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교산 허균
Ⅰ 서론
1. 기존연구
2. 연구목적
Ⅱ 허균
1. 허균의 생애
2. 허균의 교우 관계
1) 손곡이달
2) 사명당
3) 서양갑, 심우영
3. 봉건제도 vs 허균의 사상
4. 문학관
1) 정감
2) 현실체험
3) 개성강조
Ⅲ 홍길동전
1. 수호지와 홍길동전
2. 소설이 쓰여진 배경
3. 소설로 보는 허균의 사상
Ⅳ 결론
* 생애
* 출처
Ⅰ 서론
1. 기존연구
2. 연구목적
Ⅱ 허균
1. 허균의 생애
2. 허균의 교우 관계
1) 손곡이달
2) 사명당
3) 서양갑, 심우영
3. 봉건제도 vs 허균의 사상
4. 문학관
1) 정감
2) 현실체험
3) 개성강조
Ⅲ 홍길동전
1. 수호지와 홍길동전
2. 소설이 쓰여진 배경
3. 소설로 보는 허균의 사상
Ⅳ 결론
* 생애
* 출처
본문내용
서론
1. 기존 연구
허균의 기존 연구를 보면 두 가지의 종류로 나누고 있다.
하나는 허균이 당시 시대에 역모를 꾀어 사형으로 죽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허균이 역모죄로 몰려 사형을 당했다는 것으로 나뉜다.
하지만 이 시작이 어떻게 되었든 허균의 홍길동전, 시, 전을 인정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 연구한다는 것이다.
2. 연구 목적
허균은 한국의 문학, 특히 소설문학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선조에서 광해 대의 역사적 격변기를 살다간 허균은 그 시대적 특성에 걸맞게 산문문학 작품의 창작에 힘을 기울여 전통 한문문장양식 기와 전을 변용해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창작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우리 고전소설사상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홍길동전을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허균이 지닌 이러한 소설사적 위치는 그가 우리의 소설사상 본격적인 산문시대의 출발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고, 조선 조 후기 산문시대의 만개를 위해 앞서서 예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이렇듯 허균이 남긴 문화유산은 참으로 방대하다. 산문문학 유산으로 허균의 문학의식이나 그의 사상은 첨예하게 드러내고 있는 論 設 序 跋 등의 글, 시화집인 鶴山樵談(학산초당) , 惺詩話(성수시화), 夢記(몽기), 酒吃翁夢記(주흘옹몽기), 巡軍府君廳記 (순군부군청기)등의 記(기)및 南宮先生傳(남궁선생전), 蓀谷山人傳(손곡산인전), 張山人傳(장산인전), 蔣生傳(장생전) 등의 傳(전)과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소설이라 일컬어지는 洪吉童傳(홍길동전)이 있을 정도로 허균은 다양하고도 풍요한 문학유산 때문에 종래국문학계에서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으며, 그 결과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걷우기도 했다.
허균에 대한 많은 연구로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허균이라는 존재는 위에도 말했듯이 최초의 한글소설을 썼고 한국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사람으로 알며 전체적으로 그를 높게 평가를 한다. 허균이 살던 시대에 명나라에서까지 인정을 받아 현재 중국에는 조선시선(1600, 오명제 편찬)이 남아있을 정도로 그는 문학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그런 그가 유독 자신의 나라인 조선에서 만은 기피의 대상이 되었는데 필자는 그 이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허균에 대해 알아보고 이와 함께 허균이 쓴 홍길동전을 통해 그의 사상을 더 깊게 알아가면서 허균을 좀 더 깊이 알 수 있게 되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Ⅱ. 허균
허균part에서는 허균에 대한 이야기를 논하고자 한다. 허균이 왜 당시 조선 시대에 기피인물이 될 수 밖에 없는지 이 part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허균을 알기 위해서는 허균의 생애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선 생애 부분에서는 허균의 작품활동에 중요한 부분만을 선택하여 논하기로 하고 뒷 쪽에 허균에 생애에 대해 더 자세히 논하도록 하겠다.
1. 허균의 생애
허균은 1569년에 서울 건천동에서 허엽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허균의 아버지는 서경덕의 제자이자 동인의 영수로서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 동지충주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그의 형제 또한 허성, 허봉, 허난설헌으로 학벌과 문벌이 뛰어났던 명문집안이었다. 그래서 인지 허균은 명문 집안의 한 사람으로서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있었고 가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허균이 12살인 1580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잃어 형들과 누이 밑에서 자란 허균은 누구보다 사랑을 받았고 어떠한 활동에도 제안을 받지 않았는데, 어린나이에 거리를 돌아다니고 술집을 드나드는 등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예리한 감수성과 진보적 기질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예교의 속박을 벗어난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성격이 나중에 허균에 삶을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허균의 가족을 잃은 슬픔은 1580년에서 멈추지 않는다. 1588년 둘째 형인 유배 생활을 끝났어도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는 벌로 인해 떠돌이 생활을 하다 죽고 얼마 않지나 1591년 누나 난설헌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결혼생활과 마음의 병으로 죽게 된다. 허균은 난설헌의 죽음과 함께 묻혀가는 재능이 아까워 「난설헌집」을 편찬했다.
