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서 론
㉯ 조선후기의 사회변화
1. 사상의 발전과 변화(실학)
2. 신분제의 변화
3. 노비제도의 변화
4. 종교유입과 농민층 의식 변화
5. 민간 풍습과 상속제도의 변화
6. 서민예술의 발전
㉰ 조선후기의 경제발전
1. 농업기술의 발달
2. 상공업의 변화와 발전
3. 도시상업의 발달과 형태
㉱ 결 론
㉯ 조선후기의 사회변화
1. 사상의 발전과 변화(실학)
2. 신분제의 변화
3. 노비제도의 변화
4. 종교유입과 농민층 의식 변화
5. 민간 풍습과 상속제도의 변화
6. 서민예술의 발전
㉰ 조선후기의 경제발전
1. 농업기술의 발달
2. 상공업의 변화와 발전
3. 도시상업의 발달과 형태
㉱ 결 론
본문내용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재산을 증식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주인집에 신분적으로만 예속되어 있을 뿐 경제적으로는 주인집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경제활동을 하였다.
노비제가 완화될 수 있던 가장 큰 배경은 중인과 서얼 등의 신분해방운동 때문이다. 종래 양반지배층만이 관직을 영위 할 수 있었던 것에 중인계층이 조금씩 진출하게 되자 노비들의 신분해방도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배경이 마련되었다. 결국 조선정부는 공노비를 1801년에, 사노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법적으로 폐지시켰다.
노비를 해방시킨 이유는 조세를 더 걷기 위해서 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노비제가 폐지되면서 근대화 되는 것을 촉진 시켰다고 할 수 있겠고 국고를 증가시키는 것에도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적절한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4.종교유입과 농민층 의식 변화
천주교는 17세기에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한 우리나라 사신들에 의하여 서학으로 소개되었다.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후반 경이었다. 당시 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심하던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서양인 신부에게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후로 신앙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정부는 천주교가 유포되는 것에 대하여 내버려 두면 저절로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자 드디어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국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사교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정조 때에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하였던 시파가 정권을 잡았으므로 큰 탄압이 없었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직후 노론 강경파인 벽파가 집권하면서 대탄압이 가해졌다(1801). 이 사건으로 천주교 전래에 앞장을 섰던 실학자 및 많은 수의 양반 계층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천주교는 안동 김 씨의 세도 정치기에 탄압이 완화되며 백성들에게 활발히 전파되었다.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서양인 신부들이 몰래 들어와 포교하면서 교세가 점차 확장되었다.
동학은 1860년에 경주 출신인 최제우가 창도하였다. 동학에는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사회가 처한 여러 사회 상황이 반영되었다. 교리는 유불선의 주요 내용이 바탕이 되었고, 주문과 부적 등 민간 신앙이 요소들이 결합되었다. 또 사회 모순을 극복하고, 일본과 서양 국가의 침략을 막아 내자는 주장을 폈다.
동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시천주와 인내천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지 않고, 노비 제도를 없애며, 여성과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회를 추구하였다. 조선의 지배층은 신분 질서를 부정하는 동학을 위험시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는 죄로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그 뒤를 이은 최시형은 교세를 확대하면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펴내어 교리를 정리하는 한편 의식과 제도를 정착시켜 교단 조직을 정비하였다. 다시 교세가 커진 동학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는 물론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로 퍼져 나갔다.
사회 불안이 점차 고조되자 이제까지 명목상이나마 유지되던 유교적 왕도 정치는 점점 퇴색되어 갔다. 19세기의 세도 정치 하에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탐관오리의 부정과 탐학은 끝이 없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극도에 달한 수령의 부정은 중앙 권력과도 연계되어 있어 이미 암행어사의 파견으로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농촌 사화가 피폐하여 가는 가운데 농민들의 사회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해져 갔다. 가난과 세금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농민들은 농토를 버리고 이리저리 떠도는 유민이 되거나 세금을 피하여 산간벽지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기도 하고 도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 농민들은 지배층의 압제에 대하여 종래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과 대결하였다.
