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언
Ⅱ.자연에 대한 이해
1.존재론적 접근
1) 자연의 개념
2) 자연의 기원
2.인식론적 접근
1).형이상학적 방법
2).과학적 방법
3. 인간과의 관계
1) 자연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
2) 인간이 자연에게 하는 행동
Ⅲ. 슈타이너의 자연관
1. 존재론적 차원: 자연의 의미
2. 인식론적 차원: 자연인식의 방법
1) 이성의 제거
2) 감정 계발
3) 인지적 사고
3. 자연과 인간의 관계
Ⅳ. 성경적 이해와 비판
1. 자연의 피조성
1) 축복 받은 존재
2) 위임된 불완전한 존재
2.자연이해의 방법과 목적
1) 이성
2) 계시
3) 지속적인 하나님의 도우심
3. 인간과의 관계
1) 인간의 양면성
2) 인간의 창조적 사역
3) 인간의 청지기적 사명
Ⅴ. 결 론
<참고문헌>
Ⅱ.자연에 대한 이해
1.존재론적 접근
1) 자연의 개념
2) 자연의 기원
2.인식론적 접근
1).형이상학적 방법
2).과학적 방법
3. 인간과의 관계
1) 자연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
2) 인간이 자연에게 하는 행동
Ⅲ. 슈타이너의 자연관
1. 존재론적 차원: 자연의 의미
2. 인식론적 차원: 자연인식의 방법
1) 이성의 제거
2) 감정 계발
3) 인지적 사고
3. 자연과 인간의 관계
Ⅳ. 성경적 이해와 비판
1. 자연의 피조성
1) 축복 받은 존재
2) 위임된 불완전한 존재
2.자연이해의 방법과 목적
1) 이성
2) 계시
3) 지속적인 하나님의 도우심
3. 인간과의 관계
1) 인간의 양면성
2) 인간의 창조적 사역
3) 인간의 청지기적 사명
Ⅴ. 결 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행사가 다 형통하고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불완전성 죄성 때문에 자연은 원래의 모습을 잃어가는 것이다.
.2) 인간의 창조적 사역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역사에 함께 동참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의미하는 것 중의 하나가 창조력이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유에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창조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창조는 인간의 번영과 행복을 위함이 근본 목적이다. 자연은 인간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되어질 수 있다.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인간의 죄를 위해 동물은 희생 제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땅과 공중과 바다의 모든 것들은 사람을 두려워하리라고 하셨다(창9:2)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창조작업은 하나님이 개입되지 않으면 자연 억압으로 치달을 수 있다.
땅을 정복하라는 구절에서 세상 사람들은 자연 파괴의 원인을 기독교에 두고 있는데 정복이란 단어는 주도권을 행사하라(dominate)는 의미로 번역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대상은 동식물에 한정된다. 해와 달과 별은 언급하지 않으셨다. 온 우주가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지만 인간이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은 제한되어 있다. 인간이 자연에게 굴복하고 섬기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이 섬길 대상은 오직 창조주뿐이다.
정복의 의미는 폭압적이고 파괴적인 방법과는 거리가 멀다. 자연을 두려워하고 떨지 말고 자연을 숭배하지 말라는 의미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갈 때 담대한 마음이 필요했듯이 인간들도 자기보다 몸짐이 더 큰 짐승을 만났을 때 두렵지 않았을까? 천둥 벼락이 칠 때 무서운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인간도 자연 안에서 위협과 공포를 느낄 때 더 담대하게 맞설 지혜를 구했을 것이다. 자연의 초인간적이 현상에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을 섬김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창조의 작업은 결코 파괴의 작업이 아니다.
슈타이너는 자연을 재창조하려고 하지 않는다. 주어진 자연에서 인간과 같은 영적 동질성을 찾으려고만 한다.
3) 인간의 청지기적 사명
인간은 동시에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자연과 동일하다.