그 뒤 허균은 뛰어난 재주로 26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30세에 병조좌랑에 오른 이래 31세에 황해도도사, 36세에 수안군수, 39세에 삼척부사, 40세에 공주목사, 46세에 호조참의, 48세에 형
1. 기존 연구
허균의 기존 연구를 보면 두 가지의 종류로 나누고 있다.
하나는 허균이 당시 시대에 역모를 꾀어 사형으로 죽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허균이 역모죄로 몰려 사형을 당했다는 것으로 나뉜다.
하지만 이 시작이 어떻게 되었든 허균의 홍길동전, 시, 전을 인정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 연구한다는 것이다.
2. 연구 목적
허균은 한국의 문학, 특히 소설문학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선조에서 광해 대의 역사적 격변기를 살다간 허균은 그 시대적 특성에 걸맞게 산문문학 작품의 창작에 힘을 기울여 전통 한문문장양식 기와 전을 변용해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창작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우리 고전소설사상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홍길동전을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허균이 지닌 이러한 소설사적 위치는 그가 우리의 소설사상 본격적인 산문시대의 출발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고, 조선 조 후기 산문시대의 만개를 위해 앞서서 예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이렇듯 허균이 남긴 문화유산은 참으로 방대하다. 산문문학 유산으로 허균의 문학의식이나 그의 사상은 첨예하게 드러내고 있는 論 設 序 跋 등의 글, 시화집인 鶴山樵談(학산초당) , 惺詩話(성수시화), 夢記(몽기), 酒吃翁夢記(주흘옹몽기), 巡軍府君廳記 (순군부군청기)등의 記(기)및 南宮先生傳(남궁선생전), 蓀谷山人傳(손곡산인전), 張山人傳(장산인전), 蔣生傳(장생전) 등의 傳(전)과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소설이라 일컬어지는 洪吉童傳(홍길동전)이 있을 정도로 허균은 다양하고도 풍요한 문학유산 때문에 종래국문학계에서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으며, 그 결과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걷우기도 했다.
허균에 대한 많은 연구로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허균이라는 존재는 위에도 말했듯이 최초의 한글소설을 썼고 한국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사람으로 알며 전체적으로 그를 높게 평가를 한다. 허균이 살던 시대에 명나라에서까지 인정을 받아 현재 중국에는 조선시선(1600, 오명제 편찬)이 남아있을 정도로 그는 문학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그런 그가 유독 자신의 나라인 조선에서 만은 기피의 대상이 되었는데 필자는 그 이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허균에 대해 알아보고 이와 함께 허균이 쓴 홍길동전을 통해 그의 사상을 더 깊게 알아가면서 허균을 좀 더 깊이 알 수 있게 되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Ⅱ. 허균
허균part에서는 허균에 대한 이야기를 논하고자 한다. 허균이 왜 당시 조선 시대에 기피인물이 될 수 밖에 없는지 이 part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허균을 알기 위해서는 허균의 생애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선 생애 부분에서는 허균의 작품활동에 중요한 부분만을 선택하여 논하기로 하고 뒷 쪽에 허균에 생애에 대해 더 자세히 논하도록 하겠다.
1. 허균의 생애
허균은 1569년에 서울 건천동에서 허엽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허균의 아버지는 서경덕의 제자이자 동인의 영수로서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 동지충주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그의 형제 또한 허성, 허봉, 허난설헌으로 학벌과 문벌이 뛰어났던 명문집안이었다. 그래서 인지 허균은 명문 집안의 한 사람으로서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있었고 가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허균이 12살인 1580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잃어 형들과 누이 밑에서 자란 허균은 누구보다 사랑을 받았고 어떠한 활동에도 제안을 받지 않았는데, 어린나이에 거리를 돌아다니고 술집을 드나드는 등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예리한 감수성과 진보적 기질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예교의 속박을 벗어난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성격이 나중에 허균에 삶을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허균의 가족을 잃은 슬픔은 1580년에서 멈추지 않는다. 1588년 둘째 형인 유배 생활을 끝났어도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는 벌로 인해 떠돌이 생활을 하다 죽고 얼마 않지나 1591년 누나 난설헌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결혼생활과 마음의 병으로 죽게 된다. 허균은 난설헌의 죽음과 함께 묻혀가는 재능이 아까워 「난설헌집」을 편찬했다.
그 뒤 허균은 뛰어난 재주로 26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30세에 병조좌랑에 오른 이래 31세에 황해도도사, 36세에 수안군수, 39세에 삼척부사, 40세에 공주목사, 46세에 호조참의, 48세에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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