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윤동주의 삶과 시
◎ 윤동주
◎ 윤동주 연보
◎ 16세 처음으로 시를 쓰다.
◎ 연희전문학교 시절
◎ 동경 생활
◎ 천재 시인의 죽음
◎ 윤동주와 송몽규의 생애
◎ 나의 의견
윤동주의 시 세계
1)자기 분열과 자기 탐색
2)기독교 사상
3)사랑의 정신
◎ 윤동주
◎ 윤동주 연보
◎ 16세 처음으로 시를 쓰다.
◎ 연희전문학교 시절
◎ 동경 생활
◎ 천재 시인의 죽음
◎ 윤동주와 송몽규의 생애
◎ 나의 의견
윤동주의 시 세계
1)자기 분열과 자기 탐색
2)기독교 사상
3)사랑의 정신
본문내용
원고가 된 것은 정병욱 보관본이다.
일제의 탄압에 고향집에서는 성씨를 <히라누마>라고 <창씨>하다.
1942년
도일 수속을 위하여 연희전문에 창씨계를 제출하다.
1월 24일 『참회록』은 고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되다.
일본에 건너가 동경 입교대학 문학부 영문과 선과에 입학하다.
입교대학 시절 『쉽게 쓰여진 詩』를 비롯 5편을 서울의 한 친구에게 우송하다. 오늘날 발견할 수 있는 마지막 작품이다.
- 여름방학 마지막으로 고향에 다녀가다. 이따 동생들에게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악보까지라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한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려고 차표를 사놓고 짐까지 부쳐놓고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다. 많은 책과 작품, 일기가 압수되다.
1944년
독립운동 죄로 징역 2년의 언도를 받다. 복강형무소에 투옥되다.
1945년
2월 18일 오전 3시 36분 옥중에서 사망하다.
3월 6일 용정의 동산 교회 묘지에 묻히다.
8월 15일 사망한지 반 년 만에 일제가 패망함으로 해방이되다.
◎ 16세 처음으로 시를 쓰다.
은진중학 일,이학년 때 동주는 윤석중의 동요와 동시에 깊이 빠져 있었다. 문익환 목사는 동주의 동시들 가운데 날짜가 기입되지 않는 작품은 1934년 12월 24일 이전의 것이라고 말한다. 1934년 12월 24일 이후 그는 그의 작품 끝에 항상 창작 일자를 부기해 놓고 있다. 윤동주의 시적 세계가 이미 이 무렵부터 싹트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창작 일자를 성실하게 기록해 둔 것을 보면 그 당시의 시대적 여건을 의식하는 그의 시정신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김수복, 윤동주의 삶과 시 별의 노래, 한림원, 1995, pp.62-63.
초 한 대
초한대 -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유년 시절부터 신앙심이 독실하였던 그는 그의 시적 출발도 종교적 이미지를 형상화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934년 성탄 전야에 쓴 것으로 된 「초 한 대」는 그의 신앙적 태도를 보여주는 첫 작품이다.
그가 의식적으로 밝혀 둔 12월 24이로 기독교적 분위기가 절정을 이루는 때였다.「초 한 대」의 시적 분위기는 신앙적 태도가 바탕에 깔려 있다. 어둠을 몰아내고 빛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과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위대한 향내’를 풍기는 촛불의 이미지가 바로 그의 기독교 의식을 말해준다. 김수복, 윤동주의 삶과 시 별의 노래, 한림원, 1995, pp 140-142.
◎ 연희전문학교 시절
● 윤동주 문학의 개화기 - 윤동주는 1938년 3월에서 1941년 12월 연희전문을 졸업할 때까지 약 서른세 편의 작품을 썼다. 그만큼 연희전문 시절은 그의 시적편력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기간이었다. 참고로 연희전문 시절에 쓰여진 작품을 들여다보면 「서시」,「자화상」,「또 다른 고향」,「간」,「별 헤는 밤」,「소년」,「슬픈 족속」등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애독되고 있는 시들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연희전문 시절은 윤동주 문학의 개화기라고 할 수 있다. 연희전문의 민족의식이 깔린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 정신과 더불어 자유사상을 익힌 그는 마음껏 민족의 얼을 시적 상상력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김수복, 윤동주의 삶과 시 별의 노래, 한림원, 1995, p 84.
