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점과 공통점
다른 예술 분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문학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을 논의하는 데 앞서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모더니즘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일이다. 18세기의 신고전주의에 대한 논의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고전주의를, 리얼리즘에 대한 논의가 19세기 초엽의 낭만주의를, 그리고 모더니즘에 대한 논의가 19세기 중엽의 리얼리즘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는 모더니즘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많은 이론가들은 이 점을 간과할 채 모더니즘을 충분히 논의하기도 전에 성급하게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만 급급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외국의 이론이 마치 뉴욕이나 파리의 유행 의상처럼 무분별하게 수용되기 일쑤인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이론가들의 태도는 땅을 굳게 다지기도 전에 성급하게 그 위에 집을 짓는 행위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과 본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칫 모더니즘의 그것마저도 환원법적으로 그릇되게 파악할 위험이 있다.
지금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맺고 있는 관계는 흔히 포스트구조주의 구조주의와 맺고 있는 관계에 비유되어 왔다. 이 이론에 따르면 모더니즘은 구조주의에,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구조주의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이 경우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는 어디까지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이라는 옷으로 변장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때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관계는 마술사의 개념인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사이의 관련성과 유사하다는 관점에서 논의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경제사의 개념인 산업 사회와 후기 산업 사회의 그것과 거의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겉에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간의 관계는 실제로는 지극히 복잡하고 미묘하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는 데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왜녀 하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련성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위상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마치 수학 방정식과 같아서 모더니즘이라는 함수에 따라 포스트모더니즘의 값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이다. 사실상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과 본질을 캐는 비결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맺고 있는 관계를 올바르게 규명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더욱이 이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모더니즘의 개념과 성격을 규명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관계를 논의하는 데서 이론가들의 입장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그 중의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가깝게는 모더니즘, 넓게는 낭만주의의 계승이나 논리적 발전으로 파악하려는 입장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디까지나 모더니즘이나 낭만주의와 동일한 선 위에 위치하며, 따라서 모더니즘이나 낭만주의와 그렇게 변별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을 펴는 이론가들의 관점에서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휙 현상이나 그것보다 한결 더 극단적으로 발전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흔히 ‘후기 모더니즘’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되어 온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미국의 네오리얼리즘 이론가 제럴드 그래프는 이러한 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파악해 온 가장 대표적인 이론가 중 한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이제까지 서구 세계를 풍미해 온 문화적 전통과 예술적 인습은 몇몇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그렇게 쉽게 붕괴되지 않고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가깝게는 모더니즘, 멀게는 낭만주의의 전통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이 견지하는 입장과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이 두 운동의 기본 전제들을 논리적으로 발전시킨 극한점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일종의 ‘돌파구’로 파악하는 일부 이론가들의 태도를 가리켜 그가 ‘신화’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프의 이론은 미국의 사회학자 대니얼 벨한테서도 거의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다. 그 동안 ‘경제에서는 사회주의자, 정치에서는 자유주의자, 그리고 문화에서는 보수주의자’로 자처해 온 벨은, 이제는 고전이 되다시피 한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1976)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연속체로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디까지나 모더니즘을 논리적인 면에서 극한점으로 밀고 나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노먼 O. 브라운과 미셸 푸코의 이론적인 글에서 윌리엄 버러우스와 장 주네 그리고 최근 노먼 메일러의 소설에서, 그리고 지금 우리 주위 도처에 산재해 있는 포르노-팝 문화에서 우리는 모더니즘 의도의 극치를 발견하게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특히 벨은 현대 개신교의 윤리에 기초하고 있는 서구 자본주의를 붕괴시키는 데 모더니즘과 더불어 포스트모더니즘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이론가는 다름 아닌 프랭크 커모우드이다. 그는 『연속성』(1968)에서 아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 자체의 사용을 거부한다. 그는 모더니즘을 크게 ‘팰리오모더니즘’과 ‘네오모더니즘’의 두 유형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팰리오모더니즘’과 ‘네오모더니즘’이란 문자 그대로 각각 ‘구(舊) 모더니즘’과 ‘신(新) 모더니즘’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모더니즘의 역사적 발전에서 볼
다른 예술 분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문학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을 논의하는 데 앞서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모더니즘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일이다. 18세기의 신고전주의에 대한 논의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고전주의를, 리얼리즘에 대한 논의가 19세기 초엽의 낭만주의를, 그리고 모더니즘에 대한 논의가 19세기 중엽의 리얼리즘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는 모더니즘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많은 이론가들은 이 점을 간과할 채 모더니즘을 충분히 논의하기도 전에 성급하게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만 급급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외국의 이론이 마치 뉴욕이나 파리의 유행 의상처럼 무분별하게 수용되기 일쑤인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이론가들의 태도는 땅을 굳게 다지기도 전에 성급하게 그 위에 집을 짓는 행위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과 본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칫 모더니즘의 그것마저도 환원법적으로 그릇되게 파악할 위험이 있다.
