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서론
Ⅱ.본론
1. 생애
1.1 작가연보
1.2. 생애특징
2.문학세계
2.1.문학적 변모
2.3. 문학적 특징
Ⅲ.결론
Ⅱ.본론
1. 생애
1.1 작가연보
1.2. 생애특징
2.문학세계
2.1.문학적 변모
2.3. 문학적 특징
Ⅲ.결론
본문내용
윤동주론
- 목 차 -
Ⅰ.서론
Ⅱ.본론
1. 생애
1.1 작가연보
1.2. 생애특징
2.문학세계
2.1.문학적 변모
2.3. 문학적 특징
Ⅲ.결론
Ⅰ.서론
시인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에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 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고민하는 철인이었으며, 그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얼마 되지 않는 시 속에 반영되어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일제 저항 시인 윤동주에 대해서 한번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우선 윤동주의 생애를 한번 살펴보고, 그 다음 그의 문학세계,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Ⅰ.본론
윤동주생애
1917년
(1세)
12월 30일(음력 11월 17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본관이 파평(坡平)인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2)과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자인 규암 김약연(金躍淵)의 누이 김 용(金龍, 1891~1948)의 장남으로 태어났다(호적을 비롯한 각종 기록에는 그의 출생 연도가 ‘1918년’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출생 신고를 1년 늦게 했기 때문이다.
윤동주 집안은 1886년 증조부 윤재옥(尹在玉) 때에 함경북도 종성(種城)에서 북간도의 자동(子洞, 도는 紫洞)으로 이주, 1900년 조부 윤하현(尹夏鉉, 1875~1948) 대에는 북간도의 명동촌으로 옮겨 와 살았는데 소지주로서 비교적 넉넉한 생황을 했다. 윤동주가 태어난 명동촌은 외삼촌 김약연 선생이 일찍이 이주해 들어와 개척한 지역으로, 교육과 종교, 독립운동의 신문화 운동이 다른 어느 것보다도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1910년에는 조부 윤하현이 기독교 장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여 입교했고 윤동주가 태어날 무렵에는 장로직을 맡게 되었다. 억분에 윤동주는 태어나자마자 유아 세례를 받았다.
부친 윤영석은 1895년 음력 6월 12일 출생하여 명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김약연의 주선으로 북경에 유학 갔다가 돌아와 윤동주가 태어날 무렵에는 명동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1923년 9월, 윤동주가 7세 되던 때는 도쿄 유학중이었다.
그해 12월엔 윤동주의 누이동생 혜원(惠媛)이 태어났다.
‘윤동주’는 본명이고 아명은 ‘해환(海煥)’으로 태양을 가리키는 우리말의 ‘해’에 빛날 ‘환(煥)’자를 붙인 것이다. 뒤에 《카톨릭 소년》지에 동요를 발표할 때 ‘동주(童柱)’라는 필명을 쓴 적이 있다.
윤동주는 3남 1녀 중 장남으로 누이 윤혜원(尹蕙媛)과 동생 윤일주(尹一柱, 전 성균관대 교수 작고), 윤광주(尹光柱)가 있다.
1925년
(9세)
4월 4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에 있는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명동소학교는 김약연이 설립하여 경영하던 규암서숙(圭巖書熟)을 나중에 민족주의 교육을 시행하는 학교로 발전시켜 운영하던 학교로, 원래 소학교와 중학교가 있었지만 중학교는 폐교되고 윤동주가 학교를 다닐 당시에는 소학교만 남아 있었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에서 조선 역사와 민족주의 및 독립 사상에 대해서 배우고 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에는 태극기를 걸고 애국가를 부르며 애국심을 고양시켰다. 그것은 학업 성적에도 영향을 끼쳐 연희전문 1학년 때 한 학기밖에 없었던 조선어(2학기 때부터는 일제의 압력으로 조선어가 폐지됨)가 재학 4년을 통틀어 100점 만점을 받은 유일한 과목이 되었다.