● 고민과 갈등 - 졸업반인 동주로서는 모든 생활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진학에 대한 고민, 시국에 대한 불안, 가정에 대한 걱정 등 모든 일이 겹치고 겹쳐서 동주는 이때 무척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이러한 고민과 갈등이 그의 시를 심화시키는 외재적 영향으로 작용했음이 그의 시에 드러나고 있다.「돌아와 보는 밤」,「간판 없는 거리」,「태초의 아침」,「또 태초의 아침」,「새벽이 올 때까지」,「십자가」,「바람이 불어」등 그의 대표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시들이 이 무렵에 쓰여졌는데, 이러한 시들이 담고 있는 내용 속에는 일제의 가열된 억압의 현실과 그에 대응하는 비장한 시적 감수성이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김수복, 윤동주의 삶과 시 별의 노래, 한림원, 1995, pp 92-93.
◎ 동경 생활
「흰 그림자」는 동경 시절의 첫 번째 작품이다. 입교대학 입학 후 열이틀 만에 쓰여졌다. 윤동주도 역시 쓸쓸함과 굴욕감을 겪고 또 견뎌내어야 했을 것이다. 「흰 그림자」다음으로 5월 12일에 쓰여진 「흐르는 거리」, 5월 13일에 쓰여진 「사랑스런 추억」이 모두 그리움과 향수에 시달리는 젊은이의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수복, 윤동주의 삶과 시 별의 노래, 한림원, 1995, p 182.
쉽게 씌여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가 1942년 6월 3일자로 쓴 「쉽게 씌어진 시」는 그가 동경에서 느낀 고독과 억압을 훌륭하게 시적으로 승화시킴으로써, 그의 시의 정점을 느끼게끔 한다. 김수복, 윤동주의 삶과 시 별의 노래, 한림원, 1995, p 185.
◎ 천재 시인의 죽음
윤동주는 1943년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귀향 날짜를 간도의 집에 전보로 알렸다. 그리고 역에서 출발을 기다리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판결이 끝나자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1945년 2월 적국의 싸늘한 감옥 속에서 스물아홉의
일제의 탄압에 고향집에서는 성씨를 <히라누마>라고 <창씨>하다.
1942년
도일 수속을 위하여 연희전문에 창씨계를 제출하다.
1월 24일 『참회록』은 고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되다.
일본에 건너가 동경 입교대학 문학부 영문과 선과에 입학하다.
입교대학 시절 『쉽게 쓰여진 詩』를 비롯 5편을 서울의 한 친구에게 우송하다. 오늘날 발견할 수 있는 마지막 작품이다.
- 여름방학 마지막으로 고향에 다녀가다. 이따 동생들에게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악보까지라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한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려고 차표를 사놓고 짐까지 부쳐놓고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다. 많은 책과 작품, 일기가 압수되다.
1944년
독립운동 죄로 징역 2년의 언도를 받다. 복강형무소에 투옥되다.
1945년
2월 18일 오전 3시 36분 옥중에서 사망하다.
3월 6일 용정의 동산 교회 묘지에 묻히다.
8월 15일 사망한지 반 년 만에 일제가 패망함으로 해방이되다.
◎ 16세 처음으로 시를 쓰다.
은진중학 일,이학년 때 동주는 윤석중의 동요와 동시에 깊이 빠져 있었다. 문익환 목사는 동주의 동시들 가운데 날짜가 기입되지 않는 작품은 1934년 12월 24일 이전의 것이라고 말한다. 1934년 12월 24일 이후 그는 그의 작품 끝에 항상 창작 일자를 부기해 놓고 있다. 윤동주의 시적 세계가 이미 이 무렵부터 싹트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창작 일자를 성실하게 기록해 둔 것을 보면 그 당시의 시대적 여건을 의식하는 그의 시정신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김수복, 윤동주의 삶과 시 별의 노래, 한림원, 1995, pp.62-63.
