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1.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2. 기존 연구 검토 및 연구 방법
Ⅱ. 노계 박인로의 삶
1. 제1기 (성장기)
2. 제2기 (출사기)
3. 제3기 (은퇴기)
Ⅲ. 노계 사상
1. 안빈낙도 사상
2. 충효 사상
3. 도학 사상
4. 복고 사상
5. 자연애 사상
Ⅳ. 노계 작품 특징
1. 표현방법
(1) 구성 방식
(2) 실용어구의 활용
2 내용전달
(1) 직설적인 어휘의 사용
(2) 율조의 변화
(3) 교훈적, 사실적 내용
Ⅴ. 노계 작품의 평가와 가치
Ⅵ. 결론
-작가 연보
※ 참고문헌
1.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2. 기존 연구 검토 및 연구 방법
Ⅱ. 노계 박인로의 삶
1. 제1기 (성장기)
2. 제2기 (출사기)
3. 제3기 (은퇴기)
Ⅲ. 노계 사상
1. 안빈낙도 사상
2. 충효 사상
3. 도학 사상
4. 복고 사상
5. 자연애 사상
Ⅳ. 노계 작품 특징
1. 표현방법
(1) 구성 방식
(2) 실용어구의 활용
2 내용전달
(1) 직설적인 어휘의 사용
(2) 율조의 변화
(3) 교훈적, 사실적 내용
Ⅴ. 노계 작품의 평가와 가치
Ⅵ. 결론
-작가 연보
※ 참고문헌
본문내용
립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싸우게 되고 점차 사색당쟁으로 확산되어 나갔으니, 이 시기는 노계의 10대 중반에 해당된다. 이렇게 어지러운 때에 가세마저 미미하니 노계가 신로(臣路)에 들어서기는 매우 어려웠으리라 여겨진다.
이처럼 임진왜란 전까지 그의 삶에서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그가 농촌에 묻혀 산 한미한 존재였던 것을 알려준다. 앞의 책, 289~290p
2. 제2기 (출사기)
선조25년 4월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으며, 열흘 뒤에는 노계의 마을 영양이 적중에 들어갔는데, 이 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에 가담했다가 수군에 종사하여 전쟁가사「태평사(太平詞)」와「선상탄(船上歎)」을 지었다. 비분강개한 그는 의병장 정세아의 별시위가 되어 활약 하였으며, 선조 31년에는 좌절도사 성윤문의 막하에 들어가 전공을 쌓아가던 중 성윤문의 명에 의하여 가사「태평사」를 지어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선조32년(1559) 39세의 늦은 나이에 비로소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선전관, 조라포 만호(萬戶) 등의 벼슬을 하였다. 조라포는 거제도의 한 포구이며, 만호란 수구의 말단 단위부대 지휘관 직위이다. 그는 지성으로 국방을 돌보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만호의 소임을 다하고 귀향할 때에는 너무 초라하여 청렴결백한 성품이 드러났으며, 그의 인품과 정성에 감동한 사졸들이 송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한다. 이 때 만호란 벼슬은 녹봉이나 토지가 주어지지 않았고 생활 기반인 둔전도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빼앗겨 그의 생활은 궁핍했으리라 생각된다.
선조 38년(1605)에는 통주사가 되어 부산에 부임하였는데, 이 때 가사 「선상탄」을 지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국가의 숭문정책이 다시 자리를 잡았으며, 노계는 무부 생활이 국가 관리로서의 출세와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는 이상 실현에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관직에서 은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렇듯 50세 이후에는 은퇴하여 성리학에 잠심하며 안빈낙도하는 생애를 보냈었다. 이 시기 한음 이덕형(1561~1613)을 만나 그 유명한「조홍시가(早紅歌)」를 지었던 것이다. 앞의 책, 291p
3. 제3기 (은퇴기)
전란이 끝났을 때, 그는 무인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선비로서의 길을 닦게 되었다.(노계가 무부(武夫)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독서 수행에 전력하던 51-82세 때를 이 시기라고 본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배움에 대한 열정을 들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개인적 성향 이상의 이유도 있어 보인다. 즉, 전란이 끝난 후 향촌 사회 재건 과정에서 사족 지배체제가 확고해지는 것을 보면서, 혹 집안이 영원히 몰락해 버리지나 않나 하는 두려움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유교적 공부를 통해 사족으로서의 체신을 유지하고, 기회가 되면 그 이상의 사회적 활동도 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앞의 책, 292~293p
