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본 문
1. 최치원의 生涯와 時代적 배경
2. 최치원의 사상적 배경
3. 최치원의 시문학
Ⅲ. 맺음말
* 참고자료 *
Ⅱ. 본 문
1. 최치원의 生涯와 時代적 배경
2. 최치원의 사상적 배경
3. 최치원의 시문학
Ⅲ. 맺음말
* 참고자료 *
본문내용
군사력을 상실하였고 행정 기능이 마비되었으며, 수륙 양편이 막힘으로써 조세 징수나 대당 외교의 길이 어려워졌다. 이러한 극심한 사회변동 속에서 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해온 육두품 지식인들은, 혼란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개혁안을 진상하기도 하였지만 성과는 미약하였다. 육두품들은 지방에 은둔하거나, 새로이 등장하는 정치 세력인 지방 호족에 의탁하기도 하였으며, 신라의 멸망을 목도하면서 진골귀족의 지배체제에 그대로 기생하기도 하는 등 다양하게 분화되어 갔다.
이러한 사회 혼란은 사상면에서도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삼국통일 초기의 평화와 안락적인 성향은 점차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풍조로 바뀌었으며 이러한 흐름과 함께 노장사상과 도교가 새로운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정권 다툼에서 밀려난 귀족의 자손들이나 진골세력에 반발하다가 탄압받은 육두품 이하의 하급 귀족에게서 은둔적 사상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또한, 개인적인 수양을 강조하면서 신라 왕조의 권위에 도전한 선종이 호족과 낙향한 귀족 세력과 결합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현상은 진골 귀족간에 유행했던 학문적이고 체제 불교적인 성격의 화엄종에 대하여 그 한계성과 모순성을 비판하는 의식이 대두되면서 강화되었다. 이 시기의 사상적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유불선의 통합 양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유교에 대한 지식계급층의 이해가 심화되면서 유불선의 삼교가 상호연관을 가지고 복합되어 가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유불선사상이 혼합되어 가는 양상은 유학자들에 의해 정치에 대한 비판 의식이 대두되었던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최치원은 이러한 정치사상적 혼란과 사상적 복합성이 두드러지는 사회 속에서 성장하면서 독자적인 사상을 형성해 나가게 되었다. 김인종, 「고운의 생애」, 『고운 최치원』, 민음사, 1898, pp. 3~52.
2) 최치원의 생애
최치원의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이며, 신라 현안왕 1년(857)에 출생한 육두품 출신지식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은 경문왕 때 강화되기 시작한 유교 진흥책을 통해 그의 아들을 경문왕 8년(866) 12세의 나이로 당에 유학을 보내었다. 최치원은 당에 유학한지 16년에 되던 885년에 당나라 희종의 조서를 받들고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詩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을 제수받아 외교문서 작성과 교섭 사절로서의 임무를 맡았으나 이후에 외직을 자청하여 태산태수(太山太守)를 지낸 후 부역태수(富域太守)로 7년 정도 재임하였으며, 천령태수(天嶺太守)로 있었던 894년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며 개혁안인 시무책(時務策) 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상소하면서 육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阿)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골품제도의 병폐로 경색되어버린 정국을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이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하여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최치원은 글씨를 잘 썼으며 유교와 불교의 조화에 노력한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 시대 화랑도에 대해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으며,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이 유명하다. 또한 육교사관에 입각해서 역사를 정리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연표형식으로 정리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이다. 여기에서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 신라왕의 고유한 명칭이 모두 야비하여 족히 칭할만한 것이 못된다고 하면서 왕(王)으로 바꾸었는데 유교사관에 입각한 역사 인식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 문묘에 배향, 문창후(文昌候)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 시대에 태인의 무성서원, 경주의 서악서원등에 종향(從享)되었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계원필경』, 『금체시』, 『오언칠언금체시』, 『잡시부』, 『중산복궤집』등과 사서(史書)로 『제왕연대력』이 있으며,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는 불교 관련 저술로는 『계원필경』,『법장화상전』,『사산비명』등이 있다. 최영성, 「고운 사상의 형성배경 및 전개과정」, 『최치원의 사상 연구』, 아세아 문화사, 1990,
pp. 6~21.
