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지사항
1) 단행본
2) 학위논문
3) 국내 학술지논문
현영섭의 내선일체 지지
현영섭의 ‘조선어 전폐론과’과 내선일체 구현 및 전쟁협력 시국강연
현영섭의 <조선의 나아갈 길> 을 통한 황국 신민주의 지지
춘원 이광수의 황국 신민주의 지지
춘원 이광수 창씨개명과 내선일체를 지지하며 황국신민주의를 지지하다
예술지상주의를 청산하고 국가주의에 입각한 신체제에 참여할 것을 역설하는 이광수
《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 <입영기>, < 조선의 학도여>를 통해 본 이광수의 학병권유
이광수의 친일 인식
문체에서 드러나는 이광수의 친일 행적 변호론
이영근의 내선일체 구현과 황민화 지지
이영근 <황도조선>을 통해 본 내선일체의 구현과 조선 청년들의 황민화
최린의 ‘대동방주의’제창과 신동아건설론
최린의 <동양평화의 대정신>을 통해 본 동양평화와 신동아건설론의 주장
최린의 <양양하다 반도의 앞날>을 통해 본 전쟁 참여 독려 행적
1) 단행본
2) 학위논문
3) 국내 학술지논문
현영섭의 내선일체 지지
현영섭의 ‘조선어 전폐론과’과 내선일체 구현 및 전쟁협력 시국강연
현영섭의 <조선의 나아갈 길> 을 통한 황국 신민주의 지지
춘원 이광수의 황국 신민주의 지지
춘원 이광수 창씨개명과 내선일체를 지지하며 황국신민주의를 지지하다
예술지상주의를 청산하고 국가주의에 입각한 신체제에 참여할 것을 역설하는 이광수
《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 <입영기>, < 조선의 학도여>를 통해 본 이광수의 학병권유
이광수의 친일 인식
문체에서 드러나는 이광수의 친일 행적 변호론
이영근의 내선일체 구현과 황민화 지지
이영근 <황도조선>을 통해 본 내선일체의 구현과 조선 청년들의 황민화
최린의 ‘대동방주의’제창과 신동아건설론
최린의 <동양평화의 대정신>을 통해 본 동양평화와 신동아건설론의 주장
최린의 <양양하다 반도의 앞날>을 통해 본 전쟁 참여 독려 행적
본문내용
3백만이 모두 호적을 떠들추어보기 전에는 내지인인지 조선인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는 것이 그 최후의 이상이다. 그러므로 내선일체가 되고 아니되는 것은 오직 나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일조일석에 될 것은 아니지마는 우선 일본국민이기에 필요한 것은 성화같이 습득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니 이것이 빨리 되면 빨리 조선인에게 행복이 오고 더디게 오면 더디게 행복이 오고 만일 조선인이 이 공부에 게으르면 마침내 올 것이 아니 오고 말 것이다.”
그러면 시급한 것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첫째가 황실에 대한 충성의 정조의 함양이다. 일본인의 황실에 대한 감정은 실로 독특한 것이어서 조선인으로서 그 정도에 달하자면 깊고 많은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항용 우리 조상네가 충군애국이라던 그러한 충이 아니다.
일본인의 충에 대한 감정은 한자의 충(忠)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니 도리어 유태인의 여호와에 대한 충에 접할 것이다. 일본인은 내가 향유한 모든 행복을 천황께서 받잡은 것으로 생각한다. 내 토지도 천황의 것이오, 내 가옥도 천황의 것이오, 내 자녀도 천황의 것이오, 내 몸도 생명도 천황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황께로부터 받자온 몸이길래 천황이 부르시면 언제나 부탕도화라도 한다는 것이오, 자녀도 재산도 천황께서 받자온 것이매 천황께서 부르시면 고맙게 바친다는 것이다. 천황은 살아계신 하느님이신 때문이다. 이것이 지나나 구주의 군주애 신민관계와 판이한 점이다.
조선인은 이 점을 바로 파악하여야 한다. 그 순간부터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다 천황께서 주신 것으로 따라서 언제든지 천황께 바칠 것으로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마음의 신체제의 초석이다.
더구나 조선민중은 과거에는 황은을 편파하여 왔거니와 앞으로 의지하고 안길 곳이 진실로 황은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인은 앞으로 내지인보다도 더욱 많은 황은에 답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처지에 있느니 따라서 더욱 많이 천황께 대해 감사와 충성을 바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이러한 일은 말씀하기 황송한 일이기 때문에 말로 다하기 어려운 것이니 오직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는 자는 다 절실히 깨달을 것이다. <이광수, 매일신보 1940.9.5~12일>
문체에서 드러나는 이광수의 친일 행적 변호론
*《이광수전집13》 <나의고백> 편에 들어있는 ‘홍제원 목욕’의 전문
“병자호란에 서울 사대부집 처녀들만 해도 수백 명이 호병의 포로가 되어 심양으로 갔었다. 어떻게나 절치할 일이었던고, 통곡할 일이었던고. 화친이 성립되매 그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나 이에 문제되는 것은 그들의 정조가 온전한가, 아니한가이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를 의심하고, 처녀들은 혼인길이 막히었다. 수 년 적진 중에 유부녀와 처녀가 몸이 성했으리라고 상상키가 어려운 것이었다. 이에 인조대왕은 한 명을 내리었다.