처음에는 소청이나 벽서, 괘서 등의 형태로 나타나던 농민들의 항거는 점차 농민 봉기로 변화되어 갔다.
농민들의 항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1811)과 진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임술 농민 봉기였다(1862)
새로운 종교 천주교의 유입으로 농민들이나 그 보다 밑에 계급의 사람들은 평등이라는 사고를 많이 가지게 된 것 같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자신의 권리나 자유를 주장하기 시작 했고 자신들 사는 농촌사회가 피폐해 지는 것에 대해서 자신들의 해결해보려는 노력을 시작하게 된 거 같다. 과거의 신분의 차이를 인정하고 살 때는 보이지 않았던 모순이 사상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면서 농민들이 불만을 토로해 내면서 많은 농민들의 난이 일어나게 된 거 같다.
5.조선시대 풍속과 상속제도
* 사촌이내 친척들과의 결혼은 혀용 되지 않으며, 당사자가 청혼하는 법은 없고 8, 10, 12세 혹은 그 이상의 나이에 달하면 부모나 친척들끼리 서로 혼약을 맺는다. 즉, 연애결혼은 없으며, 중매결혼만이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결혼할 때 대부분 중매의 형식으로 갖추기는 하지만, 개중에는 연애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음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 대체로 여자 쪽의 부모가 아들이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남자 집에 가서 살게 된다. 당사자들이 자립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가지 시집살이를 한다.
*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갈 때, 말을 타고 가며, 친척이나 친구들을 동반하고 와서 먼저 마을을 한 바퀴 돌도록 되어 있다. 신부가 신랑 집에 갈 때도 신부의 친지들이 따라가기는 하지만, 다른 의례를 거치지 않고 바로 혼례식을 거행한다.
* 남자는 몇 명의 자식을 낳은 뒤라도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판관이 허용한 경우가 아니라면, 원칙적으로 다른 남자를 맞아들일 수 없다.
* 남자는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첩을 얼마든지 거느려도 괜찮고 원할 때마다 창녀(기생) 집에 드나들어도 흠이 아니다. 양반이나 고관들은 대개 두세 명의 처를 한 집에 거느리고 살고 있지만, 그중에 한 명이 단독으로 가사를 책임지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각기 처소가 따로 있어 남자들이 원하는 여자의 집으로 찾아간다.
* 조선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노예 다루듯 하고 사소한 잘못을 빌미로 여자를 내
노비제가 완화될 수 있던 가장 큰 배경은 중인과 서얼 등의 신분해방운동 때문이다. 종래 양반지배층만이 관직을 영위 할 수 있었던 것에 중인계층이 조금씩 진출하게 되자 노비들의 신분해방도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배경이 마련되었다. 결국 조선정부는 공노비를 1801년에, 사노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법적으로 폐지시켰다.
노비를 해방시킨 이유는 조세를 더 걷기 위해서 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노비제가 폐지되면서 근대화 되는 것을 촉진 시켰다고 할 수 있겠고 국고를 증가시키는 것에도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적절한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4.종교유입과 농민층 의식 변화
천주교는 17세기에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한 우리나라 사신들에 의하여 서학으로 소개되었다.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후반 경이었다. 당시 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심하던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서양인 신부에게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후로 신앙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정부는 천주교가 유포되는 것에 대하여 내버려 두면 저절로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자 드디어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국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사교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정조 때에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하였던 시파가 정권을 잡았으므로 큰 탄압이 없었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직후 노론 강경파인 벽파가 집권하면서 대탄압이 가해졌다(1801). 이 사건으로 천주교 전래에 앞장을 섰던 실학자 및 많은 수의 양반 계층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천주교는 안동 김 씨의 세도 정치기에 탄압이 완화되며 백성들에게 활발히 전파되었다.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서양인 신부들이 몰래 들어와 포교하면서 교세가 점차 확장되었다.
