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작가소개
2. 시대 배경
3. 친일 반역자의 길
4. 작가활동 및 작품소개
ⅲ. 결론
1. 친일파로서의 최남선
2. 지식인으로서의 최남선
ⅳ. 참고문헌
ⅱ. 본론
1. 작가소개
2. 시대 배경
3. 친일 반역자의 길
4. 작가활동 및 작품소개
ⅲ. 결론
1. 친일파로서의 최남선
2. 지식인으로서의 최남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설로 제외시켜 버림으로써 한국사를 2천년 역사로 축소시키는 작업을 완수하였으며, 1938년 7월에 37권의 방대한 『조선사』를 완간하였다.
3-2. 중추원 참의가 됨
조선사편수가 끝나자 그는 중추원 참의라는 벼슬을 하게 된다. 중추원은 단적으로 말하여 조선총독부 총독의 자문기관으로 합방과 동시에 1910년 10월 개설되었다. 중추원 참의는 어떤 의결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월급도 적었지만 한국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영직으로 친일유지귀족배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참의들은 식민지의 제1급유지요, 실력자로서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3-3. 1939~1942 만주 건국대학교수로 재임
만주 건국대학은 괴뢰국을 건설하면서 대륙침략을 위한 허울 좋은 이름의 대학이자 식민지 첨병을 양성하기 위한 대학이었기에 민족운동가들 사이에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는 건국대학교에서 「만몽문학사」를 강좌하게 되는데, 이를 통한 일제의 목적은 전적으로 제국주의 팽창을 위한 연구과업 수행이었다. 더욱이 그는 건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남지구 특별공작후원회본부」의 고문직도 함께 맡고 있었으니, 이 단체는 일본관동군의 반공선무공작을 지원하는 간첩단체로 독립군과 항일 빨치산을 포섭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친일행각이 학도병 권유에서 시작된다.
3-4. 학병 권유를 위한 강연에 참가
1942년 11월 건국대학을 사임하고 귀국하여 1년 가까이 지내다가 1943년 10월 학병지원문제가 일어나자 총독부의 위촉에 순응하여 일본 동경에 건너가 한국유학생의 학병권유에 열을 올렸다.
1943년 11월 조선호텔에서 김연수송진우이광수·최남선 등이 일본 권설대 파견절차를 협의 하였다. 1반 김연수이광수, 2반 최남선이성근이 12일부터 릿쿄 대학, 와세다 대학을 비롯한 일본 내 각 대학에서 강연하게 된다. 같은 민족의 청년들을 제국주의 전선의 개죽음으로 몰아내는 육당의 발언과 독립선언문을 쓰던 시절과는 얼마나 많은 괴리가 보이는가.
3-5. 친일 관련 글을『매일신보』등에 기고
「가라! 청년 학도여」(<매일신보> 1943.11.20)에서 대동아 성전은 세계사의 개조이며, 일본국민으로서 충성을 바치고 조선남아의 의기를 발휘하여 모두 출전하기를 촉구한다는 식으로 그가 쓴 선동문이었다. 게다가 학병권유에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총독부에 아첨하는 논설을 싣고, 1945년 3월 ‘전력증강의 진로’라는 친일논설을 발표하였다.
4. 작가활동 및 작품소개
4-1. 잡지 《소년(少年)》,《청춘(靑春)》
최남선이 주재했던 《소년(少年)》(1908), 《청춘(靑春)》(1914)은 종합적인 성격의 대중 잡지였지만, 새로운 글쓰기로서의 문학의 사회적 확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청춘》은 현상 모집 방법을 통해 소설을 공모하여 새로운 문필가를 발굴하고, 여러 가지 형태의 글쓰기에 적합한 국문체의 가능성을 실제 작품을 통해 보여 주었다.
① 《소년》(1908)
‘한국 근대 잡지의 효시’, ‘18세 소년이 창간한 잡지’ 로 일컬어지는《소년》은 1907년 여름 최남선이 설립한 신문관(新文館)에서 1908년 11월부터 발행되어, 1911년 5월에 폐간된다. 한국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잡지로 잘 알려져 있다. 《소년》은 ‘신문학 운동의 출발’, ‘한국 신문화 운동에 있어 최초의 월간지’로 언급된다. 이런 평가의 저변에는 공통적으로 최남선의 신체시나 언문일치의 신 문장 운동, 신지식의 보급, 조선주의 제창에 대한 가치평가가 내재한다.