당시 윤동주와 함께 명동소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로는 후쿠오카에서 옥사한 고종 사촌인 송몽규(宋夢奎)와 문익환(文益煥, 시인 목사), 외사촌 김정우(金禎宇, 시인 숭실교 교사)등이 있다.
1927년
(11세)
12월, 동생 일주가 태어났다.
1928년
(12세)
명동소학교 4학년 재학 시절에 송몽규와 함께 《어린이》, 《아이생활》 등의 잡지를 정기적으로 구독했는데 두 사람이 다 읽고 나면 동리 아이들이 돌아가며 읽었다. 그 외에 연극 활동을 통해 윤동주는 문학적 재질을 키워 나갔다. 이즈음 명동에는 공산주의 사상이 만연했다.
1929년
(13세)
송몽규 등과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 문예지를 간행, 동요 동시 등을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소질을 보였다. 4월에 명동소학교가 ‘교회학교’ 형태에서 ‘인민학교’형태로 바뀌었고, 9월에는 중국 행정 당국에 의해 공립 학교로 인가받았다.
외삼촌인 김약연은 평양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
(14세)
신학교에서 1년 간 수학한 김약연이 명동교회에 목사로 부임했고, 명동에서는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는 테러가 만연했다.
1931년
(15세)
3월 25일, 명동소학교에서는 졸업생 14명에게 김동환(金東煥)의 시집 《국경의 밤》을 졸업 선물로 주었다.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중국인 관립 학교인 대랍자 학교 6학년에 편입해 1년 동안 공부했다.
1932년
(16세)
4월, 용정에 위치한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미션스쿨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부친 윤영석은 윤동주의 통학을 위해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간도성 용정가(龍井街)로 이사했다.
은진중학 재학 시절 윤동주는 친구들과 함께 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 선수로도 활약했고, 〈땀 한 방울〉이라는 제목으로 교내 웅변 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다양한 황동을 펼쳤다. 여기서 윤동주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동양사와 국사 한문을 가르치던 명희조(明羲朝) 선생으로 그에게 독립 사상과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1933년
(17세)
4월, 동생 광주가 태어났다.
1934년
(18세)
12월 24일, <
- 목 차 -
Ⅰ.서론
Ⅱ.본론
1. 생애
1.1 작가연보
1.2. 생애특징
2.문학세계
2.1.문학적 변모
2.3. 문학적 특징
Ⅲ.결론
Ⅰ.서론
시인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에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 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고민하는 철인이었으며, 그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얼마 되지 않는 시 속에 반영되어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일제 저항 시인 윤동주에 대해서 한번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우선 윤동주의 생애를 한번 살펴보고, 그 다음 그의 문학세계,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Ⅰ.본론
윤동주생애
1917년
(1세)
12월 30일(음력 11월 17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본관이 파평(坡平)인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2)과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자인 규암 김약연(金躍淵)의 누이 김 용(金龍, 1891~1948)의 장남으로 태어났다(호적을 비롯한 각종 기록에는 그의 출생 연도가 ‘1918년’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출생 신고를 1년 늦게 했기 때문이다.
윤동주 집안은 1886년 증조부 윤재옥(尹在玉) 때에 함경북도 종성(種城)에서 북간도의 자동(子洞, 도는 紫洞)으로 이주, 1900년 조부 윤하현(尹夏鉉, 1875~1948) 대에는 북간도의 명동촌으로 옮겨 와 살았는데 소지주로서 비교적 넉넉한 생황을 했다. 윤동주가 태어난 명동촌은 외삼촌 김약연 선생이 일찍이 이주해 들어와 개척한 지역으로, 교육과 종교, 독립운동의 신문화 운동이 다른 어느 것보다도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1910년에는 조부 윤하현이 기독교 장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여 입교했고 윤동주가 태어날 무렵에는 장로직을 맡게 되었다. 억분에 윤동주는 태어나자마자 유아 세례를 받았다.