그래서 그는 큰 선비나 유명 인사들과의 교유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는데, 그 중 51살 때인 광해군 3년(1611) 한음 이덕형을 찾아 놀면서「사제곡(莎堤曲)」과「누항사(陋巷詞)」를 지었고, 이듬해 3월에는 안동의 도산 서원을 참배하고 퇴계 이황의 학문과 유풍을 흠모하였다. 광해군 11년(1619)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쫓아서 울산 초정에 가서는 시조를 짓기도 했으며, 옥산서원을 찾아가서「독락당(獨樂堂)」을 짓는 등 도의상교하며, 모현자성(慕賢自省)하는 가사를 남겼다. 인조 7년(1629) 69세 때에는 여헌 장현광을 찾아가 그를 좇아 노닐면서 시조 「입암 29곡」을 지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용양위호군이라는 우노(優老)의 벼슬과 함께 쌀과 고기를 하사 받았다. 인조 13년(1635)에는 가사 「영남가」를 지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 75세였다. 그 이듬해에는 가사 「노계가」와 시조 「오륜가」 25수를 지었으며 그 밖의 한시문과 국문 시조들도 거의 이 무렵에 지어졌다. 현전하는 작품으로 9편의 가사와 67수의 시조가 있으니 선가자(善歌者)로 칭송될 만하였다. 그의 작품은 한결같이 반낭만적이며 반여성적인 것으로 남성적이며 사실적인 웅건미를 지니고 있다. 이상보, 『17C 가사전집』, 교학연구사, 1987, 21p
Ⅲ. 노계 사상
노계의 사상은 <노계집> 1권에 있는 ‘안분금’을 보면 노계의 편모(片貌)와 사상을 엿볼 수 있으니, 이를 참고로 하여 그의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안분금’은 작품 속에서 그가 자신의 처음 호인「무하옹(無何翁)」이라고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가 만년에 노계곡의 산수를 좋아하여 자신의 호를 노계로 바꾼 때보다는 좀 앞서는 것 같다. ‘안분금’을 지었을 당시와 그 이후에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노계의 사상 내지 인생관의 대부분은 이 시 한편에서 잘 드러난다.
이 시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그의 사상을 비롯해서 생활태도, 취향, 소원 등이 잘 나타나 있는데 먼저 그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안빈낙도 사상
남과의 시비에는 조금이라도 연관되는 것조차 꺼리는 성격이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며 특히 그는 ‘희증부산정공연길(贈富山鄭公延吉)’이란 칠언절구 두수(二首)에서 “집안 살림은 비록 가난하나 덕만은 가난하지 않고 나무하고 고기 잡는 생애가 만족하니 저 부귀로 이 가난과 바꾸겠는가?”라고 말하며 아무런 욕심도 없음을 강조하는 것을 볼 때에는 그는 안빈낙도 사상을 추구함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누항사’는 노계가 한음에게 자기가 실제로 겪고 있는 어려운 사정을 여실하게 나타낸 것으로 노계의 안빈낙도 사상을 나타낸 대표적인 작품이다.
누항(陋巷) 누항(陋巷) : 누추한 곳
깁푼 곳의 초막(草幕)을 지어 두고,
풍조우석(風朝雨夕) 풍조우석(風朝雨夕) : 바람 부는 아침과 비 오는 저녁
에 석은 딥히 셥히 되야 석은 딥히 셥히 되야 : 썩은 짚이 땔감(섶)이 되어
,
셔 홉 밥 닷 홉 죽(粥) 셔 홉 밥 닷 홉 죽(粥) : 세 홉의 밥과 다석 홉의 죽. 곧, 초라한 음식
에 연기(煙氣)도 하도 할샤 하도 할샤 : 많기도 많구나
.
설 데인 숙냉(熟冷) 숙냉(熟冷) : 숙늉
애 뷘 배 뷘 배 : 텅빈 배. 고픈 배
이처럼 임진왜란 전까지 그의 삶에서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그가 농촌에 묻혀 산 한미한 존재였던 것을 알려준다. 앞의 책, 289~290p
2. 제2기 (출사기)
선조25년 4월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으며, 열흘 뒤에는 노계의 마을 영양이 적중에 들어갔는데, 이 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에 가담했다가 수군에 종사하여 전쟁가사「태평사(太平詞)」와「선상탄(船上歎)」을 지었다. 비분강개한 그는 의병장 정세아의 별시위가 되어 활약 하였으며, 선조 31년에는 좌절도사 성윤문의 막하에 들어가 전공을 쌓아가던 중 성윤문의 명에 의하여 가사「태평사」를 지어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선조32년(1559) 39세의 늦은 나이에 비로소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선전관, 조라포 만호(萬戶) 등의 벼슬을 하였다. 조라포는 거제도의 한 포구이며, 만호란 수구의 말단 단위부대 지휘관 직위이다. 그는 지성으로 국방을 돌보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만호의 소임을 다하고 귀향할 때에는 너무 초라하여 청렴결백한 성품이 드러났으며, 그의 인품과 정성에 감동한 사졸들이 송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한다. 이 때 만호란 벼슬은 녹봉이나 토지가 주어지지 않았고 생활 기반인 둔전도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빼앗겨 그의 생활은 궁핍했으리라 생각된다.
