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총론 : 민족 문학의 개념과 그 사적 전개
1. 민족 문학의 개념과 민족 문학사의 인식
2. 문학사의 체계 : 국문학과 한문학의 이원구조와 통일적 인식의 과제
3. 신문학의 전개과정에서의 민족문학
구전서사시의 전승과 민족신화의 형성
1. 구전서사시의 전승과 신화의 기록
2. 고대국가의 건국신화들
3. 건국신화의 재인식과 민족신화의 가능성
고대가요의 전통과 향가
1. 고대가요와 삼국속악 그리고 향가
2. 향가의 명칭과 내포
3. 향가의 형식과 구조
4. 향가의 주요 담당층
5. 향가의 내용과 작품세계
6. 연구사적 반성
삼국시대에서 남북국시대까지의 한문학
1. 한자의 수용과 활용, 그리고 중세문학의 형성
2. 삼국시대의 한문학
3. 남북국시대의 한문학
동아시아 서사문학의 지평과 나말여초 서사문학
1. 나말여초 문학사의 새 지평
2. 동아시아 서사문학의 교류와 『수이전』
3. 『수이전』에 실린 지괴의 서사적 지향
4. 『수이전』에 실린 「최치원」의 문학적 성취
5. 나말여초 서사문학의 층위와 과제
나말여초의 문학사적 전환과 최치원
1. 전환기로서의 ‘나말여초’
2. 나말여초 문인지식층의 성향과 한문학
3. 최치원 시문학의 세계
4. 최치원의 문학사적 위치
Ⅲ. 참고문헌
Ⅱ. 본론
총론 : 민족 문학의 개념과 그 사적 전개
1. 민족 문학의 개념과 민족 문학사의 인식
2. 문학사의 체계 : 국문학과 한문학의 이원구조와 통일적 인식의 과제
3. 신문학의 전개과정에서의 민족문학
구전서사시의 전승과 민족신화의 형성
1. 구전서사시의 전승과 신화의 기록
2. 고대국가의 건국신화들
3. 건국신화의 재인식과 민족신화의 가능성
고대가요의 전통과 향가
1. 고대가요와 삼국속악 그리고 향가
2. 향가의 명칭과 내포
3. 향가의 형식과 구조
4. 향가의 주요 담당층
5. 향가의 내용과 작품세계
6. 연구사적 반성
삼국시대에서 남북국시대까지의 한문학
1. 한자의 수용과 활용, 그리고 중세문학의 형성
2. 삼국시대의 한문학
3. 남북국시대의 한문학
동아시아 서사문학의 지평과 나말여초 서사문학
1. 나말여초 문학사의 새 지평
2. 동아시아 서사문학의 교류와 『수이전』
3. 『수이전』에 실린 지괴의 서사적 지향
4. 『수이전』에 실린 「최치원」의 문학적 성취
5. 나말여초 서사문학의 층위와 과제
나말여초의 문학사적 전환과 최치원
1. 전환기로서의 ‘나말여초’
2. 나말여초 문인지식층의 성향과 한문학
3. 최치원 시문학의 세계
4. 최치원의 문학사적 위치
Ⅲ. 참고문헌
본문내용
문학사적 전환의 면모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방면의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문학과 관련해서는 무엇보다 이 시기의 창작 주체였던 문인지식층에 주목해야 한다. 육두품 출신 문인들이 바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층이었다. 신라사회에서 육두품은 그 지위가 성골이나 진골보다 하위계층이다. 신라 하대로 가면서 귀족세력간의 왕위쟁탈전이 격화되고, 중앙과 지방의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면서 육두품은 정치적으로 위축, 소외되어 정치적 ‘타자’가 되기에 이른다. 그렇다보니 불교나 학문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마련하려 했다. 하지만 기득권을 지닌 진골세력은 이러한 육두품의 진출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이런 육두품의 한계와 갈등은 한편으로는 그들의 문학적 성장의 주요한 토양이 되었다. 사회현실의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내면서 문화적 역량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요 글쓰기 수단은 한문학이었고, 주로 신라 골품제의 모순과 사회현실을 비판하거나, 아예 현실을 등지고 은둔하는 형태를 드러냈다. 이러한 경향은 후삼국시대가 펼쳐지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최승우(崔承祐), 최언위 등은 신진세력에 적극 가담하였다. 『호본집』을 남긴 최승우는 후백제의 견훤을 따랐으나 견훤의 몰락으로 실패하였고, 최언위는 왕건을 따라 고려 건국에 일등공신이 되었다. 반면 최치원(崔致遠), 최광유(崔匡裕) 등은 새로운 세력에 참여하지 않고 방외적인 삶을 살다가 종적을 감추었다. 그밖의 인물로 박인범(朴仁範)의 경우 관직은 지냈고, 선종에 깊은 호감을 보이는 개혁적 성향을 띠는 것으로 판단되지만 그가 정확히 무엇을 지향했는지 알 수는 없다.