2. 최치원의 사상적 배경
1) 유교관
유가(儒家)에서는 최치원을 유학자로, 불가(佛家)에서는 불학자로, 선가(仙家)에서는 동방선파(東方仙派)의 중요한 인물로 받든다. 따라서 후학으로서 어느 것이 그의 학문 본령인지 알기 어려울 때가 있음도 사실이다. 그는 유자(儒者)로 자처하고 그 길을 걸으면서도 불교나 도선사상(道仙思想)에 대해서도 그 사상적 본령에 정통하였다. 특히 불교에 대한 이해는, 유교의 외연(外延)으로서 그저 폭넓은 관심을 가진 정도가 아니라 실로 깊은 수준이어서, 불교인이 아닌가 의심이 들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치원의 학문과 사상은 분명히 유학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가 자신을 \'유문말학(儒門末學) 혹은 부유(腐儒)‘라 표현하고 또한 그의 저술 속에서도 유학자임을 강조하고 있으니,
옛날에 이름난 선비로서 이공의 시중이 되겠다는 이도 기쁨이 오히려 많았는데, 오늘에 먼 지방 사람으로서 공자의 생도라 일컬으니 영광 비할 데 없다. 이재운, 『최치원 연구』,백산 자료원, 1999, p. 99.
라고 하여 스스로를 공자의 학문을 탐색하는 유자(儒者)임을 자처하고 있고 나아가 공자의 생도(生徒)임을 자부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이면(裏面)을 살펴볼 때,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했던 것은 유교인의 길이요 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삶이었으며, 그가 그리던 세상은 도의(道義)가 구현된 이상적인 유교사회였던 것 같다. 최영성,『최치원의 철학사상』, 아세아 문화사, 2001, p.155.
이처럼 유자임을 자처한 최치원으로서는 현실세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유학의 근본정신은 다름 아닌 현실주의이기 때문이다.
그의 유교적 가치관은 다음의 글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으니,
내가 격언을 살피고 성행을 엿보건대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히는 것이므로 현신은 요순의 치세를 이루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세상에서는 실로 인재가 필요하므로 후사(後士)는 소부(巢父), 허유(許由)를 본받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긴다”고 하였다....소부, 허유의 소절(小節)을
이러한 사회 혼란은 사상면에서도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삼국통일 초기의 평화와 안락적인 성향은 점차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풍조로 바뀌었으며 이러한 흐름과 함께 노장사상과 도교가 새로운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정권 다툼에서 밀려난 귀족의 자손들이나 진골세력에 반발하다가 탄압받은 육두품 이하의 하급 귀족에게서 은둔적 사상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또한, 개인적인 수양을 강조하면서 신라 왕조의 권위에 도전한 선종이 호족과 낙향한 귀족 세력과 결합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현상은 진골 귀족간에 유행했던 학문적이고 체제 불교적인 성격의 화엄종에 대하여 그 한계성과 모순성을 비판하는 의식이 대두되면서 강화되었다. 이 시기의 사상적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유불선의 통합 양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유교에 대한 지식계급층의 이해가 심화되면서 유불선의 삼교가 상호연관을 가지고 복합되어 가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유불선사상이 혼합되어 가는 양상은 유학자들에 의해 정치에 대한 비판 의식이 대두되었던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최치원은 이러한 정치사상적 혼란과 사상적 복합성이 두드러지는 사회 속에서 성장하면서 독자적인 사상을 형성해 나가게 되었다. 김인종, 「고운의 생애」, 『고운 최치원』, 민음사, 1898, pp. 3~52.
