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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사도직을 전복시키거나 자신의 사역을 망하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0. 사도 바울은 고난받는 예수와의 밀접한 연합으로 인해서(13:3-4) 이상한 역설을 보여준다. 그가 사도로서 “몸으로” 사는 삶은 “죽는 것”(네크로시스)이 나타나는 장소다. 바울이 사용한 이 용어는 드문 단어로서 오직 여기와 로마서 4:19에만 나온다. 그는 지상의 예수를 십자가 위에서 타격한 세력을 가리키는데 “사망”(다나토스, 다른곳에서 45번)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즉 그의 전도의 주제인 예수의 단번의 죽음(롬 6:7-10)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는 점에 착안해서 로마서 4:19와의 병행을 근거로 “죽는 것”(네크로시스)와 “죽음”(다나토스)을 대략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짊어진다”는 모티프는 질그릇들인 사도들이 그들에게 맡겨진 복음의 보배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7절과 연결된다. 그렇지만 예수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그의 (부활한) 생명이 죽음 후에 이어져서, 그분은 능력 가운데서 살아계신다. 지금 바로 그 생명이 그의 사도들의 “몸들”속에 나타난다. 고린도 교회에서 주된 논쟁점은 바로 이 문제였다: 진정한 파네로시스, 즉 하나님의 능력이 진정으로 나타나는 곳은 어디인가? 바울의 대적자들은 그들이 은사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그들이 은사를 통해서 보여 주는 표적들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제시했다(12:12).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11. 전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인 파라디도나이(“넘기다”)- 통상적으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고난을 받게 되어 있는(테이) 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고난받는 자로서의 예수의 운명에 대하여 사용되는 동사 - 는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작정된 바울의 운명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폽케스는 고난받아야 하는 바울의 운명은 그의 사고 속에서 “핵심적인” 요소였다고 말한다. 바울은 마치 그가 무모한 자가 되거나(아마도 이러한 빈정거림은 12:10의 배경과 빌 1:26-30 속에서 볼 수 있는 것 같다. 인생의 온갖 역경을 통해서 용감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관한 스토아 학파의 이상을 닮고자 했던 자인 것처럼 일부러 위험스러운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겉보기에 바울의 선교 사역은 실패한 사역처럼 보인다: 사망이 바울에게서 끊임없이 역사하고 있고, 그에게서 그의 능력을 빼앗아 가고 있지만, 바울은 그가 고린도에서 전한 말씀을 듣고서 회심한 자들이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2:16)에 관한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자신의 무능력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아마도 여기에는 죽음을 부르는 옛 질서(3:6-11)와 대비되는 새 언약의 축복들에 대한 암시도 들어 있는 것 같다.
13-14. “기록한 바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실 줄을 아노니” 사도로서의 바울의 섬김과 신앙을 말하는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믿는다”(피스튜오멘. 13절)라는 단언이다. 바울의 확신은 그가 단어까지 그대로 옮겨 놓은 시편 기자에게서 발견한 동일한 확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믿으므로 말했다” 바울은 말씀을 통한 자신의 사역을 사망에 대한 생명의 승리에 관한 그의 신앙 - 시편 기자의 신앙이기도 한 - 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에게 토대를 두면서, 신앙 고백과 관련된 문구를 가져와서 그것을 확대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만이 아니라 그의 백성과 종들을 보살피신다는 것을 포함시킨다. 죽음을 초월한 예수의 존재는 바울의 신앙의 확실한 신조였다.
15. 바울은 자신이 받는 고난들과 장래의 부활의 때에 그 고난들이 신원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 속에서이든 죽고 난 이후에서이든 고린도 교회의 그의 친구들에게 돌아갈 유익 속에서 그 존재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암호 같은, 동사가 사용되지 않은 말 속에서 바울의 목회적인 관심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즐거워하여 그들의 기쁨을 감사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찬송의 제사로 읽혀질 수 있는 15절의 전체적인 취지로부터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복음이 이 세상에서 점점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보고자 하는 복음 전도와 관련된 소원을 함축한다. 그는 사도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확대하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신자들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에 대하여 그렇게 공격했던 대적자들에 대한 반격에 해당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더 널리 나타나기를 소망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풍성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16. 그는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깊이 생각했었다. 여기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상기된다. 이러한 신앙의 신조들은 그가 시험을 받을 때 그를 굳건하게 떠받쳐 주는 것들이었다. 바울이 지닌 소망은 기존의 “몸”을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몸이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서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종말론적인 몸 속으로 삼켜지는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주어지고 있는 종말론적인 몸 속으로 삼켜지는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주어지고(골 3:10, 새 아담) 성령으로 말미암아(1:22; 5:5) 그리스도가 내주하는 (엡 3:16; 4:22,24) “새 사람”을 통해서 그러한 소망을 맛본다. 그것은 바울이 자신의 관용 표현 속에서 “마음”(카르디아: 고후5:12; 롬2:29; 10:9,10 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4의 “마음에 숨은 사람”(호 크?鵝
