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선비들의삶과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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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선비들의삶과꿈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었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명장 이순신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인데 김명민이란 배우가 나와 호평을 받았던 드라마이다. 초등학생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이순신과 세종대왕을 많이 언급한다고 한다. 그만큼 그들은 훌륭한 업적을 남긴 역사 속의 인물이다.
이아무개기자: 이순신 장군은 어떤 전쟁에서 활약하였습니까?
저자: 이순신 장군은 거제도 앞바다에서 왜군과 첫 싸움을 하였다. 이 해전에서 우리 수군은 적의 배를 거의 모두 격침시키면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이래 우리 군대가 처음으로 크게 승리한 싸움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그 뒤에도 사천, 당포, 당황포, 등 곳곳에서 적을 물리쳤다. 그러자 왜군은 자기네 세력을 되찾기 위해 모든 함대를 모아 공격해 왔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전선을 이끌고 왜군의 함대가 진을 치고 있는 통영 앞바다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 곳은 섬과 곶이 많아 해전을 벌이기에 좋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적선을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하였다. 그리고 우리 함대를 학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배치하여 총공격하였다. 적 함대를 완전히 포위한 우리 수군이 사방에서 포를 쏘아 대자, 적은 우왕자왕하다가 우리 수군의 대포와 화살에 맞아 거의 다 쓰러지고 일부만 살아서 도망갔다. 이를 한산도 대첩이라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이 왜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바다에서 모두 패하게 되자,더 이상 싸울 의욕을 잃게 되었고, 노량 대첩을 끝으로 7년 간의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이아무개기자 :이렇게 대단한 업적을 세운 이순신이지만 집권세력인 사림들은 당파싸움에 몰두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과 의병장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지금의 정치와 비슷한 듯하다. 물고 뜯고 서로 싸움질하는 국회의원들, 한심한 위정자들은 역사의 어디에나 존재하는가 보다.
이아무개기자: 임진왜란에서 민중의 활약상을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저자: 임진왜란 중 왜적을 물리친 것은 관군이 아니라 지방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이었다. 의병들은 농민들이 주축을 이루었고, 전직 관료, 유생 그리고 승려들이 지도하였다. 곽재우는 의령에서 봉기하여 홍의장군으로 불리며 왜적을 소탕하는데 공을 세웠지만 당쟁의 폐단 때문에 힘들어 했다.
이아무개기자 : 일본이라고 하면 아직도 우리역사에 가장 큰 아픔을 겪게 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를 불법 통치하면서 35년간 우리민족을 핍박한 것은 물론이고 위안부 문제 독도 영유권분쟁 등의 많은 역사적 과제가 남아있다. 축구, 피겨, 야구를 해도 다른 나라보다도 일본만은 꼭 이기고자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식민 통치를 당하며 일본인들에게 당한 것은 어떤 보상으로도 대신 할 수 없는데 과거사에 대한 반성보다는 독도가 자기네들 땅이라는 영유권 주장으로 끝까지 우리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나라이다. 지진 등의 천재에 우리나라가 성금을 모금하는 등 따뜻한 위로를 했을 때 에도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교과서에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표시하는 것을 보며 일본이라는 나라는 정신 못 차리는 망나니 같은 나라라는 생각을 한 번 해보게 되었다.
이아무개기자: 그럼 광해군은 어떤 왕이었습니까?
저자: 선조를 이어 왕이 된 광해군은 우선적으로 임진왜란 직후 피폐된 민생을 회복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허준의 <동의보감>이 편찬 간행된 것도 광해군의 후원에 힘입었다. 광해군 즉위 직후 시행한 대표적 민생 구제책인 대동법은 잡다한 공납을 단순화했다.
이아무개기자: 광해군에게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러 가지 악행을 일삼은 폭군이라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뛰어난 정치가, 즉 현실적인 중립외교를 편 현명한 왕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럼 이렇게 상반된 견해가 나오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저자: 폭군이라고 생각되는 주 이유가 왕권강화를 위해 형인 임해군을 제거하고, 동생인 영창대군을 유배 보내 결국은 죽게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유교사상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였다는 것. 이렇게 들 수 있다. 실제로 이 이유로서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이 폐위되었다.
그리고 또다른 입장이 나오게 되는데, 광해군은 명, 청 교체기에서 현실적인 중립외교를 펼친 현명한 왕이라는 견해가 그 또 다른 입장이다. 어떻게 이렇게 상반된 견해가 나오게 되는 것일까? 광해군이 집권할 당시 조선의 상황을 보면 이렇게 상반된 견해가 나온 원인에 대해 알 수 있다. 광해군은 현실적으로 왕이 될 입장이 아니었다. 형인 임해군이 있었던 데다가 그 배다른 아우인 영창대군은 선조가 아끼는 왕자였으니까 밀이다. 하지만 임해군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데다가 영창은 왕위를 이어받기에는 너무 어렸다.
이런 이유로 뜻밖의 왕위가 광해군에게 돌아간 것이다. 그럼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광해군을 왕위에 오르게 한 결정적인 집권세력인 북인, 즉 대북파는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짐) 자신의 지지세력인 광해군을 지키기 위해서 원인이 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야 했을 것이다. 그 결과로서 임해군의 제거와 영창대군의 유배, 인목대비의 폐위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본다면 왕권이 약했던 그 당시 북인의 말을 광해군이 거스르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어떻게 본다면 이 사건들은 북인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이아무개기자: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유명한데 그 배경과 전개과정을 설명부탁 드립니다.
저자: 광해군이 집권할 당시의 정치는 탁월한 것이었다. 그 당시 동북아의 정세를 살펴본다면 명이 임진왜란때 조선출병으로 힘이 약해진 것을 틈타 후금이 강성해진 상황이었다. 광해군은 약해질대로 약해진 명의 손을 의리로서 계속 들어줄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으로 강성해진 후금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 것도 없이 광해군은 후금과 명 사이에서 뛰어난 중립외교를 펼쳤다.
이아무개기자: 그렇다면 왜 광해군은 왜 왕이 아니라 군으로 남게 되었을까요?
저자: 광해군은 우여곡절 끝에 조선의 15번째 임금으로 등극하게 되지만 끝내 임금의 자리를 지키지는 못했다. 이른바 인조반정으로 인해 역사의 패배자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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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3페이지
  • 등록일2012.10.17
  • 저작시기2012.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7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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