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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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지하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여는말
1. 들어가며
2. 연구사적 개관

Ⅱ. 본론
1. 김지하 연보
2. 생애 짚어가기
3. 김지하의 시세계

Ⅲ. 닫는말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잘하며 기운 세고 유사시 반항적인 그런 종자들.” 「모로 누운 돌부처」, 나남출판사, 1993년, 21쪽
의 기질을 지니고 있었노라고 자랑스럽게 진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는 증조부에게서 전형적인 ‘우투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의 증조부는 동학농민전쟁 직전 암태도 대지주와의 싸움 끝에 김제로 솔가하여 동학에 입도했다고 하는데, 김지하는 이 증조부를 ‘우리 집안 자랑’이며 그를 생각할 때마다 ‘피가 더워진다’고 적고 있다. 이런 진술로부터 유추컨대 깁지하는 이 증조부야말로 그의 ‘입도조’ 이래로 전해져 내려온 ‘우투리의 핏줄’ 가운데서도 유독 우뚝한 인물이며 자신이 바로 그 우투리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는 자신의 핏줄이 부과한 운명, 즉 불의와 굴욕을 참지 못하는 유전적 기질을 충실히 따르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칫하면 한갓 개인적인 일탈행위로 그쳐버릴 수도 있었을 이런 반항적인 기질이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만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4.19의 경험 때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19를 통해 각성된 의식을 갖게 됨으로써 그는 이후 60년대 초에 벌어진 한일회담 반대 학생시위 이래로 70년대 전 기간에 걸쳐 반독재, 반유신의 정치적 저항의 선봉에 선 진정한 의미의 ‘우투리’로 거듭나게 되기 때문이다.
2.2 해방 직후부터 6.25까지의 경험
김지하가 근대 민중사에 눈을 뜨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원주로 이주하기 전까지 고향 목포에서 겪은 체험, 그 가운데서도 해방 직후부터 6.25까지의 유년기 체험이라고 보인다. 특히 해방 직후부터 6.25에 이르기까지 그의 고향이자 생장지인 남도를 휩쓴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의 모습은 그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가 그의 시 속에 표출된다.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격류에 휩쓸려 아무 죄도 없이, 그러나 가장 참혹한 형태로 죽어간 민중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 때 민중들의 죽음이 한 개인의 우연한 죽음이 아니라 역사의 폭력에 의한 집단적인 죽음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 죽음을 껴안는 것, 다시 말해서 이 죽음의 역사를 자기 삶의 일부로 껴안는데서 그의 시는 출발된다.
2.3 20여년의 수배와 도피, 투옥
주로 해방 직후부터 6.25무렵까지에 걸친 유소년기 체험을 통해서 민중들의 고난에 찬 역사를 자각하는 데서 시작된 그의 시는 이내 개발의 시대와 조우하게 되면서 폭력적인 개발의 물결에 휩쓸린 민중들의 고통과 분노를 그려내는 쪽으로 변모된다. 그의 시는 당장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 - 5.16을 시발점으로 하여 본격화된 개발의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 민중들의 고난과 고통- 을 천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한일회담 반대 학생 시위 이후 20여년 가까이 이어진 수배와 도피와 투옥의 경험은 한편으로는 개발을 주도하는 지배계급의 폭력성과 억압성에 대한 저항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단련시키는 계기가 된다.
민중의 희생과 고통을 담보로 하여 개발을 주도하면서 개발의 이익을 독점한 세력에 대한 신랄한 야유, 풍자, 조롱으로 특징지워지는 김지하의 담시는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4 감옥에서의 경험
1979년 39세, 감옥 생활 5년째에 접어든 김지하는 불교와 동학 관련 서적 등을 다시 읽기 시작하고, 테야르 드 샤르댕의 책에 심취한다. 그리고 백일동안 좌정과 수행참선을 통해 인간 내면의 본질을 체득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의 시멘트 틈새에서 개가죽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장면을 목격하고 ‘생명사상’에 대한 다각적이고 종합적인 고민과 기존의 투쟁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전환, 즉 생명적 패러다임으로의 중심이동을 시작하게 된다. 오랜 감옥 생활 끝에 다시 시정의 삶으로 돌아온 김지하는 어느새 강인한 민주투사에서 생명의 전도사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김지하의 귀환은 이른바 ‘김지하 현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중적인 관심과 인기를 불러냈다. 그러나 민주투사 김지하의 신화가 부활되기를 기대했던 한편에서는 이 시기에 발표된 여러 종류의 글들에서 김지하의 사상적 변모를 읽어내고 그를 자못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의구심은 급기야 90년대 초에 전개된 일련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김지하의 발언 때문에 급격히 증폭되었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의 행위는 민주화 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왔고, 급기야 그의 후배들에게 민주화 운동의 배신자로 매도되는, 70년대와는 또 다른 필화 사태를 겪는 일까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세간의 엇갈리는 평가와는 상관없이 그는 꾸준히 생명사상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한다.
3. 김지하의 시세계
3.1. 초기 서정시
김지하의 시세계를 크게 4영역으로 나누어보면, 첫째 초기 서정시로, 현실에 대한 강렬한 부정과 민주주의 정신에 따른 1960~70년대의 메마른 현실을 반역적 감수성으로 노래한 시집 〈황토〉(1970)와 〈타는 목마름으로〉(1982)가 이에 속한다.
3.1.1.『황토』, 대결구조와 반역의 정신
시집 『황토』에 전반적으로 관류하고 있는 것은 비관적인 현실인식이며 부정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대학생활이 4 19혁명의 불길과 더불어 타오르기 시작했으며 뒤이은 5 16군사쿠데타로 인해 깊은 좌절을 맛보게 됐다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비관적인 현실인식과 함께 비판적이면서도 부정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땅의 오랜 수난의 역사와 그 속에서의 한스런 삶이 그 기저로서 작용했음은 물론일 것이다.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니파리
뻗시디 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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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10.13
  • 저작시기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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