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의 다면적 고찰과 시대사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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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4.19 혁명의 다면적 고찰과 시대사적 평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 4.19 혁명 고찰의 의미

Ⅱ. 4월혁명의 역사적 배경 - 1950년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
1. 이승만 정권과 독재정부
(1) 이승만 정권의 구조와 성격
(2) 독재정부의 수립
2. 미국의 원조정책과 관료자본의 축척
3. 반공이데올로기와 자유민주주의

Ⅲ. 4월혁명의 발발-끓어오르는 민중의 분노, 그러나 미완의 혁명
1. 원조 경제의 붕괴
2. 이승만 정권의 종말
3. 4월혁명의 전말

Ⅳ. 4월혁명의 심화․발전 - 민중운동의 고양과 민족 통일 운동
1. 혁신 정당 운동
(1) 혁신세력의 재기와 7.29총선
(2) 혁신 정당 운동의 새로운 모색
2. 민중 운동의 활성화
(1) 학생운동
(2) 통일운동의 고양
(3) 노동운동
3. 교육과 언론
(1) 교원 노조 운동과 교육
(2) 언론 왕국 시대의 도래

Ⅴ. 4월 혁명의 역사적 의의 - 4월 혁명의 다양한 해석들

Ⅵ. 요약 및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주요 지도자들도 처형당하므로써 혁신 정당 운동은 사실상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965년 김철에 의해 통일 사회당이 재건되었지만, 박정희 정권의 계속되는 탄압과 원내진출의 실패로 명맥만 유지하다가 1980년 5.17이후 전두환 정권 아래서는 ‘민주사회당’으로 간판을 바꾸어 그 흐름을 이었다.
2. 민중운동의 활성화
(1) 학생운동
4월 혁명의 주역이었던 학생운동은 이승만이 물러나면서 질서유지와 사태수습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것은 학생들이 확고한 정부타도와 새로운 체제의 수립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4.19는 3.15 부정선거 규탄에서 촉발된 자연 발생적인 시위가 혁명으로 발전해 간 것이었기 때문에, 4월 혁명을 이끈 학생운동 역시 이념적으로나 조직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4월 혁명 당시의 학생들의 구호나 요구를 보면 그런 문제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부정선거의 무효’와 ‘발포책임자의 처벌’같은 3.15부정선거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고, 이승만 정권의 타도나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들, 대중의 요구들은 제기되지 않았다.
허정 과도정부가 들어서자 학생들은 이후 공명선거 운동, 신생활 운동 등의 계몽활동을 통해 사회적인 차원으로 관심을 확대해 나갔으며 마침내는 통일문제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학생들의 관심과 영역이 확대되는 것은 4월 혁명의 발전과 완결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제 2공화국 시기의 학생운동은 이념이나 조직면에서 많은 한계와 문제를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신생활 운동과 같은 계몽운동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생겨난 정신적,문화적 타락을 개개인의 자각이나 주인의식의 함양으로 해결하려 함으로써 ‘낭만적 개량주의적 한계’를 안고 있었던 반면, 통일 운동은 국민대중의 의식상태나 분단체제가 안고 있는 복잡한 이해관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매우 급진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신생활 운동의 경우 대외의존을 배격하기 위한 국산품 사용운동, 부패관리에 대한 정화운동, 독점재벌에 대한 경제적 민주화 운동등을 통하여 국민대중의 호응을 받음으로써 학생과 국민대중의 연대감을 높이고 4월 혁명의 정신을 올바르게 자리잡는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을 점도 있다. 당연히 통일문제 또한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60년 11월 18일 ‘서울대 민족 통일 학생 연맹’의 결성을 계기로 학생들의 통일운동의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1961년 5월 3일 남북 학생 회담을 제기함으로써 기존의 틀을 뛰어 넘으려고 하였다. 또한 5월 5일에는 ‘민족통일 전국학생 연맹’ 결성 준비대회를 개최하고 전국적인 통일운동 조직체의 건설을 추진하여 본격적인 통일운동에 나섰다. 학생들은 이날 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동하고 남북학생회담을 지지하였으며, 당시의 한국사회를 ‘식민지적반식민지적 봉건사회’로 규정하고 대립구조를 ‘매판관료세력과 민족대중간의 모순’이라고 보았다. 학생들은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를 들고 학생회담을 추진하였지만, 5.16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학생들의 통일운동은 당시의 국민대중이 따라가기에는 다소 급진적인 면이 있었지만, 금기시되던 통일문제를 대중적으로 제기함으로써 냉전 이데올로기를 깨뜨리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그리고 통일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의식적 학생 운동가를 배출함으로써 그후 박정희 집권 시기 63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족민주 운동의 흐름을 형성하였다는 점 또한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을 것이다.
(2) 통일 운동의 고양
통일문제가 본격적인 사회 이슈로 등장한 것은 7.29 총선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혁신정당들은 민주당의 ‘선건설 후통일론’을 비판하고 그와 다른 견해를 제기함으로써 통일문제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높였다. 이를 테면 사회대중당은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를 내세우면서도 남북간의 문화교류, 경제교류, 인사교류를 주장함으로써 통일문제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1960년 학반기에 접어들면서 통일운동은 중립화 통일방안 등 통일 방안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거론되었고, 학생과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통일 운동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통일논의를 확산시키는데는 김용중의 중립화 통일론, 외세의 영향없는 한국민의 자발적인 통일 가능성을 언급한 미 하원 외교위원장 풀브라이트의 발언, 그리고 한국의 오스트리아식 중립화 통일방안을 언급한 미 상원의원 맨스필드의 발언 등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당시 미국에서 한국 문제 연구소장으로 있던 김용중은 중립국 통일방안의 확산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한편 혁신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9월 30일 ‘민족 자주 통일 협의회’가 결성되었고, 11월 18일에는 서울대에서 민족 통일 학생연맹을 결성하였다. 1961년이 되자 통일운동은 이러한 조직기반을 이용하여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과 2대 악법 투쟁등의 대중적인 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과정에서 일부세력은 민족 자주 통일 협의회를 이탈하여 ‘중립화 조국 통일 총연맹’을 결성하였고, 투쟁의 선봉에 각 대학의 민족통일학생연맹이 나서게 된다. 1961년 2월 25일에는 그 동안의 성과를 모아 ‘민족 자주 통일 중앙 협의회’가 발족하여 자주평화민주의 3원칙 아래 남북 정치협상을 통한 남북통일을 주장하였다. 5월 3일에는 학생들이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고, 5일에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 준비위를 조직하였으며, 남북 학생회담을 위한 실무준비에 들어갔다. 5월 13일 민족자주 통일 협의회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남북 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 촉진 궐기대회’에는 3만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가하여 통일운동의 열기를 한껏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틀뒤인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모든 것은 끝났다.
통일운동은 다소 급진적 요소를 안고 있었으나 그것이 한국사회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문제를 주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면정권은 무능과 보수주의로 인해 학생과 혁신세력의 통일운동을 끌어 안을 수도, 그렇다고 힘으로 통제할 수도 없었고, 군부세력의 계속되던 쿠데타의 위협과 소문이 사실로 나타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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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4.28
  • 저작시기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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