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서론 1
II. 본론 1
1. 백석의 생애 1
1.1 백석 연보 1
1.2 생애 특징 2
2. 문학세계 5
2.1 초기 문학 세계(1930~1936) 6
2.2 백석의 중기 문학 세계(1936~재북이전) 12
2.3 백석의 후기 문학세계(재북~1961) 17
III. 「定州城」분석 25
IV. 결론 27
II. 본론 1
1. 백석의 생애 1
1.1 백석 연보 1
1.2 생애 특징 2
2. 문학세계 5
2.1 초기 문학 세계(1930~1936) 6
2.2 백석의 중기 문학 세계(1936~재북이전) 12
2.3 백석의 후기 문학세계(재북~1961) 17
III. 「定州城」분석 25
IV. 결론 27
본문내용
입사 : 《여성》지 편집일 담당
서울로 다시 돌아온 이유를 분명히 찾아내기는 어렵다. 외적으로 보면 1930년대 말이란 일제의 군국주의적 폭력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던 때이고, 그런 폭력은 백석이 근무하던 함흥 영생고보에도 노골적으로 가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내적인 이유는 서울에 머물고 있는 그의 애인 김자야가 그리웠고 그와 함께 지내고 싶었다는 점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만주로 떠남
김자야의 말에 의하면 백석이 서울을 떠나 만주로 간 것은 그가 부모의 강권에 의하여 이 해에 두 번째 결혼을 치르는 등 복잡한 가정사와 봉건적인 관습 등으로 심각한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약하다고 할 수 있고 이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겠다.
백석은 만주로 떠난 뒤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국내에서 발행된 당시의 문학지 《문장》이나《인문평론》등에 「북방에서」, 「힌 바람벽이 있어」등의 시를 발표하였고, 《조광》지나 《야담》지 같은 데는 러시아 작가의 소설을 번역하여 수록하기도 했다. 거처만 서울에서 만주로 바꾸었을 뿐 국내문단과 관계를 갖고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백석 작품에는 북방의 서늘한 분위기와 뿌리를 잃은 당대 지식인의 우울한 내면세계가 담겨 있으며 백석의 작품 중 절창이라고 불리는 몇몇 작품이 들어 있다. 이 점은 백석이 이곳에서 어느 대보다도 내외적으로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점을 반증해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백석은 측량사 노릇과 관청 일을 하였는데 이는 1941년 4월, 《조광》지를 통하여 발표한 시작품 「귀농」을 통하여 잘 드러난다.
식민시대의 지식인으로, 조국과 고향을 떠난 유랑객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만 하는 봉건 유습의 피해자로, 적성에 맞지 않는 생활인으로, 그야말로 쓸쓸하고 외롭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음이 여실이 드러난다. 그 예로 「힌 바람벽에 있어」, 「북방에서」, 「두보와 이백같이」 등이 있다.
해방 후 : 고향 정주로 돌아감.
해방 후에 백석은 신의주에 잠시 머물다가 고향 정주로 돌아간다. 이렇게 백석이 해방후에 북한에 잔류한 이유는 대체로 당대 지식인들이 일반적으로 좌익 쪽에 기울어져 있던 해방기의 문단 상황이 그로 하여금 북한에 거주하게 만든 하나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을지 모른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송준은 그가 편집한 『백석시전집』의끝부분에 백석의 생애를 약술한 내용 중 \"북쪽에 본의 아니게 잔류한 그는 최소한 수천년의 역사에 길이 남을 그의 시적 명성에 걸맞게 북쪽 정권에 아부하지 않고 아동문학과 번역문학에 힘써 생의 후반기의 마지막 시련인 함정에 빠지지 않은 지혜롭고 훌륭한 세계 최고의 시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그가 북쪽에 \'본의 아니게 잔류\'한 것 같지는 않고 또 북쪽 정권에 아부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지켰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정효구와 김재용은 백석이 월남하지 않고 북쪽에 남은 것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으리라는 조심스러운 추정을 제시한 바 있으며, 그것은 그가 북쪽에서 발표한 작품들이 조선인문공화국의 이념을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숭원,2002) 본 고에서는 정효구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다.
그리고《조선문학》지에 여러 작품 발표한다. 특히 북한에서 아동문학에 상당히 큰 관심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백석은 해방 후 약 15년 동안은 북한에 살면서 그 체제에 동조하는 글을 썼다. 분단 이후 그의 문학 경향에 대해 북한에 체류하면서 북한 체제에 동조하는 글을 썼다고 보는 시각과 북한 정권에 아부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지켰다는 시각, 북한의 도식주의에 대해 비판하다가 실수로 내몰린 후 공동체에 대한 지향을 시로 표현한 점을 중시하여 북한에서의 문학 활동도 자신이 지향했던 세계 속에서의 변모로 파악하는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 이것은 북한에서 발표한 그의 작품을 충실히 검토함으로서 올바른 해법이 얻어질 것이로 보인다.(이숭원, 2002)
문학세계 정효구 편저, 『한국현대시인연구 14』, 문학세계사, 1996
초기 문학 세계(1930~1936)
토속적인 서민정신
백석은 자신의 삶에서 토대를 이루고 동시에 체질처럼 내면화된 원체험의 세계를 정직하고도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서 드러내었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 개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이 문명의 세례를 받지 않은 토속적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기본정신을 한마디로 토속적인 서민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첫째, 이 인물들은 잘나고 높은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서민적인 필부필남이라는 사실, 둘째, 그 인물들의 터전 혹은 배경이 농촌이나 산골이라는 점, 셋째, 그 인물들의 성격이 한결같이 순박하다는 사실, 넷째, 작품 속에 사용된 말들이 정주지역의 지방어면서 동시에 서민층의 언어라는 점 등이 이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이 점을 잘드러내주는 백석의 대표작에 「여우난곬족」을 들 수 있다.
