 시작되었고, 국내뿐만 아니라 서구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톨킨의 반지전쟁이 작가들에게 일종의 억압적 메타 텍스트로 작용한 당연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서양에 ‘판타지’라는 장르가 있다면 동양에는 ‘무협’이라는 장르가 있는데, 배경이나 상황, 아이템이나 지명을 한국적인 것으로 바꿀 경우 무협지와 별반 차이가 없게 된다는 점도 작가들이 서구 지향적일 수밖에 없는 원인이기도 하다. 판타지 문학은 이제 막 출발하였고, 출발을 위한 준비물들을 서구로부터 빌려왔다. 왜 빌려왔냐고 질책할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판타지 소설로 나아가기 위한 순차적인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판타지 소설에 대한 이 같은 잘못된 문제 제기들이 본격문학 계간지와 막강한 문학권력인 일간신문의 문학 지면을 통해 생산되고 있음은 현실 공간의 문학 집단들이 여전히 편협하고 폐쇄적이며 배타적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판타지 소설이 인터넷 공간에서 탄생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Ⅹ. 결론 및 제언
사이버는 실험의 공간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고, 자신을 자신이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겪어온 생활 속에 녹아있는 자기를 벗어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여성이 남성으로 사이버에서 활동하는 것은 그 여성이 가지고 있던 남성의 이미지가 투사되는 것 이상이 되기 어렵다. 자기 주변의 남성, 자신이 읽은 책에서의 남성, 그간 사귀었던 남성이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사이버에 투영되는 것이지, 새로운 남성이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즉, 사이버는 눈에 보이는 외양을 떠나 거울처럼 내면을 비춰줄 수는 있지만, 완전히 새로운 실험이 가능한 가짜의 공간은 아니다. 그래서 사이버는 언제나 현실과의 끈을 놓을 수가 없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각 문화가 사이버에서는 변형된 형태로 존재한다. 행위의 방식은 다르지만, 유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사회처럼 사이버에서도 하위문화들이 존재한다. 청소년들은 어른들에 비해 더 스타일을 중시하고, 더 주목받기를 원하며, 학교에서의 억눌림을 풀어보기를 갈망한다. 영상세대로서 비쥬얼한 것을 선호하고, 컴퓨터 세대로서 비트의 빠르기를 추구한다. 그런 빠름의 문화 속에서, 스타일의 추구 속에서 잠시 물러나 생각하는 습관이 줄어든다. 글은 이미 말이 되어, 쉽게 거친 표현이 나오고, 음란한 표현과 저속한 이야기가 내용을 채운다. 그러나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자정할 것을 촉구하고, 동호회를 통해 연대의식을 가지며, 자신의 문제를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도 사이버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가능하다. 자기의 스타일을 만들고, 학교와는 다른 이미지로 활동해 보는 것도 사이버의 특권이다. 청소년들은 채팅이나 동호회활동에서 우연히 자기가 사실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자기 내면에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를 깨닫기도 하고, 자신의 문제가 학교의 구조와 관련되는, 개인을 넘어서는 문제라는 사실을 알기도 한다. 그러므로 파편적으로 드러나는 여러 문제에 대하여 학교와 동일한 금지라는 처방을 내리는 것은 새로운 대화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일이다. 오히려 사이버의 특성을 살려, 더 많은 표현과 체험의 과정 속에서 문제들을 스스로 자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교 사이트를 현실화하여 학생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도록 한다거나, 사이버의 룰(rule)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설명하는 것, 청소년의 열정이 보다 창조적인 논의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학습중심의 동호회를 확장하고, 운영진이 리더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갖추도록 돕는 것 등이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환상의 세계, 내면이 투사되는 세계 속에서 청소년들은 현실 세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성숙에 도움을 주는 내용을 배울 수도 있고, 그저 배설의 욕구에 급급하면서 세월을 보낼 수도 있다. 갈림길의 청소년에게 어른이 줄 수 있는 도움이란, 화살표만 표시된 이정표가 아니라 두 길에 대한 자세한 설명서를 주는 일이다.
