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 향가와 시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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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문학] 향가와 시대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향가의 발생
1-1. 향찰의 발생 배경
1-2. 향찰(향가)의 표기
1-3. 향가의 기록

2. 7세기 향가
2-1. 진평왕 (서동요, 혜성가)
2-2. 문무왕 (원왕생가)
2-3. 효소왕 (모죽지랑가)

3. 8세기 향가
3-1. 성덕왕 (헌화가)
3-2. 경덕왕 (도솔가 / 안민가)

4. 9세기 이후 향가
4-1. 헌강왕 (처용가)

(* 시대적의 특징이 있는 일부 향가를 다루었습니다)

본문내용

극락)에 가는 자는 반드시 알려주기로 약속을 한다. 광덕은 분황사(芬皇寺) 서편마을에 은거하며 미투리(신발)을 삼아 생업하며 처자를 데리고 살았으며 염장은 남악(南岳, 경주 변두리) 암자에서 화정에 씨를 심었다. 염장은 달마의 방식으로 수련을 쌓고 광덕은 혼인한 스님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광덕이 먼저 서방세계로 가게 되자, 엄장은 광덕의 해골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고 그의 아내와 함께 살게 된다. 이윽고 밤이 되어 엄장이 관계를 맺으려 하니, 광덕의 아내는 남편과 동거하는 10년 동안 하루도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다고 거부한다. 광덕과 아내는 수도의 한 방편으로 결혼을 했고, 혼인은 욕망과 욕구를 인내하고 거부하기 위한 수련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이에 부끄러움을 느낀 엄장은 원효법사에게 나아가 갈 길을 구하니 원효는 삽관법(揷觀法)을 지어 지고하였다. 후에 엄장 역시 관법을 닦아 서방으로 오른다. 삽관법은 원효의 본전(本傳)과 해동승전(海東僧傳)에도 실려 있다.
향가의 대략적인 내용은 달에게 무량수불 앞에 자신을 말을 가져다 전해달라는 말과 함께 다짐(믿음)이 깊은 부처님께 두 손 모아 사뢰길 원왕생, 즉 원컨대 다시 (서방세계로)가고자 합니다라는 뜻을 전한다. 그리고 그를 그리는(그리워하는) 이가 있다고 말하며 혹시 자신을 끼쳐두고(버려두고) 사십팔 대원을 이뤄 이 세계를 넘어선 또 다른 세계로 가실까 염려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노래는 <도천수관음가 禱千手觀音歌>와 더불어 신라시대 기원가(祈願歌), 즉 기도하는 노래의 전형을 보여 준다. 기원가의 어법은 예배대상에 대한 청원이나 탄원 및 기구(祈求), 혹은 고백의 어법이 중심이 되는데, 이 작품도 바로 이러한 어법구조로 짜여 있다.
덧붙여 신라인의 세계관이 불교와 샤머니즘의 혼합 양상을 보이는 것처럼, 이 노래 또한 달이라는 중개자를 통하여 주술적 어법을 빌려 불교의 ‘무량수불’에게 정토왕생 희원하고 있다. 무량수불은 ‘미타’로 나무아미타불을 뜻한다. 이는 죽은 후 서방세계에 가려고 부르는 사후를 관장하는 보살이기 때문에 수도승들이 모시는 부처이다.
원왕생가는 홀로 불법(관법)을 닦으며 개인적 해탈을 구하는 기원적 서정가요로서도 주목받지만, 신라의 귀족불교가 그 한계를 넘어서 민중들에게 아미타신앙으로 확산되어 대중 불교로 전환되는 시대적 상황 또한 내포하고 있다.
2-3. 효소왕 (모죽지랑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는 신라 제 32대 효소왕(692~702)때의 향가로 제목의 뜻은 모(慕) 죽지랑 가(歌)로, 죽지랑을 높이거나 우러러 받드는 노래라는 것이다. 서문을 보면 죽만랑(竹曼郞)의 무리에 득오(得烏)란 이가 있어 풍류황권(風流黃卷)에 이름을 올렸다고 되있는데 이는 죽지랑이라는 진골 인물의 그룹에 6두품의 득오가 속해있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풍류황권은 풍류도를 수행하던 낭도들의 이름을 기록한 명부로 화랑의 명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득오가 어느 날 사라져 죽지랑이 행방을 찾는데 그 어미는 득오가 모량(牟粱, 6부 중 제일 오래된 모량부, 화랑 알천을 배출한 경주 모량리 일대로 추정)의 득오보다 지위가 높은 벼슬을 지닌 익선(益善)이라는 관리가 부산성의 창직(倉直, 창고지기)으로 데려갔다고 말한다. 죽만랑은 공사로 갔다면 마땅히 찾아 데려와야 한다며 득오에게 향하는데, 이는 징집된 득오는 화랑이 아니거나 약해진 화랑과 관리의 대립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도 그를 뒷받침 해주는데 득오를 데리러 가는 길에 낭(화랑)의 무리 137명이 의장(무장, 전시체제)을 갖추고 따랐다고 쓰인 내용은 화랑의 세력이 약화되어 인원의 숫자가 줄어들었음을 보여준다. 또 관례에 따라 부역한다는 득오를 ‘휴가’를 청하여 돌아오려 하는 부분은 화랑에게도 예외 없이 부역이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그때 휴가를 청하는 것을 거절한 밭주인 익선이 여러 물품을 받음에도 허락지 않다가 진절(珍節) 사지(舍知, 신라 17관등 중 제13관등)라는 낮은 벼슬과 말안장을 주니 그제야 허락을 한다. 조정의 화주(화랑세기로 증명된 풍월주의 부인)가 이를 듣고 익선을 잡으려 하니 익선이 도망가자, 그의 아들을 잡아다 한겨울 궁 안의 연못에서 목욕시켜 죽인다. 화주는 화랑을 정치적으로 보호하고 정계에 발을 담은 여인으로 신라에서는 여성도 정치에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실례로 진흥왕의 부인도 화주였는데 왕을 폐위시킬 정도로 영향력이 강했다.
대왕(효소왕과 다른 왕)이 이를 듣고 칙령을 내려 모량리 사람 중에 벼슬길에 오른 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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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3.11
  • 저작시기2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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