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독일통일의 배경
2. 독일통일의 과정
구소련의 몰락
1. 구소련의 몰락 과정
2. 독일통일의 과정
구소련의 몰락
1. 구소련의 몰락 과정
본문내용
한다는등 보수파의 입지를 더욱더 좁게 하였다.
결국 쿠데타 발생 3일만인 8월 21일에 모든 상황이 종료되어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④ 새로운 정치 실세 옐친의 등장
강경보수파의 불발 쿠데타 이후 자신의 권력기반을 일거에 상실했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붕괴 위기에 직면한 소련 연방체제 유지를 위한 전국주도권 회복작업을 본격화 하였다. 고르바초프의 입장에서는 당면한 최대현안이 연방붕괴저지였다. 고르바초프는 공산당 활동 중지, 군부 및 KGB지도부의 대대적 개편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조치에도 불구하고 신연방조약에 참여했던 공화국들이 다시 독립을 요구하게 되고 쿠데타 이후 고르바초프를 능가하는 새로운 정치실세로 부상한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이 러시아 주도의 소련연방을 주장함으로써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위상과 중앙정부의 권한은 급속히 추락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보수강경파 쿠데타에 맞선 투쟁에서 승리한 옐친은 일개 공화국 대통령의 권한을 뛰어넘어 초헌법적 권력행사로 소련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러시아 공화국의 우위론과 지도국을 표방하였다. 옐친의 이러한 독주는 고르바초프를 무력화하였으며,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가맹공화국들에게 러시아 민족주의에 대한 우려를 갖게 하였다. 고르바초프와 연방의 무력, 그리고 옐친의 연방 권력장악은 우크라이나와 여타공화국들의 독립을 촉진시켰다.
⑤고르바초프의 사임과 소련연방의 붕괴
소련연방 제2의 공화국 인구 5200만 명으로 프랑스와 비슷한 크기의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독립, 거기에다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미국의 대소련 정책변화는 소련연방을 지키려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마지막 희망과 몸부림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12월 5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은 전국에 방영된 TV를 통해 러시아 공화국은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참여할 경우에만 신연방조약에 서명할 것이라고 발표함으로써 사실상 신연방조약 서명을 거부하였다. 이어서 러시아 공화국은 소련연방재정을 장악하고 연방외무성 국내외 전자산도 인수한다고 발표하였다. 12월 6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6개 공화국이 소련연방자산 및 채무분배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소련연방은 해체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1985년 3월 11일 어렵게 서기장에 올라 집권한 고르바초프는 그동안 6년 9개월 동안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 1989년 동구 대변혁 얄타 체제하의 세계냉전구조 종식, 베를린장벽의 제거 등 세계사적 변동을 가져왔다. 그러나 국내 정치에 실패하고 체제옹호세력과 급진개혁세력의 도전을 극복하지 못하여 소련연방의 마지막 집권자로 소련연방의 최초의 대통령으로 그리고 최후의 대통령으로 역사의 전면에서 퇴장하였다.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소련연방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세계 언론들은 고르바초프가 20세기 위대한 인물로 세계사적 업적을 남기고 세계를 재창조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소련언론들도 고르바초프를 20세기 가장 탁월한 개혁가로서 우리 인민에게 언론과 사고의 자유를 준 정치지도자였다고 평가하였다. 경제실패로 상징되는 고르바초프의 국내 정치실패가 그를 도중 하차케 하였지만 그는 러시아를 비롯 모든 가맹국 공화국 인민들에게 수십년간 지속되어온 악재로부터 해방과 자유의 기반을 구축케 하였다. 1991년 12월 26일 TV를 통하여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연방대통령직과 군 최고사령관직 핵무기 통제권한을 옐친에게 양도하는 내용이 담긴 포고령에 서명함으로써 1917년 볼세비키 10월 혁명이래 74년간 거대한 소련연방대륙을 지배했던 초강대국 소련제국이 종언을 고하였다. 그리고 크렘린궁 꼭대기에 게양되어있던 망치와 낫이 그려진 소련연방 적색기가 내려졌다.