선조 38년(1605)에는 통주사가 되어 부산에 부임하였는데, 이 때 가사 「선상탄」을 지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국가의 숭문정책이 다시 자리를 잡았으며, 노계는 무부 생활이 국가 관리로서의 출세와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는 이상 실현에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관직에서 은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렇듯 50세 이후에는 은퇴하여 성리학에 잠심하며 안빈낙도하는 생애를 보냈었다. 이 시기 한음 이덕형(1561~1613)을 만나 그 유명한「조홍시가(早紅歌)」를 지었던 것이다. 앞의 책, 291p
3. 제3기 (은퇴기)
전란이 끝났을 때, 그는 무인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선비로서의 길을 닦게 되었다.(노계가 무부(武夫)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독서 수행에 전력하던 51-82세 때를 이 시기라고 본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배움에 대한 열정을 들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개인적 성향 이상의 이유도 있어 보인다. 즉, 전란이 끝난 후 향촌 사회 재건 과정에서 사족 지배체제가 확고해지는 것을 보면서, 혹 집안이 영원히 몰락해 버리지나 않나 하는 두려움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유교적 공부를 통해 사족으로서의 체신을 유지하고, 기회가 되면 그 이상의 사회적 활동도 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앞의 책, 292~293p
그래서 그는 큰 선비나 유명 인사들과의 교유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는데, 그 중 51살 때인 광해군 3년(1611) 한음 이덕형을 찾아 놀면서「사제곡(莎堤曲)」과「누항사(陋巷詞)」를 지었고, 이듬해 3월에는 안동의 도산 서원을 참배하고 퇴계 이황의 학문과 유풍을 흠모하였다. 광해군 11년(1619)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쫓아서 울산 초정에 가서는 시조를 짓기도 했으며, 옥산서원을 찾아가서「독락당(獨樂堂)」을 짓는 등 도의상교하며, 모현자성(慕賢自省)하는 가사를 남겼다. 인조 7년(1629) 69세 때에는 여헌 장현광을 찾아가 그를 좇아 노닐면서 시조 「입암 29곡」을 지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용양위호군이라는 우노(優老)의 벼슬과 함께 쌀과 고기를 하사 받았다. 인조 13년(1635)에는 가사 「영남가」를 지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 75세였다. 그 이듬해에는 가사 「노계가」와 시조 「오륜가」 25수를 지었으며 그 밖의 한시문과 국문 시조들도 거의 이 무렵에 지어졌다. 현전하는 작품으로 9편의 가사와 67수의 시조가 있으니 선가자(善歌者)로 칭송될 만하였다. 그의 작품은 한결같이 반낭만적이며 반여성적인 것으로 남성적이며 사실적인 웅건미를 지니고 있다. 이상보, 『17C 가사전집』, 교학연구사, 1987, 21p
Ⅲ. 노계 사상
노계의 사상은 <노계집> 1권에 있는 ‘안분금’을 보면 노계의 편모(片貌)와 사상을 엿볼 수 있으니, 이를 참고로 하여 그의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안분금’은 작품 속에서 그가 자신의 처음 호인「무하옹(無何翁)」이라고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가 만년에 노계곡의 산수를 좋아하여 자신의 호를 노계로 바꾼 때보다는 좀 앞서는 것 같다. ‘안분금’을 지었을 당시와 그 이후에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노계의 사상 내지 인생관의 대부분은 이 시 한편에서 잘 드러난다.
이 시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그의 사상을 비롯해서 생활태도, 취향, 소원 등이 잘 나타나 있는데 먼저 그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안빈낙도 사상
남과의 시비에는 조금이라도 연관되는 것조차 꺼리는 성격이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며 특히 그는 ‘희증부산정공연길(贈富山鄭公延吉)’이란 칠언절구 두수(二首)에서 “집안 살림은 비록 가난하나 덕만은 가난하지 않고 나무하고 고기 잡는 생애가 만족하니 저 부귀로 이 가난과 바꾸겠는가?”라고 말하며 아무런 욕심도 없음을 강조하는 것을 볼 때에는 그는 안빈낙도 사상을 추구함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누항사’는 노계가 한음에게 자기가 실제로 겪고 있는 어려운 사정을 여실하게 나타낸 것으로 노계의 안빈낙도 사상을 나타낸 대표적인 작품이다.
누항(陋巷) 누항(陋巷) : 누추한 곳
깁푼 곳의 초막(草幕)을 지어 두고,
풍조우석(風朝雨夕) 풍조우석(風朝雨夕) : 바람 부는 아침과 비 오는 저녁
에 석은 딥히 셥히 되야 석은 딥히 셥히 되야 : 썩은 짚이 땔감(섶)이 되어
,
셔 홉 밥 닷 홉 죽(粥) 셔 홉 밥 닷 홉 죽(粥) : 세 홉의 밥과 다석 홉의 죽. 곧, 초라한 음식
에 연기(煙氣)도 하도 할샤 하도 할샤 : 많기도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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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데인 숙냉(熟冷) 숙냉(熟冷) : 숙늉
애 뷘 배 뷘 배 : 텅빈 배. 고픈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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