이처럼 나말여초 문인지식층은 모두 같은 길을 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새롭게 정립되고 있던 한문학으로 전환기를 대표한 작가들이었다. 특히 최치원은 다른 문인들과 달리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방황했는데, 그의 문학 역시 이런 자신의 처지를 반영하여 다른 문인·문학과 변별되는 독창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3. 최치원 시문학의 세계
최치원의 생애를 일반적으로 재당기(在唐期), 환국사환기(還國仕宦期), 탈속기(脫俗期)로 구분한다. 재당기에는 현재 남아있는 최치원의 한시 대부분과 본격적인 산문이 지어진 시기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문집인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과 황소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일등공신이 되게 했던 「격황소서」도 이때 나왔다. 최치원의 산문은 표(表)·장(狀)·격(檄)·제문(祭文)·기(記)·잡록(雜錄) 등 다양한데, 주로 대필 성격의 공용문이었다. 대필은 다분히 형식적인 경향이 강해 후대에는 화려한 수식 위주의 사장(詞章)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한편, 「강남의 여인(江南女)」, 「들을 태우다」, 「접시꽃」, 「진달래」 등의 한시는 산문과 전혀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 사회현실을 직시하는 최치원의 안목과 외로움의 향수가 느껴지는 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나이 28세에 최치원은 이국에서의 한계를 실감하고 귀국하였으나 고국에서도 뜻을 펼 수는 없었다. 왕명에 의해 「사산비명(四山碑銘)」,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비명(智異山雙溪寺眞鑑禪師碑銘)」등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했지만 몇몇 시편을 통해 여전히 고민과 한계를 느끼는 최치원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옛뜻」의 경우 참과 거짓이 뒤섞여버린 현실을 풍자하면서, 당대 현실과 영리를 좇는 존재들에 대한 깊은 혐오감이 들어있다. 「가을밤 비 내리고」의 경우 ‘인생길에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말로 자신의 불우를 드러내기도 했다.
최치원은 42세부터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을 돌아다니다 종적을 감춘다. 바로 「가야산 독서당에서 쓰다(題伽倻山讀書堂)」는 이 만리 밖으로 떠나온 자신에 대한 시적 표현으로, 인간세상의 온갖 시비를 흐르는 물로 막아버렸던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은거 시기에도 「석순응전(釋順應傳)」, 「석이정전(釋利貞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등의 승려의 전(傳)과 「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 「지증대사적조탑비명(智證大師寂照塔碑銘)」 등의 산문을 지었다고 한다. 한편,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는 최치원이 방랑길에서 가면놀이를 보고 지은 지로 보이는데, 속세를 떠나서 민중의 모습을 발견한 유일한 예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최치원의 생애와 관련하여 시문을 살펴보면, 당대 현실 속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나말여초의 위대한 문인의 면모를 실감하게 된다.
4. 최치원의 문학사적 위치
최치원은 나말여초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당나라가 빈공과를 마련하여 외국인을 자국 과거에 참여시킨 이래 최치원만큼 실력을 인정받는 인물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보여준 이후의 행력은 기대에 미치지 못할뿐더러 다소 의아하기까지 하다. 후삼국의 쟁패가 벌어진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특별히 글이나 문학으로 보여주지 않았고, 속세를 떠나 방외적인 삶을 살다 종적을 감추었다.
그렇다면 후인들은 그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사실 최치원만큼 후대의 평가를 많이 받아온 문인도 없다. 또한 설화나 소설의 주인공으로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특히 그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린다. 한편,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설화에서 최치원은 거의 무조건적인 추앙의 대상으로 나오고, 16, 17세기에 나온 도가서(道家書)에서는 우리나라에 도맥(道脈)을 전수한 핵심인물로 등장한다.
이런 최치원에 대한 열띤 관심은 당연히 빼어난 문학적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 불우한 삶이 덧붙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불우의 미학’을 본격적인 문학의 장으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최치원의 문학사적 위치는 확고하다. 그렇지만 그의 문학의 불우성은 개인적인 영역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사회와 소통하지 못하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이로써 우리 문학사는 최치원의 문학을 통해서 새로운 가능성과 과제를 함께 떠안고 출발하게 되었다.
Ⅲ. 참고문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김흥규, 『한국문학의 이해』, 민음사, 1998.
민족 문학사연구소 엮음, 『새민족 문학사 강좌 01』, 창작과 비평사, 2009.