결국 쿠데타 발생 3일만인 8월 21일에 모든 상황이 종료되어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④ 새로운 정치 실세 옐친의 등장
강경보수파의 불발 쿠데타 이후 자신의 권력기반을 일거에 상실했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붕괴 위기에 직면한 소련 연방체제 유지를 위한 전국주도권 회복작업을 본격화 하였다. 고르바초프의 입장에서는 당면한 최대현안이 연방붕괴저지였다. 고르바초프는 공산당 활동 중지, 군부 및 KGB지도부의 대대적 개편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조치에도 불구하고 신연방조약에 참여했던 공화국들이 다시 독립을 요구하게 되고 쿠데타 이후 고르바초프를 능가하는 새로운 정치실세로 부상한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이 러시아 주도의 소련연방을 주장함으로써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위상과 중앙정부의 권한은 급속히 추락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보수강경파 쿠데타에 맞선 투쟁에서 승리한 옐친은 일개 공화국 대통령의 권한을 뛰어넘어 초헌법적 권력행사로 소련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러시아 공화국의 우위론과 지도국을 표방하였다. 옐친의 이러한 독주는 고르바초프를 무력화하였으며,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가맹공화국들에게 러시아 민족주의에 대한 우려를 갖게 하였다. 고르바초프와 연방의 무력, 그리고 옐친의 연방 권력장악은 우크라이나와 여타공화국들의 독립을 촉진시켰다.
⑤고르바초프의 사임과 소련연방의 붕괴
소련연방 제2의 공화국 인구 5200만 명으로 프랑스와 비슷한 크기의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독립, 거기에다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미국의 대소련 정책변화는 소련연방을 지키려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마지막 희망과 몸부림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12월 5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은 전국에 방영된 TV를 통해 러시아 공화국은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참여할 경우에만 신연방조약에 서명할 것이라고 발표함으로써 사실상 신연방조약 서명을 거부하였다. 이어서 러시아 공화국은 소련연방재정을 장악하고 연방외무성 국내외 전자산도 인수한다고 발표하였다. 12월 6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6개 공화국이 소련연방자산 및 채무분배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소련연방은 해체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1985년 3월 11일 어렵게 서기장에 올라 집권한 고르바초프는 그동안 6년 9개월 동안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 1989년 동구 대변혁 얄타 체제하의 세계냉전구조 종식, 베를린장벽의 제거 등 세계사적 변동을 가져왔다. 그러나 국내 정치에 실패하고 체제옹호세력과 급진개혁세력의 도전을 극복하지 못하여 소련연방의 마지막 집권자로 소련연방의 최초의 대통령으로 그리고 최후의 대통령으로 역사의 전면에서 퇴장하였다.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소련연방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세계 언론들은 고르바초프가 20세기 위대한 인물로 세계사적 업적을 남기고 세계를 재창조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소련언론들도 고르바초프를 20세기 가장 탁월한 개혁가로서 우리 인민에게 언론과 사고의 자유를 준 정치지도자였다고 평가하였다. 경제실패로 상징되는 고르바초프의 국내 정치실패가 그를 도중 하차케 하였지만 그는 러시아를 비롯 모든 가맹국 공화국 인민들에게 수십년간 지속되어온 악재로부터 해방과 자유의 기반을 구축케 하였다. 1991년 12월 26일 TV를 통하여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연방대통령직과 군 최고사령관직 핵무기 통제권한을 옐친에게 양도하는 내용이 담긴 포고령에 서명함으로써 1917년 볼세비키 10월 혁명이래 74년간 거대한 소련연방대륙을 지배했던 초강대국 소련제국이 종언을 고하였다. 그리고 크렘린궁 꼭대기에 게양되어있던 망치와 낫이 그려진 소련연방 적색기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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