동학은 1860년에 경주 출신인 최제우가 창도하였다. 동학에는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사회가 처한 여러 사회 상황이 반영되었다. 교리는 유불선의 주요 내용이 바탕이 되었고, 주문과 부적 등 민간 신앙이 요소들이 결합되었다. 또 사회 모순을 극복하고, 일본과 서양 국가의 침략을 막아 내자는 주장을 폈다.
동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시천주와 인내천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지 않고, 노비 제도를 없애며, 여성과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회를 추구하였다. 조선의 지배층은 신분 질서를 부정하는 동학을 위험시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는 죄로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그 뒤를 이은 최시형은 교세를 확대하면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펴내어 교리를 정리하는 한편 의식과 제도를 정착시켜 교단 조직을 정비하였다. 다시 교세가 커진 동학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는 물론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로 퍼져 나갔다.
사회 불안이 점차 고조되자 이제까지 명목상이나마 유지되던 유교적 왕도 정치는 점점 퇴색되어 갔다. 19세기의 세도 정치 하에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탐관오리의 부정과 탐학은 끝이 없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극도에 달한 수령의 부정은 중앙 권력과도 연계되어 있어 이미 암행어사의 파견으로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농촌 사화가 피폐하여 가는 가운데 농민들의 사회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해져 갔다. 가난과 세금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농민들은 농토를 버리고 이리저리 떠도는 유민이 되거나 세금을 피하여 산간벽지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기도 하고 도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 농민들은 지배층의 압제에 대하여 종래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과 대결하였다.
처음에는 소청이나 벽서, 괘서 등의 형태로 나타나던 농민들의 항거는 점차 농민 봉기로 변화되어 갔다.
농민들의 항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1811)과 진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임술 농민 봉기였다(1862)
새로운 종교 천주교의 유입으로 농민들이나 그 보다 밑에 계급의 사람들은 평등이라는 사고를 많이 가지게 된 것 같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자신의 권리나 자유를 주장하기 시작 했고 자신들 사는 농촌사회가 피폐해 지는 것에 대해서 자신들의 해결해보려는 노력을 시작하게 된 거 같다. 과거의 신분의 차이를 인정하고 살 때는 보이지 않았던 모순이 사상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면서 농민들이 불만을 토로해 내면서 많은 농민들의 난이 일어나게 된 거 같다.
5.조선시대 풍속과 상속제도
* 사촌이내 친척들과의 결혼은 혀용 되지 않으며, 당사자가 청혼하는 법은 없고 8, 10, 12세 혹은 그 이상의 나이에 달하면 부모나 친척들끼리 서로 혼약을 맺는다. 즉, 연애결혼은 없으며, 중매결혼만이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결혼할 때 대부분 중매의 형식으로 갖추기는 하지만, 개중에는 연애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음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 대체로 여자 쪽의 부모가 아들이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남자 집에 가서 살게 된다. 당사자들이 자립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가지 시집살이를 한다.
*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갈 때, 말을 타고 가며, 친척이나 친구들을 동반하고 와서 먼저 마을을 한 바퀴 돌도록 되어 있다. 신부가 신랑 집에 갈 때도 신부의 친지들이 따라가기는 하지만, 다른 의례를 거치지 않고 바로 혼례식을 거행한다.
* 남자는 몇 명의 자식을 낳은 뒤라도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판관이 허용한 경우가 아니라면, 원칙적으로 다른 남자를 맞아들일 수 없다.
* 남자는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첩을 얼마든지 거느려도 괜찮고 원할 때마다 창녀(기생) 집에 드나들어도 흠이 아니다. 양반이나 고관들은 대개 두세 명의 처를 한 집에 거느리고 살고 있지만, 그중에 한 명이 단독으로 가사를 책임지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각기 처소가 따로 있어 남자들이 원하는 여자의 집으로 찾아간다.
* 조선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노예 다루듯 하고 사소한 잘못을 빌미로 여자를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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