최남선은 《소년》제1년 제1권에서 한반도를 토끼에 비유한 일본인의 시각에 반박하고, 한반도를 호랑이에 비유한다. 그리고 이 호랑이 모양의 지도를 그림으로 제시하며 “우리 진취적, 팽창적 소년한반도의 무한한 발전과 원기”를 마음에 담아 둘 것을 당부한다. 이 후, 최남선은 한반도 지도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태백호太白虎>라는 제목의 창가로 창작한다.
《소년》의 구성에 있어 조선에는 아직 유입되지 않았던 서구 신지식의 수용과 당대 조선에서 잊혀져가는 고전에 대한 복원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점은《소년》을 간행했던 최남선이 어린 학생들에게 당대 신문명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잡지를 만든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는 최남선에 의해 창간된 잡지가 조선 문화의 축과 세계문명의 축 사이에서 근대 미디어로서 국민문화를 형성해가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②《청춘》(1914)
종합적인 성격의 대중 잡지였던 《청춘》(1914)은 새로운 과학 지식에서부터 역사, 세계문학, 시조, 한시, 소화(笑話), 잡다한 해외토픽에 이르기까지 그야 말로 온갖 글들을 총망라한다. 천문학, 물리학, 문학, 역사학, 윤리학, 생물학, 인류학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청춘』의 편집 구조는 다음과 같다.
우
주
생물
인류
인간의 특징 및 세계 각국의 특징, 인물에 관한 글
동물
동물의 특징에 관한 글
식물
식물의 특징에 관한 글
무생물
문명
발명품에 대한 글
문화
학술, 종교, 한시, 시조, 시, 노래, 소설, 세계문학, 소화 등
《청춘》창간호에는 세계 각 지역의 특징을 75조의 형식에 맞춰 부르게끔 지은 노래인 「세계일주가(世界一周歌)」가 부록으로 붙어있다. 한양을 출발하여 평양을 거쳐 압록강을 넘어 중국 땅으로 들어서면서 장장 63쪽에 걸친 세계일주가 시작된다.
최남선은 《청춘》에서 당대의 최신 지식들을 단순 정보 전달처럼 실어 나르면서, 만물을 분해하고 다시 통합시키는 기획을 선보인다. 우주 만물의 존재 원리를 밝히고 인류의 질서가 우주의 질서에 상응함을 드러냄으로써, 인류가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한 생명의 원리에 대해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최남선이 발견한 조선 민족이나 문학의 개념은 끊임없이 마찰하고 교류하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민족주의와 문학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우주만물이 빚어내는 총체적 질서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사유하려 한 최남선의 시도는 하나의 의미 있는 계기를 마련해줄지도 모른다.
4-2. 창가 《경부철도가》,《세계일주가》
우렁타계토하난 긔
3-2. 중추원 참의가 됨
조선사편수가 끝나자 그는 중추원 참의라는 벼슬을 하게 된다. 중추원은 단적으로 말하여 조선총독부 총독의 자문기관으로 합방과 동시에 1910년 10월 개설되었다. 중추원 참의는 어떤 의결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월급도 적었지만 한국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영직으로 친일유지귀족배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참의들은 식민지의 제1급유지요, 실력자로서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3-3. 1939~1942 만주 건국대학교수로 재임
만주 건국대학은 괴뢰국을 건설하면서 대륙침략을 위한 허울 좋은 이름의 대학이자 식민지 첨병을 양성하기 위한 대학이었기에 민족운동가들 사이에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는 건국대학교에서 「만몽문학사」를 강좌하게 되는데, 이를 통한 일제의 목적은 전적으로 제국주의 팽창을 위한 연구과업 수행이었다. 더욱이 그는 건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남지구 특별공작후원회본부」의 고문직도 함께 맡고 있었으니, 이 단체는 일본관동군의 반공선무공작을 지원하는 간첩단체로 독립군과 항일 빨치산을 포섭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친일행각이 학도병 권유에서 시작된다.
3-4. 학병 권유를 위한 강연에 참가
1942년 11월 건국대학을 사임하고 귀국하여 1년 가까이 지내다가 1943년 10월 학병지원문제가 일어나자 총독부의 위촉에 순응하여 일본 동경에 건너가 한국유학생의 학병권유에 열을 올렸다.
1943년 11월 조선호텔에서 김연수송진우이광수·최남선 등이 일본 권설대 파견절차를 협의 하였다. 1반 김연수이광수, 2반 최남선이성근이 12일부터 릿쿄 대학, 와세다 대학을 비롯한 일본 내 각 대학에서 강연하게 된다. 같은 민족의 청년들을 제국주의 전선의 개죽음으로 몰아내는 육당의 발언과 독립선언문을 쓰던 시절과는 얼마나 많은 괴리가 보이는가.
