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18세기 조선의 서양인식이 17세기보다 후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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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왜 18세기 조선의 서양인식이 17세기보다 후퇴했을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조선후기 지식인의 서양인식
1-1. 17세기의 서양인식
1-2. 18세기의 서양인식


2. 조선중화주의


3. 서양인식의 후퇴


맺는말

본문내용

Report
( 왜 18세기 조선의 서양인식이 17세기보다 후퇴했을까? )
목 차
서론
1. 조선후기 지식인의 서양인식
1-1. 17세기의 서양인식
1-2. 18세기의 서양인식
2. 조선중화주의
3. 서양인식의 후퇴
맺는말
서론
전통시대에 지도는 원초적으로 군사기밀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조선이 지리정보를 확보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던 중국은 17세기까지도 중요 지리정보를 조선에 노출시키지 않으려 했다. 새로운 지리정보는 대내적으로도 통제되었다. 조선왕조도 지리지식들을 가급적 민간에 유출시키지 않으려 했다. 국가적 역량이 투입되었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열람할 수 있는 범위도 지극히 제한되었다.
지리정보가 통제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천하에 대한 인식은 지도보다 넒게 나아가기 어려웠다. 중화의 논리 때문에 조선사회는 땅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화의 논리는 그만큼 조선시대 천하관의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서구식 세계지도가 본격적으로 소개, 보급되는 한편 18세기 중반경에는 지리정보에 대한 대내외적인 통제가 풀려나갔다.
17세기 초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西洋을 나라이름으로 오인하는 듯한 인식상의 한계점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라파’라는 용어를 새롭게 사용하면서 영국, 이태리, 포르투갈 등 몇몇 나라들에 대한 풍속과 문물 등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유럽제국에 대한 개별적 인식의 첫 틀을 형성해 주었다. 또한 중국 중심의 四海 개념에서 벗어나, 그 후 동양과 서양을 대등한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볼 수 있는 18세기 홍대용 등의 탈중화주의적 안목의 단서를 제공하였으며, 구라파를 대서양으로 보는 등 서양 인식상의 분화를 예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11년 일본에 사행한 임수간의 『東日記』에 나타난 서양인식은 100년 전 이수광의 인식보다 오히려 후퇴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익은『성호사설』에서 서양을 하나의 대륙으로 인식하고 그곳에 있는 여러 나라들과 구분하는 안목을 가졌으면서도 개별국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총포, 역법 등 그들의 발달한 선진문물에 더 큰 흥미를 보여주었다.
그러면 조선과 청의 교섭관계는 완전히 정상화되었고 북경을 방문한 조선 지식인의 통행도 자유로워진 18세기의 서양에 대한 인식이 그렇지 않았던 17세기보다 후퇴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에게 있어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은 조만간 몽골처럼 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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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12.17
  • 저작시기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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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63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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