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1945~1949 [추상 표현주의, 데이비드 스미스, 서 있는 콜라주, 토템과 터부, 클레멘트 그린버그, 마이클 프리드, 존 체임벌린, 앵포르멜, 장 뒤뷔페, 장 포트리에, 볼스, 라슬로 모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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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양미술사] 1945~1949 [추상 표현주의, 데이비드 스미스, 서 있는 콜라주, 토템과 터부, 클레멘트 그린버그, 마이클 프리드, 존 체임벌린, 앵포르멜, 장 뒤뷔페, 장 포트리에, 볼스, 라슬로 모호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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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수로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유럽의 전위적 예술을 전파하고 새로운 현대예술의 방향을 제시한 뜻깊은 학교이다.
요제프 알베르스
보트로프 출생. 베를린 ·에센 ·뮌헨미술학교와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서 수학하고, 1923년 모교의 교사가 되었다. 1933년 나치스의 압박으로 바우하우스가 폐쇄된 후로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과 예일대학 등 많은 대학과 미술학교에서 강의하였다. 개성을 배제하고, 특히 선(線)과 포름(forme)에 대하여 가히 수학적이라 할 만큼 엄밀하게 처리하는 태도로 일관하였으며, 작품으로서는 정사각형만으로 구성한 《정사각형에 바친다》의 연작 등이 유명하다.
“눈을 뜨게 하고 싶다” - ‘시각’이 모더니즘의 패스워드
“추상화는 인간 정신의 본질적 기능”이며, 이를 위해서 “눈과 손을 단련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
【모든 것에는 형태가 있다】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인문대학의 맥락에서 받아들여 그 이념에 두 가지를 수정
-인간주의적인, 거의 괴테적인 면모를 덧 붙혀 “모든 사물은 형태가 있고, 모든 형태는 의미를 지님” 미술은 “형태의 근본 법칙에 대한 지식과 응용”에 관련되 있음. 즉 게슈탈퉁에 관한 오랜 관심을 총해 새롭게 시작된 시각에 관한연구를 완성 시킴.
-바우하우스의 재료와 구조에 관한 분석을 존 듀이 같은 철학자가 전개한 미국 실용주의 노선에 따라 재편 :포르쿠르스가 아닌 베르크레레 즉 ‘작업을 통한 교육’또는 ‘행동을 통한 학습’이라고 부름. 즉 재료의 이미나 기능을 확정하기보다 재료에서 형태를 창안하는 것에 초점을 둠.
마티에르: 재료가 드러나는 방식(서로 다른 표식, 빛, 설정에 따라 겉모습이 변화되는 방식)색채를 나란히 늘어놓고“색채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변화하는 방식을 명백히 드러내려”함.
-“어떠한 것도 한 가지인 것은 없다, 백 가지이다.”, “모든 예술은 속임수다.” - 물리적 사실과 심리적 효과 사이의 불일치.
*표현적 주관성에 기반을 둔 예술이나 극단적 객관성에 기반을 둔 예술에 반대. 실용주의적인 접근법을 도입. 구축주의적 충동, 즉 보는 행위, 재료, 형식, 구조에 초점을 맞춘 모더니즘과 다다이즘적 충동이 화합된 도가니.
*모더님즘적 충동과 아방가르드적 충동을 화합시켰을 뿐 아니라 다양한 추상 형식들, 특히 빛과 색에 집중한 추상 형식을 화합시킴.
“나는 직접적인 빛, 즉 표면 뒤에서 생겨나 표면으로 새어 나오는 빛으로 작업하길 바란다.”
“회화란 색채의 활동이다. 아무런 선의 흔적을 남지기 않더라도 회화마다 성격과 느낌은 변한다. 이런 모든 것이 조형적 구성의 수단으로서 색의 자율성을 입증 한다.”
【대학의 모더니스트】
모호이-너지 : 바우하우스 프로그램을 기술 공학 기반의 디자인 학교를 위한 도구로 재정비
요제프 알베르스 : 안문대학을 위한 도구로 재정비
모호이-너지와 알베르스는 디자인과 색채 교육을 대대적으로 개혁했으며,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보존하는 동시에 그 이념을 다른 아방가르드 모델들과 교류하게 하여 생산적으로 변형시킴. “미국 회화의 승리”같은 종류의 발언처럼 현대미술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 갔다는 식의 단순하고 오래된 논리들을 좀 더 복합적으로 사고하는 계기가 됨.
여러 차이와 단절에도 불구하고 대륙과 대륙을 가로질러 전후 여러 시기를 관통하는 연속성이 분명 존재하며 이 연속성은 계속된 변화에도 불구하고 미술 작업, 산업디자인, 교육 방법의 수준에 존재해 왔음.
·1947b
뉴욕에서 창간된 《파서빌리티스》가 추상표현주의가 하나의 운동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미술가들이 1950년 5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보인 \"진보적 미술에 대한 적대감“에 대항하기 위해 이 미술관에서 주최한 공모전에 불참 - 1951년 1월 《라이프(life)》지에 실린 악명 높은 사진을 통해 세상에 알려짐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관장 롤랜드 레드먼드에게 보내는 공개 항의 서한에 서명.
이들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추상표현주의는 갑자기 뉴욕근대미술관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으며 고급미술의 판테온에 입성.
이 미술은 곧 전형적인“미국적 회화”로 여겨지며 소비에트 공산주의에 맞서는 유용한 문화대군으로 냉전에 소집됨.
【공유된 경험】
미술가들 사이의 유대를 지나치게 과장한 《라이프(life)》지의 사진에 대해 사진 속 등장인물 상당수가 이의를 제기함.
사진 속 그들은 자부심 강한 고독한 인물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그들은 서로 비슷한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 상당수가 30년대 공공사업진흥국(WPA)에서 일했으며 극심한 가난의 시기 동안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그림을 그림.
-유럽 아방가르드에 대해 상당한 열등감을 느끼는 동시에 유럽 아방가르드에 대해 훤히 알 고 있었음.
-초현실주의에 열광하다가 점차 등을 돌리게 됨: 이들의 이데올로기를 결정지음.
(신화에 대한 상징주의적 상상과 매혹에 반대, 강한 원시주의적 충동만은 간직했으며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음)
【자동기술적인 것에서 자필적인 것으로】
1947년~1948년<결정적인 해>
-폴록: 전면적인 드리핑 작업
-뉴먼: 「하나임」을 그림
-데 쿠닝: 첫 개인전을 성공리에 열었음
-고르키(추상표현주의자 중 유일하게 초현실주의자에게 환영 받음): 자살로 생을 마감
-로스코: 첫 번째 성숙한 작품들을 완성
*이 시기에는 “멀티폼(multiform)\"회화에 제목을 붙이지 않고 숫자와 색으로만 구별-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보여 줌
·서브젝트 오브 아티스트(The subject of Artist)학교 개교
·마더웰과 해럴드 로젠버그가 발행한 《파서빌리티스》 - 다양한 매체를 다루고 역사적 아방가르드와의 연계를 확실히하고 새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음.
·폴록, 로스코가 발표한 성명이 가장 핵심적 징후
*폴록: “작업하는 동안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무엇을 했는지 아는 것은 일종의 ‘익숙해지는’시기가 지난 후에야 가능하다.····회화는 그 자체의 삶을 갖고 있다. 나는 그것이 스스로 나타날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다. 결과가 엉망이 되는 것은 나와 회화와의 접촉이 끊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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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9.12
  • 저작시기2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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