2) 최치원의 생애
최치원의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이며, 신라 현안왕 1년(857)에 출생한 육두품 출신지식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은 경문왕 때 강화되기 시작한 유교 진흥책을 통해 그의 아들을 경문왕 8년(866) 12세의 나이로 당에 유학을 보내었다. 최치원은 당에 유학한지 16년에 되던 885년에 당나라 희종의 조서를 받들고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詩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을 제수받아 외교문서 작성과 교섭 사절로서의 임무를 맡았으나 이후에 외직을 자청하여 태산태수(太山太守)를 지낸 후 부역태수(富域太守)로 7년 정도 재임하였으며, 천령태수(天嶺太守)로 있었던 894년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며 개혁안인 시무책(時務策) 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상소하면서 육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阿)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골품제도의 병폐로 경색되어버린 정국을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이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하여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최치원은 글씨를 잘 썼으며 유교와 불교의 조화에 노력한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 시대 화랑도에 대해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으며,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이 유명하다. 또한 육교사관에 입각해서 역사를 정리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연표형식으로 정리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이다. 여기에서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 신라왕의 고유한 명칭이 모두 야비하여 족히 칭할만한 것이 못된다고 하면서 왕(王)으로 바꾸었는데 유교사관에 입각한 역사 인식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 문묘에 배향, 문창후(文昌候)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 시대에 태인의 무성서원, 경주의 서악서원등에 종향(從享)되었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계원필경』, 『금체시』, 『오언칠언금체시』, 『잡시부』, 『중산복궤집』등과 사서(史書)로 『제왕연대력』이 있으며,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는 불교 관련 저술로는 『계원필경』,『법장화상전』,『사산비명』등이 있다. 최영성, 「고운 사상의 형성배경 및 전개과정」, 『최치원의 사상 연구』, 아세아 문화사, 1990,
pp. 6~21.
2. 최치원의 사상적 배경
1) 유교관
유가(儒家)에서는 최치원을 유학자로, 불가(佛家)에서는 불학자로, 선가(仙家)에서는 동방선파(東方仙派)의 중요한 인물로 받든다. 따라서 후학으로서 어느 것이 그의 학문 본령인지 알기 어려울 때가 있음도 사실이다. 그는 유자(儒者)로 자처하고 그 길을 걸으면서도 불교나 도선사상(道仙思想)에 대해서도 그 사상적 본령에 정통하였다. 특히 불교에 대한 이해는, 유교의 외연(外延)으로서 그저 폭넓은 관심을 가진 정도가 아니라 실로 깊은 수준이어서, 불교인이 아닌가 의심이 들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치원의 학문과 사상은 분명히 유학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가 자신을 \'유문말학(儒門末學) 혹은 부유(腐儒)‘라 표현하고 또한 그의 저술 속에서도 유학자임을 강조하고 있으니,
옛날에 이름난 선비로서 이공의 시중이 되겠다는 이도 기쁨이 오히려 많았는데, 오늘에 먼 지방 사람으로서 공자의 생도라 일컬으니 영광 비할 데 없다. 이재운, 『최치원 연구』,백산 자료원, 1999, p. 99.
라고 하여 스스로를 공자의 학문을 탐색하는 유자(儒者)임을 자처하고 있고 나아가 공자의 생도(生徒)임을 자부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이면(裏面)을 살펴볼 때,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했던 것은 유교인의 길이요 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삶이었으며, 그가 그리던 세상은 도의(道義)가 구현된 이상적인 유교사회였던 것 같다. 최영성,『최치원의 철학사상』, 아세아 문화사, 2001, p.155.
이처럼 유자임을 자처한 최치원으로서는 현실세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유학의 근본정신은 다름 아닌 현실주의이기 때문이다.
그의 유교적 가치관은 다음의 글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으니,
내가 격언을 살피고 성행을 엿보건대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히는 것이므로 현신은 요순의 치세를 이루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세상에서는 실로 인재가 필요하므로 후사(後士)는 소부(巢父), 허유(許由)를 본받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긴다”고 하였다....소부, 허유의 소절(小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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