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민중가요의 변천과정
1. 182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2. 1970년대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3.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Ⅲ. 민중가요의 발전
Ⅳ. 민중가요의 문화성립
1. 낭만적 학생운동기의 종말과 새로운 출발
2. 데모노래와 복음성가류
3. 김민기에 대한 재해석과 그의 변화
4. 김영동과 다른 노래들
5. 민중가요의 다양함과 그 미덕
Ⅴ. 민중가요와 광주민주화항쟁
Ⅵ. 민중가요와 열린음악회
Ⅶ. 민중가요의 대중성상실
참고문헌
Ⅱ. 민중가요의 변천과정
1. 182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2. 1970년대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3.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Ⅲ. 민중가요의 발전
Ⅳ. 민중가요의 문화성립
1. 낭만적 학생운동기의 종말과 새로운 출발
2. 데모노래와 복음성가류
3. 김민기에 대한 재해석과 그의 변화
4. 김영동과 다른 노래들
5. 민중가요의 다양함과 그 미덕
Ⅴ. 민중가요와 광주민주화항쟁
Ⅵ. 민중가요와 열린음악회
Ⅶ. 민중가요의 대중성상실
참고문헌
본문내용
고래사냥’,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내 나라 내 겨레’ 등이 그들인데, 이 곡들은 양희은, 송창식 등에 의해 불려지던 당시의 반문화적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노래들로 70·80년대를 거쳐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청년의식을 대변해주었다. 이밖에 이 프로그램에서 자주 들려지는 ‘선구자’나 ‘우리의 소원’ 등도 거리 시위에 나선 학생, 노동자들과 일반시민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들로 많이 불렸던 곡들이다. 특히 이 노래들은 프로그램의 맨 마지막에 전체 출연가수들과 관객들의 합창으로 주로 불려짐으로써 <열린음악회> 프로그램 전체를 밝고 건강한 분위기의 집단적 유대의 공간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민중가요들은 70년대 포크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앞에서 거론한 민중가수들에 의해 주로 불려지지만, 가끔 일반 대중가수들에 의해 불려지는 경우도 있다. 길은정과 최성수(44회)가 함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부른 것과 이선희(광복 50주년 특집, 95.8.13)가 ‘광야에서’를 부른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이선희의 경우는 90년대 들어서서 민중문화진영으로 조심스럽게 한발을 내디뎠는데, 그가 89년에 발표한 ‘한바탕 웃음으로’와 ‘그리운 나라’는 당시 민주화를 열망하면서 죽어간 젊은이들을 애도하고 좋은 세상을 그리는 노래들로 그의 정치적 행보와 함께 그의 노래활동에 있어서의 변신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열린음악회>에서 이선희가 이러한 자신의 노래들과 ‘아름다운 강산’, 그리고 ‘내 나라 내 겨레’, ‘아침이슬’, ‘광야에서’ 등의 민중가요들을 자주 부르는 것이 그의 그러한 변모를 잘 드러내준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민중가수들이 <열린음악회>에 출연하여 일반 대중가요를 부르기도 한다. 권진원은 주로 ‘장미빛 인생’, ‘고엽’ 등의 샹송을 많이 불러서 마치 샹송가수인 것처럼 보이며, 그 외에도 자신의 노래 ‘살다보면’을 비롯하여 ‘사랑하기 때문에’, ‘세계로 가는 기차’ 등의 대중가요를 주로 부른다. 안치환은 80년대 초의 대학가요제 출품곡 ‘구름과 나’(연대, 95.5.14)와 조용필의 ‘단발머리’(41회)를 불렀으며, 윤선애는 ‘아름다운 것들’, ‘뭉게구름’(41회) 등의 포크를 부르기도 했다. 노찾사 역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사계’, ‘일요일이 다가는 소리’ 등 외에 ‘행복의 나라로’(고대공연, 95.5.7)와 ‘개똥벌레’를 부르기도 했다. 신형원 또한 자신의 노래 외에 ‘돌아와요 부산항에’(69회), TV드라마 주제곡인 ‘마지막 승부’(송년특집, 95.12.31), 그리고 이문세의 ‘붉은 노을’(성대, 95.12.10) 등을 불렀다.
이렇게 공영방송문화와 민중문화가 상호침투하는 현상은 <열린음악회> 이외에 MBC <미 기픈 믈>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 기픈 믈>의 경우에는 노찾사 뿐만 아니라 노래패 꽃다지와 또 다른 진보적인 노래운동 집단인 노래마을이나 민요연구회, 그리고 대학가의 노래패들이 자주 등장하며, 대학가를 통해 재발굴되고 재해석된 우리의 민요들과 민중가요들을 적극적으로 내보내고 사회자들의 멘트에 의해 그 노래들의 의미를 음미해보는 기회까지 부여해준다. 또한 통일과 관련된 노래들의 선곡으로 조국 통일을 염원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4.19 정신을 기리는 특집공연을 열기도 하였다.