슈타이너는 유기농을 하지 않을 경우 초래될 식량부족을 불길한 어조로 경고하였지만 그의 예측은 빗나가고 말았다. 현재 지구상의 굶주림의 문제는 자연의 보호의 부재에 있지 않고 개발의 부재에 있다. 농작물이 과잉생산 되지만 부족간의 전쟁 등 기술과는 다른 요인으로 유통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기술이 발전된 지역에서는 과잉소비가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화학비료가 없었다면, 댐을 만들 만한 기술이나 자연 변형이 없었다면, 동물실험이 없었다면 굶주림이나 질병이 해결될 수 있을까?
자연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따라서 자연의 관리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해야 한다.
인간은 자연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인간은 다른 자연의 개체들과는 달리 자연을 보호하고 다스려야 한다. (조용훈.2004.269) 자연에 대한 착취도 금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조용훈.2004.270)
자신의 경작지에서 나온 수확물이라 하더라도 일부는 남겨두라고 한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재물을 분배하는 장치로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자연에 대한 권리를 획득할 수 없다는 위탁적 자연관을 엿볼 수 있다. 7년마다의 토지 안식년제도와 50년 만에 돌아오는 희년의 규례들을 상고한다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권리가 제한되며 또한 의무가 따른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이 복 주시고 보시고 좋아한 자연을 인간이 훼손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나님이 여섯째 날에는 ‘매우’ 좋아하셨는데 인간을 인하여서가 아니라 인간이 천지만물과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자연의 파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다. 기독교인으로서는 더욱 책임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땅이 인간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는 사건은 아담의 범죄와(창3:18) 가인의 범죄(창4:11-12), 노아시대의 범죄(창6:13)에서 볼 수 있다. 레위기에서도 인간으로 인한 땅의 타락을 말하고 있다.(레18:25)
포악한 자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창6:13) 하시는 하나님은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네가 밭을 갈아도 효력을 네게 주지 않고 너는 땅에서 피하며 방황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아담에게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냉정하게 말하신다. 지구가 생명력을 잃고 생산을 멈추는 것이니 땅이 자기 모습을 잃는 것이다.
그러나 땅이 받는 저주는 결국 인간에게 내리는 벌이나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수고하고 가꾸어도 보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땅이 더 이상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듯이 땅도 인간을 배반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범죄 이후 갈등과 긴장의 국면으로 바꾸어졌듯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동일한 관계로 변질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은 하나님에게 주도권이 있다. 인간과 자연의 왜곡된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주도권을 가지고 자연을 관리해야 한다. 자연관리의 원칙은 무엇인가? 인간의 유익을 위함도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도 인간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자연이 생명력을 회복하는 계기가 된다.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로 땅이 인간을 거역한 사실을 기억한다면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땅의 저주가 풀려 땅은 인간의 뜻대로 생명력을 회복할 것이다.
땅은 인간의 근본이나 숭배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인간은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아야 한다.’(창3:19) 인간은 땅에서 취하여졌으나 대지를 위해 춤추거나 음악을 바치거나 꽂을 바치지 않는다. 오히려 땅을 경작하여 필요로 하는 식물을 취하는 도구로 삼을 뿐이다. 땅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면 땅은 더 이상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땅은 더 이상 사람들이 자신을 이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거역하며 종국에는
.2) 인간의 창조적 사역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역사에 함께 동참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의미하는 것 중의 하나가 창조력이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유에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창조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창조는 인간의 번영과 행복을 위함이 근본 목적이다. 자연은 인간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되어질 수 있다.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인간의 죄를 위해 동물은 희생 제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땅과 공중과 바다의 모든 것들은 사람을 두려워하리라고 하셨다(창9:2)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창조작업은 하나님이 개입되지 않으면 자연 억압으로 치달을 수 있다.
땅을 정복하라는 구절에서 세상 사람들은 자연 파괴의 원인을 기독교에 두고 있는데 정복이란 단어는 주도권을 행사하라(dominate)는 의미로 번역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대상은 동식물에 한정된다. 해와 달과 별은 언급하지 않으셨다. 온 우주가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지만 인간이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은 제한되어 있다. 인간이 자연에게 굴복하고 섬기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이 섬길 대상은 오직 창조주뿐이다.