참고문헌
1. 김성천, 야오이와 팬픽 문화, 학교 CA를 통한 미디어 수용자 운동, 제3기 교사미디어 아카데미 공개강좌 자료집, 2000
2. 김성곤, 99판타지문학심포지엄, 서구환상문학의 역사와 이론
3. 다케루베 노부아키 외, 판타지의 주인공들, 들녘, 2000
4. 이유선, 판타지 문학의 이해, 도서출판 역락, 2005
5. 최은정, 팬픽, 그들만의 판타지 ‘Cyber is....’, 사이버문화연구소 편, 서울 : 역사넷, 2001
가뜩이나 위축된 순수문학시장을 판타지 소설들이 잠식해 들어간다는 우려는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한심한 지적이다. 파이가 커지면 그만큼 분배의 크기도 커질 것이다. 우리가 정작 우려해야 할 것은 독서 시장의 위축이지 순수문학시장의 위축이 아니다. 더구나 순수문학시장이 위축된 것은 문학이 응당 갖추어야 할 시대 조응력과 응전력을 본격문학이 도외시한 당연한 결과일 뿐 판타지문학의 성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판타지 소설이 너무 지나친 서구 지향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비판 역시 판타지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심정적인 비난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들은 물론이거니와, 마법의 이름, 무기나 방어구의 이름, 지명까지 모두 외우기도 힘든 외래어 일색이다. 배경이나 상황은 중세 유럽을 연상시키며, 서구의 신화가 소설의 주요한 모티브로 기능하고 있다. 이는 판타지 소설의 전통이 서구에서 시작되었고, 국내뿐만 아니라 서구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톨킨의 반지전쟁이 작가들에게 일종의 억압적 메타 텍스트로 작용한 당연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서양에 ‘판타지’라는 장르가 있다면 동양에는 ‘무협’이라는 장르가 있는데, 배경이나 상황, 아이템이나 지명을 한국적인 것으로 바꿀 경우 무협지와 별반 차이가 없게 된다는 점도 작가들이 서구 지향적일 수밖에 없는 원인이기도 하다. 판타지 문학은 이제 막 출발하였고, 출발을 위한 준비물들을 서구로부터 빌려왔다. 왜 빌려왔냐고 질책할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판타지 소설로 나아가기 위한 순차적인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판타지 소설에 대한 이 같은 잘못된 문제 제기들이 본격문학 계간지와 막강한 문학권력인 일간신문의 문학 지면을 통해 생산되고 있음은 현실 공간의 문학 집단들이 여전히 편협하고 폐쇄적이며 배타적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판타지 소설이 인터넷 공간에서 탄생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Ⅹ. 결론 및 제언
사이버는 실험의 공간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고, 자신을 자신이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겪어온 생활 속에 녹아있는 자기를 벗어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여성이 남성으로 사이버에서 활동하는 것은 그 여성이 가지고 있던 남성의 이미지가 투사되는 것 이상이 되기 어렵다. 자기 주변의 남성, 자신이 읽은 책에서의 남성, 그간 사귀었던 남성이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사이버에 투영되는 것이지, 새로운 남성이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즉, 사이버는 눈에 보이는 외양을 떠나 거울처럼 내면을 비춰줄 수는 있지만, 완전히 새로운 실험이 가능한 가짜의 공간은 아니다. 그래서 사이버는 언제나 현실과의 끈을 놓을 수가 없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각 문화가 사이버에서는 변형된 형태로 존재한다. 행위의 방식은 다르지만, 유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사회처럼 사이버에서도 하위문화들이 존재한다. 청소년들은 어른들에 비해 더 스타일을 중시하고, 더 주목받기를 원하며, 학교에서의 억눌림을 풀어보기를 갈망한다. 영상세대로서 비쥬얼한 것을 선호하고, 컴퓨터 세대로서 비트의 빠르기를 추구한다. 그런 빠름의 문화 속에서, 스타일의 추구 속에서 잠시 물러나 생각하는 습관이 줄어든다. 글은 이미 말이 되어, 쉽게 거친 표현이 나오고, 음란한 표현과 저속한 이야기가 내용을 채운다. 그러나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자정할 것을 촉구하고, 동호회를 통해 연대의식을 가지며, 자신의 문제를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도 사이버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가능하다. 자기의 스타일을 만들고, 학교와는 다른 이미지로 활동해 보는 것도 사이버의 특권이다. 청소년들은 채팅이나 동호회활동에서 우연히 자기가 사실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자기 내면에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를 깨닫기도 하고, 자신의 문제가 학교의 구조와 관련되는, 개인을 넘어서는 문제라는 사실을 알기도 한다. 그러므로 파편적으로 드러나는 여러 문제에 대하여 학교와 동일한 금지라는 처방을 내리는 것은 새로운 대화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일이다. 오히려 사이버의 특성을 살려, 더 많은 표현과 체험의 과정 속에서 문제들을 스스로 자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교 사이트를 현실화하여 학생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도록 한다거나, 사이버의 룰(rule)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설명하는 것, 청소년의 열정이 보다 창조적인 논의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학습중심의 동호회를 확장하고, 운영진이 리더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갖추도록 돕는 것 등이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환상의 세계, 내면이 투사되는 세계 속에서 청소년들은 현실 세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성숙에 도움을 주는 내용을 배울 수도 있고, 그저 배설의 욕구에 급급하면서 세월을 보낼 수도 있다. 갈림길의 청소년에게 어른이 줄 수 있는 도움이란, 화살표만 표시된 이정표가 아니라 두 길에 대한 자세한 설명서를 주는 일이다.
참고문헌
1. 김성천, 야오이와 팬픽 문화, 학교 CA를 통한 미디어 수용자 운동, 제3기 교사미디어 아카데미 공개강좌 자료집, 2000
2. 김성곤, 99판타지문학심포지엄, 서구환상문학의 역사와 이론
3. 다케루베 노부아키 외, 판타지의 주인공들, 들녘, 2000
4. 이유선, 판타지 문학의 이해, 도서출판 역락, 2005
5. 최은정, 팬픽, 그들만의 판타지 ‘Cyber is....’, 사이버문화연구소 편, 서울 : 역사넷,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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