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부흥(하나님의 성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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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주사부흥(하나님의 성회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 론
본 론
제1장 부흥의 발원
1.성령 감림과 초대교회 탄생
2.초대교회의 쇠퇴와 수도원 등장
3.신비주의자들
4.종교개혁의 본질
5.카미사드, 재 침례파와 모라비안 교도들
6.존 웨슬리와 감리교
제2장 대각성 운동
1.대각성 운동의 뿌리
2.제2차 대각성 운동과 케인리치와 찰스피니
3.에드워드 어빙과 사도교회 4. 포우비 팔머
5.성결운동 6. 존 알렉산더 도위
7.마리아 우즈워스 에터 8. 찰스메이슨
9.웨일즈 부흥
제3장 오순절운동의 아버지 “찰스 펄햄”과 촉매자 “윌리엄 세이모어”
1.오순절 운동의 태동
2.찰스 펄햄의 생애와 오순절 운동
3.오순절 운동의 촉매자 윌리엄 세이모어
4.아주사 거리 오순절 성령세례
5.윌리엄 세이모어의 설교
6.아주사의 여인들
제4장 반대, 분열 그리고 논쟁
제5장 부흥의 파도를 넘어
결 론

본문내용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스칸디나비아, 중국, 인도, 이집트, 아일랜드, 그리고 여러 다른 나라로 떠났습니다.
5.윌리엄 세이모어의 설교
윌리엄 세이모어는 온유한 사람이었고 직선적이었지만 말을 할 때에는 약간 소극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단이나 강단 밖에서는 화산이 폭발하듯 열정적이기도 했습니다.
세이모어는 자신을 설교자라기 보다는 교사로 여겼습니다. 아주사의 집회는 길었고 진행방식도 자발적이었습니다. 가끔 한두 가지 악기들이 포함되기도 했지만 초기의 음악은 아카벨라였고 제니 에반스가 가끔씩 예배시간에 피아노를 치기도 했습니다. 찬송이 있고 방문객들이 간증을 하거나 간증문을 써 온 사람들이 그것을 읽기도 했습니다. 기도를 한 후 구원, 성화 혹은 성령세례를 위한 강단 초청이 있었습니다. 설교는 미리 준비하지 않았고 대부분이 성령의 감동에 따라 즉흥적으로 이뤄졌으며 300-500명의 사람들이 흰색 목조 건물에 겨우 들어 올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밖에 서 있어야만 했습니다. 예배는 일층에서 드렸고 긴 의자가 직사각형 형태로 놓여 있었고 초기에는 강대상도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그의 설교 대부분은 구속을 통해 죄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거룩함을 받으며 보배로운 구속을 통해 질병을 치유받고 거룩한 삶을 통해 성령의 불과 세례를 받는 다는 내용이었습니다.
6.아주사의 여인들
아주사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여성들은 제니 에반스 무어(1908년 세이모어와 결혼함), 에반스 부인, 포우비 사전트, 루시 패로우 오펠리아 윌리, 클라라 럼 그리고 플로렌스 크로포드였습니다. 아주사 거리 선교회 12명의 장로 중에 6명이 여자였습니다. 이들은 가능성 있는 선교사와 후보를 발굴하고 임명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또한 이들은 찬양을 인도하고 때로는 아주사의 회중에게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세이모어가 1922년 죽었을 때 그의 부인이었던 제니는 아주사 선교회의 목사직을 계속 수행했습니다. 수많은 여성 전도자들이 아주사에서 혹은 아주사를 방문한 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세계 여러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들 중에 아이비 캠벨은 오하이오 주에서 복음을 전했고 마블 스미스는 시카고에서 넘치는 군중에게 밤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레이철 사이즈 러브는 미주리 주에서 복음을 전했고 루시 레더맨은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플로렌스 크로포드는 오리곤 주에 까지 사도적 믿음 선교회를 세웠습니다.