‘심양에 잡혀갔다가 돌아오는 여자들은 홍제원에서 모조리 목욕을 하고서 서울에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그들의 정조 문제를 일척하기로 하고 다시 거론하는 자는 엄벌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서 수백의 아내와 딸들이 누명을 벗고, 다시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된 것이다. 그때에 만일 그 처녀들을 일일이 심문하여서 정말 깨끗한 자와 더럽혀진 자를 가리고, 더럽혀진 자 중에서도 억지로 더럽혀진 자, 마음이 동한 자를 가리기로 하였다면 어떠한 결과를 생하였을까.
오늘날 친일파 문제도 이와 비슷하다. 사십년 일정 밑에 일본에 협력한 자, 아니한 자를 가리고, 협력한 자 중에서도 참으로 협력한 자, 할 수 없어서 한 자를 가린다 하면 그 결과가 어찌 될것인가.
일정에 세금을 바치고 호적을 하고, 법률에 복종하고, 일장기를 달고, 황국신민서사를 부르고, 신사에 참배하고, 국방헌금을 내고, 관공립 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한 것이 모두 일본에의 협력이다. 더 엄격히 말하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도 협력이다. 왜 그런고 하면, 그가 협력을 아니 하였던들 죽었거나, 옥에 갔겠기 때문이다. 만일 일정 사십년에 전혀 일본에 협력하지 아니하고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는 해외에서 생장한 사람들일 것이니, 이들만 가지고 나라를 하여 갈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삼천만 민족 전체로서 홍제원 목욕을 하고 다시는 죽더라도 이민족의 지배를 받지 말자고 서약함이 옳기도 하고 효과적이기도 할 것이다.
(친일파,354)
이영근의 내선일체 구현과 황민화 지지
이영근 <황도조선>을 통해 본 내선일체의 구현과 조선 청년들의 황민화
이영근은 1943년 11월 <황도조선>을 출간하여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게 된다. 이책의 골자는 내선일체의 구현과 조선 청년들의 황민화, 우선 ‘일선동조론’즉 일본인과 조선인은 조상이 같은 민족이라며 창씨개명의 역사적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또 완전한 내선일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일본어를 국어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 조선 청년들을 철저한 일본주의로 무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앞서 일본 극우 단체에서 일본 청년들을 대상으로 해오던 것이었다. 그는 조선 청년들을 향해 “일본인이 되지 못하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라고 강요했다.
<황도조선>에 실린 원문을 통해 살펴본다.
“순수한 일본주의 청년진영도 궐기하였다. 그들의 행동은 청렴결백 그 자체이며, 모든 민족주의적 사상객과의 사투조차도 사양하지 않았다. 우리로 하여금 일본인의 길에 서지 못하게 할진대 우리에게 죽음을 달라고 절규하는 것이다. 조선인의 민족 단위를 부정하고 조선인의 일본인화에의 열정을 위해서, 개인생활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친일파,108)
* 내선일체론
- 일제의 한국 지배의 기본 방침은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만든다는 동화주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일제는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을 ‘천황의 적자’로서 전혀 차별을 하지 않고 일시동인의 입장에서 통치하겠다는 요지의 조서를 발표했다. 이후 동화주의는 한국 지배의 기본 입장이 되었다. 이어 1920년 일제 수상이 한국의 식민지지배 원칙으로 동화주의 즉 내지연장주의를 내세우면서 공식화되었다. 1931년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우원일성이 내선융화를 표방하면서 동화주의 정책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때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이르
그러면 시급한 것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첫째가 황실에 대한 충성의 정조의 함양이다. 일본인의 황실에 대한 감정은 실로 독특한 것이어서 조선인으로서 그 정도에 달하자면 깊고 많은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항용 우리 조상네가 충군애국이라던 그러한 충이 아니다.
일본인의 충에 대한 감정은 한자의 충(忠)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니 도리어 유태인의 여호와에 대한 충에 접할 것이다. 일본인은 내가 향유한 모든 행복을 천황께서 받잡은 것으로 생각한다. 내 토지도 천황의 것이오, 내 가옥도 천황의 것이오, 내 자녀도 천황의 것이오, 내 몸도 생명도 천황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황께로부터 받자온 몸이길래 천황이 부르시면 언제나 부탕도화라도 한다는 것이오, 자녀도 재산도 천황께서 받자온 것이매 천황께서 부르시면 고맙게 바친다는 것이다. 천황은 살아계신 하느님이신 때문이다. 이것이 지나나 구주의 군주애 신민관계와 판이한 점이다.
