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군사혁명전의 시대상황 (2. 군사혁명 전야 - 국가 재건에 대한 지식인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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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정희 군사혁명전의 시대상황 (2. 군사혁명 전야 - 국가 재건에 대한 지식인논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서론
II. 4월 혁명 후의 정부 비판
1. 4월 혁명
2. 이승만 정권의 유산
3. 과도정부와 장면 정부
4. 진보적 개혁 운동
5. 1960~1961년 논쟁
6. 주체성 요구
7. 민중 혁명에의 촉구
III. 국가 재건을 위한 의제
IV. 군대의 재검토와 5·16 쿠데타
1. ‘정군’운동
2. 군부의 불만
3. 군사쿠데타 계획
IV. 결론

본문내용

다. 1961년 2월 하극상 사건의 두 주역이, 공식적으로는 “자발적인” 예편으로 군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물러난 두 사람중 한 명인 김종필은 자신이 예편하는 조건으로 군이 하극상 사건과 연관지여 박정희를 처벌하지 않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역설적이게도 김종필이 민간인으로 돌아가자 영관급 개혁파들의 쿠데타 계획은 더 과감해졌다. 그러나 군대나 정부의 누구도 이에 대해 확실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군이 유일하게, 그것도 일시적으로 고려한 계획은 1960년 5월에 박정희를 퇴역시킨다는 것이었다. 집권 민주당의 영향력 있던 소장파 의원 모임 신풍회를 이끌던 국회 국방위원장 이철승에 따르면, 박정희의 예정된 퇴역은 그가 작전참모부장으로 서울 육군본부에 있을 때 장면 국무 총리가 확정했다. 이철승은 자신이 국무총리에게 조언해 박정희를 퇴역시키는 대신 대구로 전근 시켰다고 덧붙였다. 박정희의 오랜 지지자이며 당시 대구 제2군 사령관이었던 예비역 육군 중장 장도영은 상반되는 주장을 폈다. 장도영은 박정희가 밀려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본인이 직접 자신의 부사령관으로 박정희를 임명해달라고 육군본부에 요청했다고 한다.
양쪽 주장 모두 조심스럽게 고려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만, 박정희는 장도영 장군이 아니라 해도 누군가 권력자로부터 암암리에 지지를 받은 듯하다. 그래서 그 권력자가 박정희와 그의 휘하 영관급 장교들의 비밀 쿠데타 계획을 위장하기 위해 박정희가 현역에서 물러나게 된다고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 이 가설은 자세히 조사해볼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장도영의 부관이 되어 제2군사령부로 옮겨감으로써 박정희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퇴직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1961년 2월 20일 장도영이 참모총장으로 임명되기 바로 전날 정식 소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장도영의 노골적인 비호하에 제2군사령부으로 옮김으로써 박정희는 장도영의 참모장인 이주일 소장과 다시 손을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주일은 만주에서 군사훈련 시절부터 박정희의 오랜 동지로 5·16군사쿠데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문제를 둘러 싼 논의는 아직까지 제기된 적이 없지만, 5·16까지 채 5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박정희가 제2군사령부로 전보된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그 타이밍과 이유, 효과가 지나치게 절묘해 보인다. 그러나 전부의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러한 사건들은 박정희가 당시 국내의 대중적 분위기에 기반을 두고 쿠데타를 최종 준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정희가 일으킨 5월 군사쿠데타의 시기에 대해서, 내부인사들은 당시 박정희가 필사적인 상태였다고 묘사했다. 즉 1961년 1월 12일에 박정희와 휘하 개혁파들은 군 수뇌부가 5월 말 전역시킬 예정인 153명의 장교 명단에 박정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순간부터 박정희는 시각을 다투면서 죽기살기의 방식으로 자신의 경력을 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내부인사들은 군대에서 밀려나기 전에 쿠데타를 일으켜 군수뇌부의 결정을 앞서가는 것 말고는 박정희가 취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는 주장을 한다. 말에서 행동으로 옮겨진 것은 갑작스러웠지만, 쿠데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5월 16일 화요일 새벽, 박정희는 겨우 3,600명밖에 안 되는 산적단 같은 혁명군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옴으로써 쿠데타를 주도했다.
IV. 결론
1961년 5·16군사쿠데타의 배경은 총체적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와 주로 군 위계서열의 심각한 동요로 인해 4월 혁명 이후 군부가 점점 더 불안정해졌던 두 가지 상황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전자의 경우 개혁 요구는 주로 시민 계층, 특히 자유주의적 지식인들과 정치적으로 민감한 도시 거주민, 학생들이 주가 되었는데 실제로 이들 모두는 자신들의 요구를 실행에 옮길 만한 수단이 거의 없었다.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총체적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적 합의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대의 경우는 ‘정군’이라는 뚜렷한 요구가 있었다. ‘정군’은 박정희와 그 휘하 영관급 개혁파들의 과감한 캠페인의 주제였으며, 그들은 실제로 군내 위계서열을 심각하게 동요시켰고 정부내 위계에도 혼란을 야기해 결국 정부 전복에까지 이르렀다. 그렌데도 쿠데타는 일반적으로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졌다. 가장 명망있는 일간지 『공아일보』조차도 당시 한국 사회는 “‘현직 정치인들의’ 부패와 무능, 무력 ……혼란스러운 파벌주의”로 인해 방향을 잃었기 때문에 전면 개혁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1961년 5월 19일자 사설).
이러한 시각에 두말할 것 없이 한쪽으로 치우친 것으로 치부하고 군사혁명 세력의 압력을 받아 사설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각은 장면 정부에 대한 국민 감정의 중요한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강력한 지도력에 대한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의 요구는, 박정희가 이러한 요구를 포착하는 전략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박정희는 쿠데타를 말과 행동 양쪽으로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이 제공한 것과 같은 근거로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즉, 국가 재건에 대한 필요성이라는 점에서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같은 근거로 자신의 개혁 일정을 끝까지 추진했다.
필자는 이 장에서 4월 혁명부터 5·16 군사쿠데타까지 11개월 동안 논의되었던 국가 개발에 대한 논쟁에 의도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왜냐하면 이 논쟁은 쿠데타 이후 박정희의 개혁 및 이후의 정책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의사가 군사쿠데타를 정당화 하기 위해 이용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군사혁명 한 달 후인 6월에 쓰여진 『사상계』 7월호에 실린, 군대는 가능한 빨리 민주주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장준하의 글이나, 진정한 혁명은 오직 민중들에 의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고 퉁명스럽게 말한 함석헌의 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함석헌과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깨닫지 못했던 것은, 한국 국민들의 혁명으로 가는 길은 이미 시작되었고 박정희가 향후 18년 동안 그 선두에 서게 된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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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9.26
  • 저작시기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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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04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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