3-5. 친일 관련 글을『매일신보』등에 기고
「가라! 청년 학도여」(<매일신보> 1943.11.20)에서 대동아 성전은 세계사의 개조이며, 일본국민으로서 충성을 바치고 조선남아의 의기를 발휘하여 모두 출전하기를 촉구한다는 식으로 그가 쓴 선동문이었다. 게다가 학병권유에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총독부에 아첨하는 논설을 싣고, 1945년 3월 ‘전력증강의 진로’라는 친일논설을 발표하였다.
4. 작가활동 및 작품소개
4-1. 잡지 《소년(少年)》,《청춘(靑春)》
최남선이 주재했던 《소년(少年)》(1908), 《청춘(靑春)》(1914)은 종합적인 성격의 대중 잡지였지만, 새로운 글쓰기로서의 문학의 사회적 확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청춘》은 현상 모집 방법을 통해 소설을 공모하여 새로운 문필가를 발굴하고, 여러 가지 형태의 글쓰기에 적합한 국문체의 가능성을 실제 작품을 통해 보여 주었다.
① 《소년》(1908)
‘한국 근대 잡지의 효시’, ‘18세 소년이 창간한 잡지’ 로 일컬어지는《소년》은 1907년 여름 최남선이 설립한 신문관(新文館)에서 1908년 11월부터 발행되어, 1911년 5월에 폐간된다. 한국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잡지로 잘 알려져 있다. 《소년》은 ‘신문학 운동의 출발’, ‘한국 신문화 운동에 있어 최초의 월간지’로 언급된다. 이런 평가의 저변에는 공통적으로 최남선의 신체시나 언문일치의 신 문장 운동, 신지식의 보급, 조선주의 제창에 대한 가치평가가 내재한다.
최남선은 《소년》제1년 제1권에서 한반도를 토끼에 비유한 일본인의 시각에 반박하고, 한반도를 호랑이에 비유한다. 그리고 이 호랑이 모양의 지도를 그림으로 제시하며 “우리 진취적, 팽창적 소년한반도의 무한한 발전과 원기”를 마음에 담아 둘 것을 당부한다. 이 후, 최남선은 한반도 지도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태백호太白虎>라는 제목의 창가로 창작한다.
《소년》의 구성에 있어 조선에는 아직 유입되지 않았던 서구 신지식의 수용과 당대 조선에서 잊혀져가는 고전에 대한 복원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점은《소년》을 간행했던 최남선이 어린 학생들에게 당대 신문명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잡지를 만든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는 최남선에 의해 창간된 잡지가 조선 문화의 축과 세계문명의 축 사이에서 근대 미디어로서 국민문화를 형성해가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②《청춘》(1914)
종합적인 성격의 대중 잡지였던 《청춘》(1914)은 새로운 과학 지식에서부터 역사, 세계문학, 시조, 한시, 소화(笑話), 잡다한 해외토픽에 이르기까지 그야 말로 온갖 글들을 총망라한다. 천문학, 물리학, 문학, 역사학, 윤리학, 생물학, 인류학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청춘』의 편집 구조는 다음과 같다.
우
주
생물
인류
인간의 특징 및 세계 각국의 특징, 인물에 관한 글
동물
동물의 특징에 관한 글
식물
식물의 특징에 관한 글
무생물
문명
발명품에 대한 글
문화
학술, 종교, 한시, 시조, 시, 노래, 소설, 세계문학, 소화 등
《청춘》창간호에는 세계 각 지역의 특징을 75조의 형식에 맞춰 부르게끔 지은 노래인 「세계일주가(世界一周歌)」가 부록으로 붙어있다. 한양을 출발하여 평양을 거쳐 압록강을 넘어 중국 땅으로 들어서면서 장장 63쪽에 걸친 세계일주가 시작된다.
최남선은 《청춘》에서 당대의 최신 지식들을 단순 정보 전달처럼 실어 나르면서, 만물을 분해하고 다시 통합시키는 기획을 선보인다. 우주 만물의 존재 원리를 밝히고 인류의 질서가 우주의 질서에 상응함을 드러냄으로써, 인류가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한 생명의 원리에 대해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최남선이 발견한 조선 민족이나 문학의 개념은 끊임없이 마찰하고 교류하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민족주의와 문학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우주만물이 빚어내는 총체적 질서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사유하려 한 최남선의 시도는 하나의 의미 있는 계기를 마련해줄지도 모른다.
4-2. 창가 《경부철도가》,《세계일주가》
우렁타계토하난 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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