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본 고대부터 근대까지 교류와 갈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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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일본 고대부터 근대까지 교류와 갈등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 들어가면서

-본론-
☛ 고대
☛ 중세
☛ 근대

-결론-
☛ 마치면서

본문내용

일본에 건너간 시기이다. 2기는 5세세기 경으로 전설의 시대 이후 새롭게 건너간 사람들이며 3기는 6세기경에 건너간 시기로 유교와 불교를 전하여 아스카 문화의 기초를 만들었다. 4기는 7세기 후반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여 다른 시기보다 많은 사람들이 왜국으로 건너가 정치,문화,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건너간 도래인들 때문에 수도와 주변지역의 성씨 1065개중에 326개가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의 성이었다고 한다. 1기 전설에 의하면 백제의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 그리고 1기 전설에 의하면 구레노쿠니에 가서 그곳의 왕이 내려준 직물짜는 여자 에히메,오토히메,구레하토리,아나하토리등 4명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470년기록에 의하면 구레노쿠니의 사신과 직물을 짜는 여자 아야하토리,구레하토리, 에히메와 오토히메가 건너왔다고 한다. 그런데 1기의 기록과 470년의 기록을 비교하면 직물짜는 여자 에히메,오토히메, 구레하토리는 일치하지만 아나하토리와 아야하토리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나’와 ‘아야’는 구레처럼 지명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아야’의 한자는 漢인데 이것 때문에 예전의 학자들은 아야하토리는 한나라에서 왔다고 추정하였다. 그러나 1~2세기의 존재하던 한나라와 5세기의 일본 고분시대는 일치하지도 않고 거리도 매우 멀다. 그런데 한반도의 가야를 살펴보면 가야 연맹 가운데 아라국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 아라 가야는 ‘변진 아야’, ‘아나 가야’라고도 불렸다. 그러므로 아야하토리는 ‘변진 아야의 직물을 짜는 여자’ 아나하토리는 ‘아나 가야의 직물을 짜는 여자’로 명칭은 달라도 아라국(가야)에서 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도래인의 기술
일본서기를 보면 463년 백제에서 온 기술자 집단을 아스카 지방의 3마을에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따, 이들은 도공 집단, 마구 제작 집단, 화공 집단, 비단 짜는 집단, 통역 집단들이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기술들은 전파했다.
도공 집단은 한반도의 토기기술을 전파했다. 왜국이 5세기 고분시대 중기부터 스에키라고 하는 단단한 토기를 많이 생산했다. 그런데 이 스테키의 초기 형태는 가야의 단단한 토기의 형태와 기술을 받아 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도공 집단은 백제가 아니라 가야에서 도래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도래인들에 의해 전파된 토기기술로 과거 야요이시대까지의 800도로 구워내는 것을 넘어서 1000도이상의 고온으로 스에키를 구워낼 수있었다.
일본의 오사카부 시죠나와테시에서 5~6세기경의 유적에서 말의 이빨, 뼈, 단단한 토기, 한반도식 토기, 제염 토기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렇게 말을 키우는 말 사육부역시 도래인의 기술자 집단에 의해 운영되었다.
화공 집단은 전문적으로 그림을 그렸고 10세기 경의 사료를 보면 오사카, 교토등에 비단을 짜는 사람들이 살았다고 생각되는 지명을 발견 할수 있고 통역 집단은 가야나 백제 사람들로 이뤄져 있고 그들이 한문에도 능하고 왜국 언어도 능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신해 471년’이라고 새겨진 사이타마현 이아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칠검이나 같은시기 구마모토 현의 에다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칼등에 새겨진 글에 왜국의 지명과 인명이 한자음으로 적혀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것은 가야나 백제에서 건너온 통역 집단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짐작할수 있다. 이렇게 많은 기술을 전수한 도래인들은 왜 일본으로 건너갔는가? 그것은 고구려가 남하하면서 그것을 피해 많은 백제,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3기 도래인은 그 이전의 도래인들과는 달리 왜국에 불교와 유교를 전파하는데 공헌했다. 특히 일본서기 516년 기록에 의하면 백제에서 건너간 오경 [역경][서경][시경][예기][춘추]등의 유교의 5가지 경서
에 능한 박사가 일본에서 강의를 하면서 유교를 교육했다고 적혀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왜국의 귀족들은 왜국 조정에서 대대로 서기로서 활약했다.
일본서기 552년 기록에는 백제의 성왕이 금동 불상,불거,경론등을 왜국 긴메이 천황에 보내고 불교를 믿을 것을 권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보다 먼저 도래인들 사이에서는 일본에 법당을 만들고 불경을 외는등 불교를 믿고 있었다.
588년 백제에서 불사리와 함께 승려 6명과 절 건축자 2명 노반박사 불탑 위의 둥근 부분을 장식하는 금속을 다루는 주조 기술자
와 와박사 가마에서 기와를 굽은 기술자
4명, 화공을 파견하히고 하였고 605년에는 고구려 국왕이 스이코 천황에게 불상 제작비용으로 황금 300량을 보내기도 하는등 일본의 불교의 발전에는 삼국의 지원이 매우 컸다. 이러한 영향으로 일본의 아스카 사찰과 고구려 평양의 청암리, 정릉사등과 매우 그 구조가 유사하며 또한 건축에 사용되었던 자의 기준이 고구려 기준인 고려척이었다는 것도 확인되는등 삼국과 왜국의 교류는 매우 긴밀했던 것을 알 수있다.
07 일본서기
일본서기
일본서기는 신화의 시대 2권과 진무 천황에서 지토천황까지 41대 천황의 역사를 28권을 한문으로 기록한 편년체 역사책이다. 일본서기는 그렇다면 왜 ‘일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일가?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 신라, 고구려와 관련된 곳에는 ‘일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그 외의 곳에는 ‘왜’ 혹은 ‘대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이라는 용어가 일본서기에서 처음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서는 백제, 신라, 고구려를 서쪽의 번국 오랑캐 나라. ≒번방(蕃邦).
의 의미로 ‘서번’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스스로를 신국이라는 의미에서 ‘일본’이라는 용어를 사용 하고 있다. 이것은 그 당시의 국제관계가 자기들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처럼 꾸미기 위한 의도적인 기술인 것이다. 즉 전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삼국을 ‘서번’과 ‘동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왜는 일본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을 동아시아(당시 생각으로는 세계)의 중심이라고 표현하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인 것이다.
일본서기는 1대 진무천황이 기원전 660년 신유년에 즉위했다고 적으면서 이 해를 기준으로 천황의 연대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기원전 660년에는 아직 계급이라는 것이 발생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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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8.24
  • 저작시기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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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97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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