Ⅶ. 민중가요의 대중성상실
91년 이후, 민중가요의 양상은 91년 당시 강경대 열사의 열사정국과 더불어 투쟁가의 양식이 그 모습을 자주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 노래풍이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이는 당시의 시대상황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92년에 들어서서 문민정부에 대한 막연한 희망은 당시 군사정권과 민주화 세력이라는 명백한 대치구조를 와해시키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사실, 당시 매년 불법으로 열리던 한총련 출범식을 당국은 쉽게 허가를 내주는 등, 강력한 투쟁 일변도로 달려왔던 민중가요의 진영을 굉장히 혼란스럽게 하는 중요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당시 안정된 정국에서 운동진영이 눈을 일단 돌릴 수 있는 곳은 학생운동 진영 중 민족주의 노선 진영은 \'조국 연방제 통일\'에, 좌파를 비롯한 노동자 진영은 노동자끼리의 결속력을 다지는 노래를 만드는 수밖에 없게 하였다. 물론 그러한 상황이었지만, 그러한 정황 속에서 새로운 민중가요의 전형이 탄생한다. 그것이 바로 흥겨운 \'댄스\' 음악이다. 예를 들기 전에 더 그 당시의 노래진영을 살펴보자. 92년에는 현재까지도 우리 나라 민중가요계를 이끌어 가는 두 전문 노래패를 탄생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삶의 노래 예울림\'과 \'노동자 노래단\'이 병합되어 만들어진 이 시대 민중가요의 슈퍼스타, \'꽃다지\'와 현재 학생운동 진영에서 불리는 모든 노래들을 창작, 보급하게 된(물론 원칙적인 기조가 그것만은 아니다) 서총련 노래단 \'조국과 청춘\'이다. 이 두 거목은 현재까지도 민중가요 진영에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여간 이 두 노래패가 생기면서 새로이 나타난 정형은 위에 언급한 것처럼 댄스 음악을 선보이는데, 예를 들면 꽃다지는「바위처럼」, 조국과 청춘은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같은 경쾌한 댄스곡을 선보였다. 그 당시를 노래평론가인 이영미씨는 회고하기를 \'너무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져 오히려 그들이 욕을 먹는 정도였다\'고 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연예는 혁명의 적\'이었으니, 최루탄 연기를 날려버린 그대 모습에 반해버린 것이 불경스러울 수밖에 그리고 이 당시에는 자신의 신념을 서정적으로 더욱 굳건히 하려는 곡들이 매우 많이 쏟아져 나온다. 꽃다지의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창살 아래 사랑아」,「내일이 오면」, 「전화 카드 한 장」 등이 있고, 조국과 청춘에서는 「사랑」, 「고목」,「약속」, 「빨치산의 밤」, 「벗에게」 등등이 상당수 나온다. 이러한 분위기는 95년까지 계속 이어지는데, 도중에 여러 노래패에서 공식음반도 나오고, 노동가요 합법음반도 민예총에서 출시되고는 했지만, 노래의 새로운 전형이 나타나질 않아 갈수록 여러 가지 상황과 맞물려서 노래운동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걷는 것 같아 보였다. 심지어, 경쾌한 곡을 추구하되, 상업적인 댄스풍을
이러한 민중가요들은 70년대 포크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앞에서 거론한 민중가수들에 의해 주로 불려지지만, 가끔 일반 대중가수들에 의해 불려지는 경우도 있다. 길은정과 최성수(44회)가 함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부른 것과 이선희(광복 50주년 특집, 95.8.13)가 ‘광야에서’를 부른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이선희의 경우는 90년대 들어서서 민중문화진영으로 조심스럽게 한발을 내디뎠는데, 그가 89년에 발표한 ‘한바탕 웃음으로’와 ‘그리운 나라’는 당시 민주화를 열망하면서 죽어간 젊은이들을 애도하고 좋은 세상을 그리는 노래들로 그의 정치적 행보와 함께 그의 노래활동에 있어서의 변신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열린음악회>에서 이선희가 이러한 자신의 노래들과 ‘아름다운 강산’, 그리고 ‘내 나라 내 겨레’, ‘아침이슬’, ‘광야에서’ 등의 민중가요들을 자주 부르는 것이 그의 그러한 변모를 잘 드러내준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민중가수들이 <열린음악회>에 출연하여 일반 대중가요를 부르기도 한다. 권진원은 주로 ‘장미빛 인생’, ‘고엽’ 등의 샹송을 많이 불러서 마치 샹송가수인 것처럼 보이며, 그 외에도 자신의 노래 ‘살다보면’을 비롯하여 ‘사랑하기 때문에’, ‘세계로 가는 기차’ 등의 대중가요를 주로 부른다. 안치환은 80년대 초의 대학가요제 출품곡 ‘구름과 나’(연대, 95.5.14)와 조용필의 ‘단발머리’(41회)를 불렀으며, 윤선애는 ‘아름다운 것들’, ‘뭉게구름’(41회) 등의 포크를 부르기도 했다. 노찾사 역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사계’, ‘일요일이 다가는 소리’ 등 외에 ‘행복의 나라로’(고대공연, 95.5.7)와 ‘개똥벌레’를 부르기도 했다. 신형원 또한 자신의 노래 외에 ‘돌아와요 부산항에’(69회), TV드라마 주제곡인 ‘마지막 승부’(송년특집, 95.12.31), 그리고 이문세의 ‘붉은 노을’(성대, 95.12.10) 등을 불렀다.
