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2. 한민당을 이용
한민당 지도자들은 미군정 관료조직의 핵심요소들을 통제하게 되었다. 조병옥이 경무부장, 장택상이 수도경찰총장, 김용무가 대법원장, 이인이 검찰청장이 되었다. 이러한 법과 질서유지 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 조직들에서도 장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한민당은 서울의 관리뿐만 아니라 도청과 군청 관리에까지 영향력을 가졌다. 일례로 1946초 전라남도에서는 21명의 군수 중에서 17명이 한민당원이었다. 그래서 “남조선 미군정 직원의 8할이 한민당과 그 관련자들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미군정내의 이러한 관리들의 지지로 한민당은 허약한 정치집단에서 미군정시대의 여당으로 상승할 수 있었고 정치적 라이벌인 인공을 탄압했다.
3. 임정 지도자들의 귀국
미군정은 미국이 만든 관료조직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조선인 지도자를 찾느라고 늘 애썼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미군정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승만은 한민당과 다른 우익 집단을 끌어모아 한국독립촉성전국회의(독촉)를 만들었다. 이는 한민당이 미군정 내에서 가진 큰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민당과 제휴했고, 다른 한편 한민당 지도자들은 당에 애국자 집단이라는 마스크를 씌우기 위해, 이승만을 필요로 했다. 이승만 보다 늦게 귀국한 김구에 대해 미군정은 덕수궁에 임시정부의 본부를 마련해주고 미군헌병이 경비서게 하였으며, 교통수단을 제공하고, 김구의 개인 수행원들이 무기 지니는 것을 허용했다. 인공에게는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라고 주장하던 것과 모순되게 미국인들은 임정이 ‘정부‘ 또는 ‘내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4. 임정지도자들을 이용
이제 임정 지도자들이 서울에 돌아왔기 때문에 미군정은 한민당과 임정을 통합시켜 그들을 이용하려 하였다. 그것이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다. 28인으로 구성된 민주의원은 임정지도자들이 의장단을 차지했는데 이승만이 의장직을, 김구와 김규식이 부의장직을 맡았으며, 위원들의 대다수가 한민당, 독촉, 그리고 임정 출신이었다. 미군정은 민주의원에게 자동차들과 창덕궁을 사용케하였고, 의원개인들에게는 매달 3천원씩을 지불했다. 민주의원마저 실패한 이후에 미군정은 광범위한 선거 절차를 통해 현재의 민주의원을 대체할 입법자문기구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46년 10월 항쟁 기간중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너무 빨리 진행되어서 그런 사실조차 알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미국인 관리는 “전략적으로 지금이 우익의 선거를 실시할 적당한 시간이다. 모든 좌익들은 감옥에 있거나 산속에 숨어 있다.“고 논평했다. 결과는 과도입법의원 45석 중에 한민당 21석, 이승만의 독촉 13석, 김구의 한독당 6석, 그리고 무소속 친우익 5석이었다.
□ 참고문헌
해방3년사 / 한국현대사강의 / 한국현대사 1 / 한국근현대사사전 / 해방 전후사의 인식 1, 3 / 해방3년사 연구입문 / 독재자 이승만 / 우리나라 근대 인물사 / 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사 / 대한민국 50년사 1 / 미군점령 4년사
2. 한민당을 이용
한민당 지도자들은 미군정 관료조직의 핵심요소들을 통제하게 되었다. 조병옥이 경무부장, 장택상이 수도경찰총장, 김용무가 대법원장, 이인이 검찰청장이 되었다. 이러한 법과 질서유지 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 조직들에서도 장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한민당은 서울의 관리뿐만 아니라 도청과 군청 관리에까지 영향력을 가졌다. 일례로 1946초 전라남도에서는 21명의 군수 중에서 17명이 한민당원이었다. 그래서 “남조선 미군정 직원의 8할이 한민당과 그 관련자들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미군정내의 이러한 관리들의 지지로 한민당은 허약한 정치집단에서 미군정시대의 여당으로 상승할 수 있었고 정치적 라이벌인 인공을 탄압했다.
3. 임정 지도자들의 귀국
미군정은 미국이 만든 관료조직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조선인 지도자를 찾느라고 늘 애썼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미군정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승만은 한민당과 다른 우익 집단을 끌어모아 한국독립촉성전국회의(독촉)를 만들었다. 이는 한민당이 미군정 내에서 가진 큰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민당과 제휴했고, 다른 한편 한민당 지도자들은 당에 애국자 집단이라는 마스크를 씌우기 위해, 이승만을 필요로 했다. 이승만 보다 늦게 귀국한 김구에 대해 미군정은 덕수궁에 임시정부의 본부를 마련해주고 미군헌병이 경비서게 하였으며, 교통수단을 제공하고, 김구의 개인 수행원들이 무기 지니는 것을 허용했다. 인공에게는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라고 주장하던 것과 모순되게 미국인들은 임정이 ‘정부‘ 또는 ‘내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4. 임정지도자들을 이용
이제 임정 지도자들이 서울에 돌아왔기 때문에 미군정은 한민당과 임정을 통합시켜 그들을 이용하려 하였다. 그것이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다. 28인으로 구성된 민주의원은 임정지도자들이 의장단을 차지했는데 이승만이 의장직을, 김구와 김규식이 부의장직을 맡았으며, 위원들의 대다수가 한민당, 독촉, 그리고 임정 출신이었다. 미군정은 민주의원에게 자동차들과 창덕궁을 사용케하였고, 의원개인들에게는 매달 3천원씩을 지불했다. 민주의원마저 실패한 이후에 미군정은 광범위한 선거 절차를 통해 현재의 민주의원을 대체할 입법자문기구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46년 10월 항쟁 기간중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너무 빨리 진행되어서 그런 사실조차 알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미국인 관리는 “전략적으로 지금이 우익의 선거를 실시할 적당한 시간이다. 모든 좌익들은 감옥에 있거나 산속에 숨어 있다.“고 논평했다. 결과는 과도입법의원 45석 중에 한민당 21석, 이승만의 독촉 13석, 김구의 한독당 6석, 그리고 무소속 친우익 5석이었다.
□ 참고문헌
해방3년사 / 한국현대사강의 / 한국현대사 1 / 한국근현대사사전 / 해방 전후사의 인식 1, 3 / 해방3년사 연구입문 / 독재자 이승만 / 우리나라 근대 인물사 / 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사 / 대한민국 50년사 1 / 미군점령 4년사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