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깡 <성관계는 없다>에 대하여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라깡 <성관계는 없다>에 대하여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①<성관계는 없다>소개
②참고자료
③'성적 차이의 실재'-슬라보예 지젝

본문내용

연결이나 겹침을 보증해 주지 않으며, 그런 까닭에 오직 부분적이고 우연한 매듭-증상만이 그 두 영역의 제한되고 허약한 조화를 산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리스 폰 트리에의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 남성적인 남근-자위적 충동의 향유와 여성적인 타자의 향유 사이의 이러한 대립의 분명한 사례를 보지 않는가? 병상에 누워 있는 얀은 베스에게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그 경험을 자기에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그녀가 그의 생존의 의지를 일깨우리라는 것이다. 얀의 향유는 명백히 남근적/자위적이다. 그는 유아론적자위적 향유에 몰두할 수 있으려면 필요한 환상의 스크린을 제공받으려고 베슬 이용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베스는 베스는 타자(상징적 질서)의 층위에서, 다시 말해 그녀의 말에서 향유를 발견한다. 그녀에게 만족의 궁극적인 원천은 성행위 자체(그녀는 순전히 기계적으로, 필요한 희생이라고 여기고 그러한 행위에 관계한다)가 아니라 불구인 얀에게 그에 대해 보고하는 그 방식이다. 베스의 향유는 한 가지 방식 이상으로 \'타자\'의 향유다.
\'영-제도로서의 성적 차이\'
세미나XX에서 성 구분 공식의 기초가 되는 성적 차이라는 개념은 \"성적 관계와 같은 그런 것은 없다\"라는 라캉의 명제와 정확히 같은 뜻이다. 성적 차이는 \'정적인\' 상징적 대립과 포함/배제(동성애와 여타 \'성 도착들\'을 종속적인 역할로 분류하는 이성애적 규범성)의 견고한 집합이 아니라 곤경,트라우마,열린 질문의 이름이다. 그것은 곧 그것을 상징화하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하는 어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적 차이의 \'비역사적\'지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아마도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영-제도\'와의 유비가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구조 인류학에서 그레이트 레이크 지역의 부족들 중 하나인 윈네바고족 가운데서 나타나는 건물의 공간적 배치에 대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범례적인 분석을 말하고 있다. 그 부족은 두 개의 하위집단으로 나뉘는데, \'위쪽에 있는 사람들\'과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이다. 그 부족의 한 구성원에게 자기 촌락의 평면도를 그려 보라고 하면, 우리는 그 또는 그녀가 어떤 하위집단에 속해 있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두 개의 상당히 다른 답변을 얻게 된다. 달리 말해 첫째 하위집단의 구성원은 촌락의 평면도를 중앙 사원을 둘러싸고 대체로 대칭적으로 배치된 움막들의 원환으로 파악하는 반면, 둘째 하위집단의 구성원은 자기 촌락을 보이지 않는 경계에 의해 분리된,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움막들의 집합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여기서 레비-스트로스는 더욱더 결정적인 주장으로 나아간다. 그 두 하위 집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같은 부족을 구성하고 같은 촌락에 살고 있는 까닭에, 이 동일성은 어떻게든 상징적으로 기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동일성의 상징적 기입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독창적이게도 \'영-제도\'라 부른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 영-제도는 아무런 실정적규정적 기능도 없다. 그것의 유일한 기능은 그 자신은 부재하면서도, 즉 전사회적인 카오스이면서도 반대로 그 자신이 사회제도 자체의 현존과 실제성을 표시하는 순전히 부정적인 기능이다. 이 영-제도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이데올로기가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 그것은 사회적 적대가 제거된 채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자기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중립적포괄적인 공간을 제공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의 직접적 구현이 아니겠는가? 다시 성적 차이로 돌아가서, 나는 동일한 영-제도의 논리가 어쩌면 한 사회의 결속뿐만 아니라 적대적 분열에도 적용되어야 하리라는 가설을 무릅쓰고픈 유혹을 느낀다. 성적 차이가 궁극에는 인류의 사회적 분열의 일종의 영-제도라면, 즉 자연화된 최소한의 영-차이라면, 그러니까 어떤 규정적인 사회적 차이를 표시하기에 앞서 이 차이 자체를 표시하는 하나의 분열이라면 어찌될 것인가? 그렇다면 다시금 헤게모니 투쟁은 이 영-차이가 다른 특정한 사회적 차이에 의해 어떻게 과잉결정될 것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이 될 것이다. 통상적으로는 간과되었던 것이나, 라캉의 기표 도식의 중요한 특징을 우리는 이러한 배경에 의거해 해석해야 할 것이다. 라캉은 기표의 변별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우선 소쉬르의 단일 기표 도식을 한 쌍의 기표로 대체한다. 그것은 신사/숙녀의 대립, 즉 성적 차이다. 그러나 진짜 놀라운 것은 상상적 지시대상의 층위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사실에 있다.
\'탈세속적 사유\'? 아니, 됐어!
라캉은 세마나 XX에서 종교적 문제틀을 강력하게 복권시킨다. 그렇지만 본래적인 라캉의 실재 개념의 배경에 의거하여, 우리는 레비나스에 대한 모종의 데리다적 전유에서 궁극적으로 표현되는 이른바 해체의 \'탈세속적\'전환이, 왜 그것을 옹호하는 몇몇 지지자들이 레비나스의 타자를 라캉의 사물과 연결시키려고 그렇게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라캉과 전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요점은, 이 해체적 제스처의 궁극적인 결과로 영성의 새롭고도 해체할 수 없는 형식을 위한, 즉 존재론에 앞서는 무조건적인 타자성과의 관계를 위한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인간 주체의 근본적인 경험이 자기-현전의 경험, 즉 모든 타자성을 변증법적으로 매개-전유하는 힘에 대한 경험이라기보다는 본원적인 수동성과 감지력의 경험, 반응의 경험이라면, 즉 결코 실정적 특질을 획득하지 않으며 항상 물러나 있는 타자성의 부름에 대한, 그것 자체의 부재의 흔적에 대한 무한한 부채와 책임의 경험이라면 어찌될 것인가? 즉 탈세속적 해체는 우리에게 신이 깃들어 있는 종교적 모체가 아닌 이 모체 자체를, 그것을 지탱하는 신의 실정적 형상을 탈취한 채로 제공한다. 그와 똑같은 배치가 마르크스주의 정신에 대한 데리다의 \'충실성\'에서도 다음과 같이 반복된다. \"적어도 나의 관점에서 해체는 하나의 급진화로서만, 다시 말하면 어떤 마르크스주의 전통 안에서만, 어떤 마르크스주의의 정신 안에서만 그 의미와 중요성이 있었다. 여기서 첫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떻게 이 \'급진화\'가 어구와 정신 사이의 전통적인 대립에 의존하고 있는가이다. 즉 마
  • 가격1,4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2.11.12
  • 저작시기2012.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7538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