초 한 대
초한대 -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유년 시절부터 신앙심이 독실하였던 그는 그의 시적 출발도 종교적 이미지를 형상화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934년 성탄 전야에 쓴 것으로 된 「초 한 대」는 그의 신앙적 태도를 보여주는 첫 작품이다.
그가 의식적으로 밝혀 둔 12월 24이로 기독교적 분위기가 절정을 이루는 때였다.「초 한 대」의 시적 분위기는 신앙적 태도가 바탕에 깔려 있다. 어둠을 몰아내고 빛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과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위대한 향내’를 풍기는 촛불의 이미지가 바로 그의 기독교 의식을 말해준다. 김수복, 윤동주의 삶과 시 별의 노래, 한림원, 1995, pp 140-142.
◎ 연희전문학교 시절
● 윤동주 문학의 개화기 - 윤동주는 1938년 3월에서 1941년 12월 연희전문을 졸업할 때까지 약 서른세 편의 작품을 썼다. 그만큼 연희전문 시절은 그의 시적편력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기간이었다. 참고로 연희전문 시절에 쓰여진 작품을 들여다보면 「서시」,「자화상」,「또 다른 고향」,「간」,「별 헤는 밤」,「소년」,「슬픈 족속」등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애독되고 있는 시들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연희전문 시절은 윤동주 문학의 개화기라고 할 수 있다. 연희전문의 민족의식이 깔린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 정신과 더불어 자유사상을 익힌 그는 마음껏 민족의 얼을 시적 상상력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김수복, 윤동주의 삶과 시 별의 노래, 한림원, 1995, p 84.
● 고민과 갈등 - 졸업반인 동주로서는 모든 생활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진학에 대한 고민, 시국에 대한 불안, 가정에 대한 걱정 등 모든 일이 겹치고 겹쳐서 동주는 이때 무척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이러한 고민과 갈등이 그의 시를 심화시키는 외재적 영향으로 작용했음이 그의 시에 드러나고 있다.「돌아와 보는 밤」,「간판 없는 거리」,「태초의 아침」,「또 태초의 아침」,「새벽이 올 때까지」,「십자가」,「바람이 불어」등 그의 대표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시들이 이 무렵에 쓰여졌는데, 이러한 시들이 담고 있는 내용 속에는 일제의 가열된 억압의 현실과 그에 대응하는 비장한 시적 감수성이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김수복, 윤동주의 삶과 시 별의 노래, 한림원, 1995, pp 92-93.
◎ 동경 생활
「흰 그림자」는 동경 시절의 첫 번째 작품이다. 입교대학 입학 후 열이틀 만에 쓰여졌다. 윤동주도 역시 쓸쓸함과 굴욕감을 겪고 또 견뎌내어야 했을 것이다. 「흰 그림자」다음으로 5월 12일에 쓰여진 「흐르는 거리」, 5월 13일에 쓰여진 「사랑스런 추억」이 모두 그리움과 향수에 시달리는 젊은이의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수복, 윤동주의 삶과 시 별의 노래, 한림원, 1995, p 182.
쉽게 씌여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가 1942년 6월 3일자로 쓴 「쉽게 씌어진 시」는 그가 동경에서 느낀 고독과 억압을 훌륭하게 시적으로 승화시킴으로써, 그의 시의 정점을 느끼게끔 한다. 김수복, 윤동주의 삶과 시 별의 노래, 한림원, 1995, p 185.
◎ 천재 시인의 죽음
윤동주는 1943년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귀향 날짜를 간도의 집에 전보로 알렸다. 그리고 역에서 출발을 기다리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판결이 끝나자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1945년 2월 적국의 싸늘한 감옥 속에서 스물아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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