제 4장 반대, 분열 그리고 논쟁
초창기 영적 지도자로 펄햄을 지목했던 세이모어의 간절한 바램은 펄햄이 아주사 부흥의 현장에 도착 할 때 까지만 계속 되었습니다. 이 운동의 과도한 주정주의(主情主義)에 예민했던 펄햄은 아주사의 열광적인 모임을 가혹하게 비난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떠나 달라고 부탁했고 그 모임의 참여를 금하자 그는 비난의 강도를 더욱 높였습니다. 펄햄은 이 회중이 최면술사와 강신술사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난했습니다. 아주사에서 일어난 사건을 상세히 살펴보면 이 사역이 결국 분열된 세 가지 주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1)인종 차별주의 2)교리적 논쟁 3)개인적 다툼입니다.
1.인종 차별주의
초창기 모임은 연합되고 영광스러웠다. 세이모어가 흑인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추종자 중 많은 이들은 백인이었습니다. 부흥 초기에는 흑인이 주된 세력이었지만 이 모임이 절정을 이뤘을 때는 백인들이 더 많았습니다. 아주사 거리의 선교회의 스태프도 남녀가 혼합되어 있었으며 흑인과 백인이 섞여 있었습니다. 프랭크 바틀맨은 아주사 부흥에 관해 보고하면서 이 사역을 찬양했고 인종간 피부색깔이 보혈로 완전히 씻겨 졌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짐 크로우의 법령에 따른 인종적 차별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커다란 갈망과 성화에 대한 열정은 여러 인종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아주사 부흥이 시작된 지 만 일년이 지난 1907년 (사도적 믿음)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교회는 모든 인종과 민족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인종간의 조화를 이루며 함께 예배하던 시절이 점차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주정주의에 대한 펄햄의 경멸적인 언사에 대하여 그는 인종 차별적인 발언을 하였습니다. 1906년 1월 세이모어의 초청을 받은 펄햄이 아주사 거리를 방문 하였을 때 그는 이 부흥을 “흑인들의 캠프모임”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아주사 모임에 대한 또 다른 압박은 L.A.지역 신문의 인종차별적 공세였습니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백인들은 아주사 거리를 떠나 다른 교회로 옮겨 갔습니다. 백인들이 떠나자 아주사 거리 선교회에는 흑인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세이모어는 사도적 믿음 운동의 교리와 규정 그리고 헌법을 개정하여 자신을 감독으로 임명했고 후계자는 언제나 흑인이 되도록 정했습니다.
2.교리적 논쟁
인종 차별주의로 인해 아주사 본래의 연합과 기쁨이 깨진 것 처럼 교리적 불일치가 등장하면서 마찰이 생겼다. 이러한 논쟁의 주된 논점은 성화와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1)성화
존 웨슬리는 회심한 이후에 순간적인 경험을 통해 신자는 온전히 성화 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와 같은 성화의 이해에 근거하여 오순절 주의자들은 이를 “성령세례”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방언의 경험을 들었습니다. 다른 감리교인처럼 펄햄은 성화는 구원과 별개로 은혜의 두번째 역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세번째 경험을 말함으로써 성결에 관해 보다 더 급진적인 믿음을 채택했습니다. 그것은 “성령과 불세례”였습니다. 그의 제자였던 윌리엄 세이모어는 이 믿음을 아주사로 가져와 성령안에서의 성화와 세례에 접목시켰고 성령세례가 성화의 열쇠라고 믿었습니다.
이에 대해 L.A.의 설교가인 읠리엄 덜햄은 반대입장을 표명했습니다. 그는 1910년 시카고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서 도전장을 내고 점진적인 성화를 주장했습니다. 점진적 성화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거룩케 하시는 역사는 우리의 일생에 걸쳐 “충당된다”. 그리고 나서 덜햄은 “갈보리의 완전한 역사”라는 메시지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의 성화에 대한 반대 입장에 서 있던 아주사 선교회에 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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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3.04
  • 저작시기20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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