부친 윤영석은 1895년 음력 6월 12일 출생하여 명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김약연의 주선으로 북경에 유학 갔다가 돌아와 윤동주가 태어날 무렵에는 명동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1923년 9월, 윤동주가 7세 되던 때는 도쿄 유학중이었다.
그해 12월엔 윤동주의 누이동생 혜원(惠媛)이 태어났다.
‘윤동주’는 본명이고 아명은 ‘해환(海煥)’으로 태양을 가리키는 우리말의 ‘해’에 빛날 ‘환(煥)’자를 붙인 것이다. 뒤에 《카톨릭 소년》지에 동요를 발표할 때 ‘동주(童柱)’라는 필명을 쓴 적이 있다.
윤동주는 3남 1녀 중 장남으로 누이 윤혜원(尹蕙媛)과 동생 윤일주(尹一柱, 전 성균관대 교수 작고), 윤광주(尹光柱)가 있다.
1925년
(9세)
4월 4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에 있는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명동소학교는 김약연이 설립하여 경영하던 규암서숙(圭巖書熟)을 나중에 민족주의 교육을 시행하는 학교로 발전시켜 운영하던 학교로, 원래 소학교와 중학교가 있었지만 중학교는 폐교되고 윤동주가 학교를 다닐 당시에는 소학교만 남아 있었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에서 조선 역사와 민족주의 및 독립 사상에 대해서 배우고 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에는 태극기를 걸고 애국가를 부르며 애국심을 고양시켰다. 그것은 학업 성적에도 영향을 끼쳐 연희전문 1학년 때 한 학기밖에 없었던 조선어(2학기 때부터는 일제의 압력으로 조선어가 폐지됨)가 재학 4년을 통틀어 100점 만점을 받은 유일한 과목이 되었다.
당시 윤동주와 함께 명동소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로는 후쿠오카에서 옥사한 고종 사촌인 송몽규(宋夢奎)와 문익환(文益煥, 시인 목사), 외사촌 김정우(金禎宇, 시인 숭실교 교사)등이 있다.
1927년
(11세)
12월, 동생 일주가 태어났다.
1928년
(12세)
명동소학교 4학년 재학 시절에 송몽규와 함께 《어린이》, 《아이생활》 등의 잡지를 정기적으로 구독했는데 두 사람이 다 읽고 나면 동리 아이들이 돌아가며 읽었다. 그 외에 연극 활동을 통해 윤동주는 문학적 재질을 키워 나갔다. 이즈음 명동에는 공산주의 사상이 만연했다.
1929년
(13세)
송몽규 등과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 문예지를 간행, 동요 동시 등을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소질을 보였다. 4월에 명동소학교가 ‘교회학교’ 형태에서 ‘인민학교’형태로 바뀌었고, 9월에는 중국 행정 당국에 의해 공립 학교로 인가받았다.
외삼촌인 김약연은 평양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
(14세)
신학교에서 1년 간 수학한 김약연이 명동교회에 목사로 부임했고, 명동에서는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는 테러가 만연했다.
1931년
(15세)
3월 25일, 명동소학교에서는 졸업생 14명에게 김동환(金東煥)의 시집 《국경의 밤》을 졸업 선물로 주었다.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중국인 관립 학교인 대랍자 학교 6학년에 편입해 1년 동안 공부했다.
1932년
(16세)
4월, 용정에 위치한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미션스쿨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부친 윤영석은 윤동주의 통학을 위해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간도성 용정가(龍井街)로 이사했다.
은진중학 재학 시절 윤동주는 친구들과 함께 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 선수로도 활약했고, 〈땀 한 방울〉이라는 제목으로 교내 웅변 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다양한 황동을 펼쳤다. 여기서 윤동주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동양사와 국사 한문을 가르치던 명희조(明羲朝) 선생으로 그에게 독립 사상과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1933년
(17세)
4월, 동생 광주가 태어났다.
1934년
(18세)
12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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