이렇게 공영방송문화와 민중문화가 상호침투하는 현상은 <열린음악회> 이외에 MBC <미 기픈 믈>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 기픈 믈>의 경우에는 노찾사 뿐만 아니라 노래패 꽃다지와 또 다른 진보적인 노래운동 집단인 노래마을이나 민요연구회, 그리고 대학가의 노래패들이 자주 등장하며, 대학가를 통해 재발굴되고 재해석된 우리의 민요들과 민중가요들을 적극적으로 내보내고 사회자들의 멘트에 의해 그 노래들의 의미를 음미해보는 기회까지 부여해준다. 또한 통일과 관련된 노래들의 선곡으로 조국 통일을 염원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4.19 정신을 기리는 특집공연을 열기도 하였다.
Ⅶ. 민중가요의 대중성상실
91년 이후, 민중가요의 양상은 91년 당시 강경대 열사의 열사정국과 더불어 투쟁가의 양식이 그 모습을 자주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 노래풍이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이는 당시의 시대상황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92년에 들어서서 문민정부에 대한 막연한 희망은 당시 군사정권과 민주화 세력이라는 명백한 대치구조를 와해시키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사실, 당시 매년 불법으로 열리던 한총련 출범식을 당국은 쉽게 허가를 내주는 등, 강력한 투쟁 일변도로 달려왔던 민중가요의 진영을 굉장히 혼란스럽게 하는 중요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당시 안정된 정국에서 운동진영이 눈을 일단 돌릴 수 있는 곳은 학생운동 진영 중 민족주의 노선 진영은 \'조국 연방제 통일\'에, 좌파를 비롯한 노동자 진영은 노동자끼리의 결속력을 다지는 노래를 만드는 수밖에 없게 하였다. 물론 그러한 상황이었지만, 그러한 정황 속에서 새로운 민중가요의 전형이 탄생한다. 그것이 바로 흥겨운 \'댄스\' 음악이다. 예를 들기 전에 더 그 당시의 노래진영을 살펴보자. 92년에는 현재까지도 우리 나라 민중가요계를 이끌어 가는 두 전문 노래패를 탄생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삶의 노래 예울림\'과 \'노동자 노래단\'이 병합되어 만들어진 이 시대 민중가요의 슈퍼스타, \'꽃다지\'와 현재 학생운동 진영에서 불리는 모든 노래들을 창작, 보급하게 된(물론 원칙적인 기조가 그것만은 아니다) 서총련 노래단 \'조국과 청춘\'이다. 이 두 거목은 현재까지도 민중가요 진영에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여간 이 두 노래패가 생기면서 새로이 나타난 정형은 위에 언급한 것처럼 댄스 음악을 선보이는데, 예를 들면 꽃다지는「바위처럼」, 조국과 청춘은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같은 경쾌한 댄스곡을 선보였다. 그 당시를 노래평론가인 이영미씨는 회고하기를 \'너무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져 오히려 그들이 욕을 먹는 정도였다\'고 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연예는 혁명의 적\'이었으니, 최루탄 연기를 날려버린 그대 모습에 반해버린 것이 불경스러울 수밖에 그리고 이 당시에는 자신의 신념을 서정적으로 더욱 굳건히 하려는 곡들이 매우 많이 쏟아져 나온다. 꽃다지의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창살 아래 사랑아」,「내일이 오면」, 「전화 카드 한 장」 등이 있고, 조국과 청춘에서는 「사랑」, 「고목」,「약속」, 「빨치산의 밤」, 「벗에게」 등등이 상당수 나온다. 이러한 분위기는 95년까지 계속 이어지는데, 도중에 여러 노래패에서 공식음반도 나오고, 노동가요 합법음반도 민예총에서 출시되고는 했지만, 노래의 새로운 전형이 나타나질 않아 갈수록 여러 가지 상황과 맞물려서 노래운동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걷는 것 같아 보였다. 심지어, 경쾌한 곡을 추구하되, 상업적인 댄스풍을
추천자료
한국의 민주화 이행의 특징에 관하여
미얀마의 민주화 이행과정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읽고
박정희와 민주화 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학생 충돌 사건 고찰과 광주학생독립운동(학생의 날)의 역사적 배경, 광주...
광주사역사
역사학 입문 - 80년대 후반 역사가단체들의 탄생과 민중사
[문학과 사회] 민중 시인 김남주의 눈물과 꿈
80년대 한국의 민중시
[1980년대]1980년대의 의식, 1980년대의 민중운동, 1980년대의 시위운동, 1980년대의 사회운...
[대학민주화, 대학민주화 필요성, 대학민주화 발전과정, 대학민주화 문제점, 대학민주화 당면...
[민주화운동][민주화][과거청산법][민본사상]민주화운동의 역사, 민주화운동의 이념, 민주화...
518 광주시립미술관 관람 감상문
[한국민족운동사] 광주학생운동(항일학생운동의 배경과 원인, 1920년 중반 본격적 반일 맹휴...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