10. 사도 바울은 고난받는 예수와의 밀접한 연합으로 인해서(13:3-4) 이상한 역설을 보여준다. 그가 사도로서 “몸으로” 사는 삶은 “죽는 것”(네크로시스)이 나타나는 장소다. 바울이 사용한 이 용어는 드문 단어로서 오직 여기와 로마서 4:19에만 나온다. 그는 지상의 예수를 십자가 위에서 타격한 세력을 가리키는데 “사망”(다나토스, 다른곳에서 45번)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즉 그의 전도의 주제인 예수의 단번의 죽음(롬 6:7-10)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는 점에 착안해서 로마서 4:19와의 병행을 근거로 “죽는 것”(네크로시스)와 “죽음”(다나토스)을 대략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짊어진다”는 모티프는 질그릇들인 사도들이 그들에게 맡겨진 복음의 보배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7절과 연결된다. 그렇지만 예수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그의 (부활한) 생명이 죽음 후에 이어져서, 그분은 능력 가운데서 살아계신다. 지금 바로 그 생명이 그의 사도들의 “몸들”속에 나타난다. 고린도 교회에서 주된 논쟁점은 바로 이 문제였다: 진정한 파네로시스, 즉 하나님의 능력이 진정으로 나타나는 곳은 어디인가? 바울의 대적자들은 그들이 은사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그들이 은사를 통해서 보여 주는 표적들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제시했다(12:12).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11. 전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인 파라디도나이(“넘기다”)- 통상적으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고난을 받게 되어 있는(테이) 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고난받는 자로서의 예수의 운명에 대하여 사용되는 동사 - 는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작정된 바울의 운명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폽케스는 고난받아야 하는 바울의 운명은 그의 사고 속에서 “핵심적인” 요소였다고 말한다. 바울은 마치 그가 무모한 자가 되거나(아마도 이러한 빈정거림은 12:10의 배경과 빌 1:26-30 속에서 볼 수 있는 것 같다. 인생의 온갖 역경을 통해서 용감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관한 스토아 학파의 이상을 닮고자 했던 자인 것처럼 일부러 위험스러운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겉보기에 바울의 선교 사역은 실패한 사역처럼 보인다: 사망이 바울에게서 끊임없이 역사하고 있고, 그에게서 그의 능력을 빼앗아 가고 있지만, 바울은 그가 고린도에서 전한 말씀을 듣고서 회심한 자들이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2:16)에 관한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자신의 무능력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아마도 여기에는 죽음을 부르는 옛 질서(3:6-11)와 대비되는 새 언약의 축복들에 대한 암시도 들어 있는 것 같다.
13-14. “기록한 바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실 줄을 아노니” 사도로서의 바울의 섬김과 신앙을 말하는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믿는다”(피스튜오멘. 13절)라는 단언이다. 바울의 확신은 그가 단어까지 그대로 옮겨 놓은 시편 기자에게서 발견한 동일한 확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믿으므로 말했다” 바울은 말씀을 통한 자신의 사역을 사망에 대한 생명의 승리에 관한 그의 신앙 - 시편 기자의 신앙이기도 한 - 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에게 토대를 두면서, 신앙 고백과 관련된 문구를 가져와서 그것을 확대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만이 아니라 그의 백성과 종들을 보살피신다는 것을 포함시킨다. 죽음을 초월한 예수의 존재는 바울의 신앙의 확실한 신조였다.
15. 바울은 자신이 받는 고난들과 장래의 부활의 때에 그 고난들이 신원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 속에서이든 죽고 난 이후에서이든 고린도 교회의 그의 친구들에게 돌아갈 유익 속에서 그 존재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암호 같은, 동사가 사용되지 않은 말 속에서 바울의 목회적인 관심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즐거워하여 그들의 기쁨을 감사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찬송의 제사로 읽혀질 수 있는 15절의 전체적인 취지로부터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복음이 이 세상에서 점점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보고자 하는 복음 전도와 관련된 소원을 함축한다. 그는 사도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확대하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신자들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에 대하여 그렇게 공격했던 대적자들에 대한 반격에 해당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더 널리 나타나기를 소망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풍성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16. 그는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깊이 생각했었다. 여기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상기된다. 이러한 신앙의 신조들은 그가 시험을 받을 때 그를 굳건하게 떠받쳐 주는 것들이었다. 바울이 지닌 소망은 기존의 “몸”을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몸이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서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종말론적인 몸 속으로 삼켜지는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주어지고 있는 종말론적인 몸 속으로 삼켜지는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주어지고(골 3:10, 새 아담) 성령으로 말미암아(1:22; 5:5) 그리스도가 내주하는 (엡 3:16; 4:22,24) “새 사람”을 통해서 그러한 소망을 맛본다. 그것은 바울이 자신의 관용 표현 속에서 “마음”(카르디아: 고후5:12; 롬2:29; 10:9,10 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4의 “마음에 숨은 사람”(호 크?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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