조선인은 이 점을 바로 파악하여야 한다. 그 순간부터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다 천황께서 주신 것으로 따라서 언제든지 천황께 바칠 것으로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마음의 신체제의 초석이다.
더구나 조선민중은 과거에는 황은을 편파하여 왔거니와 앞으로 의지하고 안길 곳이 진실로 황은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인은 앞으로 내지인보다도 더욱 많은 황은에 답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처지에 있느니 따라서 더욱 많이 천황께 대해 감사와 충성을 바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이러한 일은 말씀하기 황송한 일이기 때문에 말로 다하기 어려운 것이니 오직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는 자는 다 절실히 깨달을 것이다. <이광수, 매일신보 1940.9.5~12일>
문체에서 드러나는 이광수의 친일 행적 변호론
*《이광수전집13》 <나의고백> 편에 들어있는 ‘홍제원 목욕’의 전문
“병자호란에 서울 사대부집 처녀들만 해도 수백 명이 호병의 포로가 되어 심양으로 갔었다. 어떻게나 절치할 일이었던고, 통곡할 일이었던고. 화친이 성립되매 그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나 이에 문제되는 것은 그들의 정조가 온전한가, 아니한가이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를 의심하고, 처녀들은 혼인길이 막히었다. 수 년 적진 중에 유부녀와 처녀가 몸이 성했으리라고 상상키가 어려운 것이었다. 이에 인조대왕은 한 명을 내리었다.
‘심양에 잡혀갔다가 돌아오는 여자들은 홍제원에서 모조리 목욕을 하고서 서울에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그들의 정조 문제를 일척하기로 하고 다시 거론하는 자는 엄벌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서 수백의 아내와 딸들이 누명을 벗고, 다시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된 것이다. 그때에 만일 그 처녀들을 일일이 심문하여서 정말 깨끗한 자와 더럽혀진 자를 가리고, 더럽혀진 자 중에서도 억지로 더럽혀진 자, 마음이 동한 자를 가리기로 하였다면 어떠한 결과를 생하였을까.
오늘날 친일파 문제도 이와 비슷하다. 사십년 일정 밑에 일본에 협력한 자, 아니한 자를 가리고, 협력한 자 중에서도 참으로 협력한 자, 할 수 없어서 한 자를 가린다 하면 그 결과가 어찌 될것인가.
일정에 세금을 바치고 호적을 하고, 법률에 복종하고, 일장기를 달고, 황국신민서사를 부르고, 신사에 참배하고, 국방헌금을 내고, 관공립 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한 것이 모두 일본에의 협력이다. 더 엄격히 말하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도 협력이다. 왜 그런고 하면, 그가 협력을 아니 하였던들 죽었거나, 옥에 갔겠기 때문이다. 만일 일정 사십년에 전혀 일본에 협력하지 아니하고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는 해외에서 생장한 사람들일 것이니, 이들만 가지고 나라를 하여 갈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삼천만 민족 전체로서 홍제원 목욕을 하고 다시는 죽더라도 이민족의 지배를 받지 말자고 서약함이 옳기도 하고 효과적이기도 할 것이다.
(친일파,354)
이영근의 내선일체 구현과 황민화 지지
이영근 <황도조선>을 통해 본 내선일체의 구현과 조선 청년들의 황민화
이영근은 1943년 11월 <황도조선>을 출간하여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게 된다. 이책의 골자는 내선일체의 구현과 조선 청년들의 황민화, 우선 ‘일선동조론’즉 일본인과 조선인은 조상이 같은 민족이라며 창씨개명의 역사적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또 완전한 내선일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일본어를 국어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 조선 청년들을 철저한 일본주의로 무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앞서 일본 극우 단체에서 일본 청년들을 대상으로 해오던 것이었다. 그는 조선 청년들을 향해 “일본인이 되지 못하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라고 강요했다.
<황도조선>에 실린 원문을 통해 살펴본다.
“순수한 일본주의 청년진영도 궐기하였다. 그들의 행동은 청렴결백 그 자체이며, 모든 민족주의적 사상객과의 사투조차도 사양하지 않았다. 우리로 하여금 일본인의 길에 서지 못하게 할진대 우리에게 죽음을 달라고 절규하는 것이다. 조선인의 민족 단위를 부정하고 조선인의 일본인화에의 열정을 위해서, 개인생활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친일파,108)
* 내선일체론
- 일제의 한국 지배의 기본 방침은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만든다는 동화주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일제는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을 ‘천황의 적자’로서 전혀 차별을 하지 않고 일시동인의 입장에서 통치하겠다는 요지의 조서를 발표했다. 이후 동화주의는 한국 지배의 기본 입장이 되었다. 이어 1920년 일제 수상이 한국의 식민지지배 원칙으로 동화주의 즉 내지연장주의를 내세우면서 공식화되었다. 1931년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우원일성이 내선융화를 표방하면서 동화주의 정책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때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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