정복의 의미는 폭압적이고 파괴적인 방법과는 거리가 멀다. 자연을 두려워하고 떨지 말고 자연을 숭배하지 말라는 의미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갈 때 담대한 마음이 필요했듯이 인간들도 자기보다 몸짐이 더 큰 짐승을 만났을 때 두렵지 않았을까? 천둥 벼락이 칠 때 무서운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인간도 자연 안에서 위협과 공포를 느낄 때 더 담대하게 맞설 지혜를 구했을 것이다. 자연의 초인간적이 현상에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을 섬김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창조의 작업은 결코 파괴의 작업이 아니다.
슈타이너는 자연을 재창조하려고 하지 않는다. 주어진 자연에서 인간과 같은 영적 동질성을 찾으려고만 한다.
3) 인간의 청지기적 사명
인간은 동시에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자연과 동일하다.
슈타이너는 유기농을 하지 않을 경우 초래될 식량부족을 불길한 어조로 경고하였지만 그의 예측은 빗나가고 말았다. 현재 지구상의 굶주림의 문제는 자연의 보호의 부재에 있지 않고 개발의 부재에 있다. 농작물이 과잉생산 되지만 부족간의 전쟁 등 기술과는 다른 요인으로 유통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기술이 발전된 지역에서는 과잉소비가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화학비료가 없었다면, 댐을 만들 만한 기술이나 자연 변형이 없었다면, 동물실험이 없었다면 굶주림이나 질병이 해결될 수 있을까?
자연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따라서 자연의 관리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해야 한다.
인간은 자연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인간은 다른 자연의 개체들과는 달리 자연을 보호하고 다스려야 한다. (조용훈.2004.269) 자연에 대한 착취도 금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조용훈.2004.270)
자신의 경작지에서 나온 수확물이라 하더라도 일부는 남겨두라고 한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재물을 분배하는 장치로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자연에 대한 권리를 획득할 수 없다는 위탁적 자연관을 엿볼 수 있다. 7년마다의 토지 안식년제도와 50년 만에 돌아오는 희년의 규례들을 상고한다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권리가 제한되며 또한 의무가 따른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이 복 주시고 보시고 좋아한 자연을 인간이 훼손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나님이 여섯째 날에는 ‘매우’ 좋아하셨는데 인간을 인하여서가 아니라 인간이 천지만물과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자연의 파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다. 기독교인으로서는 더욱 책임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땅이 인간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는 사건은 아담의 범죄와(창3:18) 가인의 범죄(창4:11-12), 노아시대의 범죄(창6:13)에서 볼 수 있다. 레위기에서도 인간으로 인한 땅의 타락을 말하고 있다.(레18:25)
포악한 자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창6:13) 하시는 하나님은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네가 밭을 갈아도 효력을 네게 주지 않고 너는 땅에서 피하며 방황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아담에게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냉정하게 말하신다. 지구가 생명력을 잃고 생산을 멈추는 것이니 땅이 자기 모습을 잃는 것이다.
그러나 땅이 받는 저주는 결국 인간에게 내리는 벌이나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수고하고 가꾸어도 보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땅이 더 이상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듯이 땅도 인간을 배반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범죄 이후 갈등과 긴장의 국면으로 바꾸어졌듯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동일한 관계로 변질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은 하나님에게 주도권이 있다. 인간과 자연의 왜곡된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주도권을 가지고 자연을 관리해야 한다. 자연관리의 원칙은 무엇인가? 인간의 유익을 위함도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도 인간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자연이 생명력을 회복하는 계기가 된다.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로 땅이 인간을 거역한 사실을 기억한다면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땅의 저주가 풀려 땅은 인간의 뜻대로 생명력을 회복할 것이다.
땅은 인간의 근본이나 숭배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인간은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아야 한다.’(창3:19) 인간은 땅에서 취하여졌으나 대지를 위해 춤추거나 음악을 바치거나 꽂을 바치지 않는다. 오히려 땅을 경작하여 필요로 하는 식물을 취하는 도구로 삼을 뿐이다. 땅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면 땅은 더 이상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땅은 더 이상 사람들이 자신을 이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거역하며 종국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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