여우난골족(族)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적거리는 하루
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
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
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려(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엄매 사춘누
이 사춘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서울로 다시 돌아온 이유를 분명히 찾아내기는 어렵다. 외적으로 보면 1930년대 말이란 일제의 군국주의적 폭력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던 때이고, 그런 폭력은 백석이 근무하던 함흥 영생고보에도 노골적으로 가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내적인 이유는 서울에 머물고 있는 그의 애인 김자야가 그리웠고 그와 함께 지내고 싶었다는 점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만주로 떠남
김자야의 말에 의하면 백석이 서울을 떠나 만주로 간 것은 그가 부모의 강권에 의하여 이 해에 두 번째 결혼을 치르는 등 복잡한 가정사와 봉건적인 관습 등으로 심각한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약하다고 할 수 있고 이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겠다.
백석은 만주로 떠난 뒤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국내에서 발행된 당시의 문학지 《문장》이나《인문평론》등에 「북방에서」, 「힌 바람벽이 있어」등의 시를 발표하였고, 《조광》지나 《야담》지 같은 데는 러시아 작가의 소설을 번역하여 수록하기도 했다. 거처만 서울에서 만주로 바꾸었을 뿐 국내문단과 관계를 갖고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백석 작품에는 북방의 서늘한 분위기와 뿌리를 잃은 당대 지식인의 우울한 내면세계가 담겨 있으며 백석의 작품 중 절창이라고 불리는 몇몇 작품이 들어 있다. 이 점은 백석이 이곳에서 어느 대보다도 내외적으로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점을 반증해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백석은 측량사 노릇과 관청 일을 하였는데 이는 1941년 4월, 《조광》지를 통하여 발표한 시작품 「귀농」을 통하여 잘 드러난다.
식민시대의 지식인으로, 조국과 고향을 떠난 유랑객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만 하는 봉건 유습의 피해자로, 적성에 맞지 않는 생활인으로, 그야말로 쓸쓸하고 외롭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음이 여실이 드러난다. 그 예로 「힌 바람벽에 있어」, 「북방에서」, 「두보와 이백같이」 등이 있다.
해방 후 : 고향 정주로 돌아감.
해방 후에 백석은 신의주에 잠시 머물다가 고향 정주로 돌아간다. 이렇게 백석이 해방후에 북한에 잔류한 이유는 대체로 당대 지식인들이 일반적으로 좌익 쪽에 기울어져 있던 해방기의 문단 상황이 그로 하여금 북한에 거주하게 만든 하나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을지 모른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송준은 그가 편집한 『백석시전집』의끝부분에 백석의 생애를 약술한 내용 중 \"북쪽에 본의 아니게 잔류한 그는 최소한 수천년의 역사에 길이 남을 그의 시적 명성에 걸맞게 북쪽 정권에 아부하지 않고 아동문학과 번역문학에 힘써 생의 후반기의 마지막 시련인 함정에 빠지지 않은 지혜롭고 훌륭한 세계 최고의 시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그가 북쪽에 \'본의 아니게 잔류\'한 것 같지는 않고 또 북쪽 정권에 아부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지켰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정효구와 김재용은 백석이 월남하지 않고 북쪽에 남은 것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으리라는 조심스러운 추정을 제시한 바 있으며, 그것은 그가 북쪽에서 발표한 작품들이 조선인문공화국의 이념을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숭원,2002) 본 고에서는 정효구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다.
그리고《조선문학》지에 여러 작품 발표한다. 특히 북한에서 아동문학에 상당히 큰 관심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백석은 해방 후 약 15년 동안은 북한에 살면서 그 체제에 동조하는 글을 썼다. 분단 이후 그의 문학 경향에 대해 북한에 체류하면서 북한 체제에 동조하는 글을 썼다고 보는 시각과 북한 정권에 아부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지켰다는 시각, 북한의 도식주의에 대해 비판하다가 실수로 내몰린 후 공동체에 대한 지향을 시로 표현한 점을 중시하여 북한에서의 문학 활동도 자신이 지향했던 세계 속에서의 변모로 파악하는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 이것은 북한에서 발표한 그의 작품을 충실히 검토함으로서 올바른 해법이 얻어질 것이로 보인다.(이숭원, 2002)
문학세계 정효구 편저, 『한국현대시인연구 14』, 문학세계사, 1996
초기 문학 세계(1930~1936)
토속적인 서민정신
백석은 자신의 삶에서 토대를 이루고 동시에 체질처럼 내면화된 원체험의 세계를 정직하고도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서 드러내었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 개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이 문명의 세례를 받지 않은 토속적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기본정신을 한마디로 토속적인 서민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첫째, 이 인물들은 잘나고 높은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서민적인 필부필남이라는 사실, 둘째, 그 인물들의 터전 혹은 배경이 농촌이나 산골이라는 점, 셋째, 그 인물들의 성격이 한결같이 순박하다는 사실, 넷째, 작품 속에 사용된 말들이 정주지역의 지방어면서 동시에 서민층의 언어라는 점 등이 이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이 점을 잘드러내주는 백석의 대표작에 「여우난곬족」을 들 수 있다.
여우난골족(族)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적거리는 하루
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
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
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려(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엄매 사춘누
이 사춘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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