그런데 이런 육두품의 한계와 갈등은 한편으로는 그들의 문학적 성장의 주요한 토양이 되었다. 사회현실의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내면서 문화적 역량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요 글쓰기 수단은 한문학이었고, 주로 신라 골품제의 모순과 사회현실을 비판하거나, 아예 현실을 등지고 은둔하는 형태를 드러냈다. 이러한 경향은 후삼국시대가 펼쳐지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최승우(崔承祐), 최언위 등은 신진세력에 적극 가담하였다. 『호본집』을 남긴 최승우는 후백제의 견훤을 따랐으나 견훤의 몰락으로 실패하였고, 최언위는 왕건을 따라 고려 건국에 일등공신이 되었다. 반면 최치원(崔致遠), 최광유(崔匡裕) 등은 새로운 세력에 참여하지 않고 방외적인 삶을 살다가 종적을 감추었다. 그밖의 인물로 박인범(朴仁範)의 경우 관직은 지냈고, 선종에 깊은 호감을 보이는 개혁적 성향을 띠는 것으로 판단되지만 그가 정확히 무엇을 지향했는지 알 수는 없다.
이처럼 나말여초 문인지식층은 모두 같은 길을 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새롭게 정립되고 있던 한문학으로 전환기를 대표한 작가들이었다. 특히 최치원은 다른 문인들과 달리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방황했는데, 그의 문학 역시 이런 자신의 처지를 반영하여 다른 문인·문학과 변별되는 독창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3. 최치원 시문학의 세계
최치원의 생애를 일반적으로 재당기(在唐期), 환국사환기(還國仕宦期), 탈속기(脫俗期)로 구분한다. 재당기에는 현재 남아있는 최치원의 한시 대부분과 본격적인 산문이 지어진 시기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문집인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과 황소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일등공신이 되게 했던 「격황소서」도 이때 나왔다. 최치원의 산문은 표(表)·장(狀)·격(檄)·제문(祭文)·기(記)·잡록(雜錄) 등 다양한데, 주로 대필 성격의 공용문이었다. 대필은 다분히 형식적인 경향이 강해 후대에는 화려한 수식 위주의 사장(詞章)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한편, 「강남의 여인(江南女)」, 「들을 태우다」, 「접시꽃」, 「진달래」 등의 한시는 산문과 전혀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 사회현실을 직시하는 최치원의 안목과 외로움의 향수가 느껴지는 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나이 28세에 최치원은 이국에서의 한계를 실감하고 귀국하였으나 고국에서도 뜻을 펼 수는 없었다. 왕명에 의해 「사산비명(四山碑銘)」,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비명(智異山雙溪寺眞鑑禪師碑銘)」등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했지만 몇몇 시편을 통해 여전히 고민과 한계를 느끼는 최치원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옛뜻」의 경우 참과 거짓이 뒤섞여버린 현실을 풍자하면서, 당대 현실과 영리를 좇는 존재들에 대한 깊은 혐오감이 들어있다. 「가을밤 비 내리고」의 경우 ‘인생길에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말로 자신의 불우를 드러내기도 했다.
최치원은 42세부터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을 돌아다니다 종적을 감춘다. 바로 「가야산 독서당에서 쓰다(題伽倻山讀書堂)」는 이 만리 밖으로 떠나온 자신에 대한 시적 표현으로, 인간세상의 온갖 시비를 흐르는 물로 막아버렸던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은거 시기에도 「석순응전(釋順應傳)」, 「석이정전(釋利貞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등의 승려의 전(傳)과 「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 「지증대사적조탑비명(智證大師寂照塔碑銘)」 등의 산문을 지었다고 한다. 한편,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는 최치원이 방랑길에서 가면놀이를 보고 지은 지로 보이는데, 속세를 떠나서 민중의 모습을 발견한 유일한 예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최치원의 생애와 관련하여 시문을 살펴보면, 당대 현실 속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나말여초의 위대한 문인의 면모를 실감하게 된다.
4. 최치원의 문학사적 위치
최치원은 나말여초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당나라가 빈공과를 마련하여 외국인을 자국 과거에 참여시킨 이래 최치원만큼 실력을 인정받는 인물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보여준 이후의 행력은 기대에 미치지 못할뿐더러 다소 의아하기까지 하다. 후삼국의 쟁패가 벌어진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특별히 글이나 문학으로 보여주지 않았고, 속세를 떠나 방외적인 삶을 살다 종적을 감추었다.
그렇다면 후인들은 그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사실 최치원만큼 후대의 평가를 많이 받아온 문인도 없다. 또한 설화나 소설의 주인공으로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특히 그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린다. 한편,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설화에서 최치원은 거의 무조건적인 추앙의 대상으로 나오고, 16, 17세기에 나온 도가서(道家書)에서는 우리나라에 도맥(道脈)을 전수한 핵심인물로 등장한다.
이런 최치원에 대한 열띤 관심은 당연히 빼어난 문학적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 불우한 삶이 덧붙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불우의 미학’을 본격적인 문학의 장으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최치원의 문학사적 위치는 확고하다. 그렇지만 그의 문학의 불우성은 개인적인 영역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사회와 소통하지 못하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이로써 우리 문학사는 최치원의 문학을 통해서 새로운 가능성과 과제를 함께 떠안고 출발하게 되었다.
Ⅲ. 참고문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김흥규, 『한국문학의 이해』, 민음사, 1998.
민족 문학사연구소 엮음, 『새민족 문학사 강좌 01』, 창작과 비평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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