지금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맺고 있는 관계는 흔히 포스트구조주의 구조주의와 맺고 있는 관계에 비유되어 왔다. 이 이론에 따르면 모더니즘은 구조주의에,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구조주의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이 경우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는 어디까지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이라는 옷으로 변장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때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관계는 마술사의 개념인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사이의 관련성과 유사하다는 관점에서 논의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경제사의 개념인 산업 사회와 후기 산업 사회의 그것과 거의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겉에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간의 관계는 실제로는 지극히 복잡하고 미묘하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는 데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왜녀 하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련성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위상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마치 수학 방정식과 같아서 모더니즘이라는 함수에 따라 포스트모더니즘의 값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이다. 사실상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과 본질을 캐는 비결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맺고 있는 관계를 올바르게 규명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더욱이 이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모더니즘의 개념과 성격을 규명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관계를 논의하는 데서 이론가들의 입장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그 중의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가깝게는 모더니즘, 넓게는 낭만주의의 계승이나 논리적 발전으로 파악하려는 입장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디까지나 모더니즘이나 낭만주의와 동일한 선 위에 위치하며, 따라서 모더니즘이나 낭만주의와 그렇게 변별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을 펴는 이론가들의 관점에서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휙 현상이나 그것보다 한결 더 극단적으로 발전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흔히 ‘후기 모더니즘’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되어 온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미국의 네오리얼리즘 이론가 제럴드 그래프는 이러한 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파악해 온 가장 대표적인 이론가 중 한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이제까지 서구 세계를 풍미해 온 문화적 전통과 예술적 인습은 몇몇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그렇게 쉽게 붕괴되지 않고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가깝게는 모더니즘, 멀게는 낭만주의의 전통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이 견지하는 입장과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이 두 운동의 기본 전제들을 논리적으로 발전시킨 극한점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일종의 ‘돌파구’로 파악하는 일부 이론가들의 태도를 가리켜 그가 ‘신화’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프의 이론은 미국의 사회학자 대니얼 벨한테서도 거의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다. 그 동안 ‘경제에서는 사회주의자, 정치에서는 자유주의자, 그리고 문화에서는 보수주의자’로 자처해 온 벨은, 이제는 고전이 되다시피 한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1976)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연속체로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디까지나 모더니즘을 논리적인 면에서 극한점으로 밀고 나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노먼 O. 브라운과 미셸 푸코의 이론적인 글에서 윌리엄 버러우스와 장 주네 그리고 최근 노먼 메일러의 소설에서, 그리고 지금 우리 주위 도처에 산재해 있는 포르노-팝 문화에서 우리는 모더니즘 의도의 극치를 발견하게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특히 벨은 현대 개신교의 윤리에 기초하고 있는 서구 자본주의를 붕괴시키는 데 모더니즘과 더불어 포스트모더니즘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이론가는 다름 아닌 프랭크 커모우드이다. 그는 『연속성』(1968)에서 아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 자체의 사용을 거부한다. 그는 모더니즘을 크게 ‘팰리오모더니즘’과 ‘네오모더니즘’의 두 유형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팰리오모더니즘’과 ‘네오모더니즘’이란 문자 그대로 각각 ‘구(舊) 모더니즘’과 ‘신(新) 모더니즘’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모더니즘의 역사적 발전에서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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