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큰 날개를 붙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천사가 가져온 꽃을 받아서 가슴에 안고 꺽어진 장미꽃과 마른 꽃뿌리와 다른 모든 꽃 위에 입을 맞추어 주시니까 꽃은 모두 일시에 기꺼운 소리를 치고 하나님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노래소리는 어느 때까지든 유창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죽어서 천사가 된 아헤의 소리도 말렀던 화초의 소리도 그 속에섞여 있었습니다.(안더-슨 집에서 역)
방정환은 왜 안데르센의 〈천사〉를 그 당시 우리 아이들에게 읽히려 했을까. 〈천사〉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쉽게 방정환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천사에 등장하는 자연물이나 사람이나 모두 뭔가 중심에서 밀려나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바로 일제시대 우리 어린이들, 우리 빼앗긴 자연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방정환은 이런 〈천사〉같은 동화를 통해서 이렇게 고통받는 존재들에게 뭔가 구원의 희망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끝모를 어둠속에 내던져저서 어찌할 수 없이 해체된 존재가 되어 버렸지만, 그 고통의 어둠을 지나고 나면 우리는 언젠가는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안겨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방정환은 아동문학은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동문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희망, 다시말해 부활의 정신을 길러주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안데르센의 〈천사〉는 어린 아이들에게 한 번쯤 읽어줄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천사〉라는 동화가 갖고 있는 긍정적인 면과 아울러, 역시 이 동화가 갖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고통받던 아이들이 나중에 하늘에 올라가 구원을 받는 이런 구조를 옛이야기에서는 '감천부활구조'라고 한다. 하늘이 감동하여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구원해준다는 것이다.(《한국설화연구》. 최운식. 집문당.1991. 230쪽)
옛이야기나, 창작동화나 그 문학이 갖고 있는 본질은 결코 다르지 않다. 아이들에게 부활의 정신을 길러주는 문학이 되어야 하는 건 아동문학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의무인데, 그 부활에는 다음 두 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옛이야기 형식에서 자주 보이는 감천부활구조가 있을 것이요,또 하나는 창작동화에서 보이는 뭔가 납득할만한 인과관계를 갖고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부활구조가 있을 것이다.
감동을 주는 창작동화는 〈천사〉에서 보는 것처럼 하늘로 올라가 구원을 받는다는 이런 식의 조금은 종교에서 따온 듯한 도식적인 관념에 의존하기 보다는 삶의 현장 안에서 그 목숨이 서로 부대끼며 이어지는 과정을 하나의 이야기로 승화시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부활의 정신을 아이들에게 감동깊게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라면 이원수의 〈루루와 라일락〉이라든가, 〈쑥〉, 그리고 권정생의 〈강아지똥〉이나, 윤기현의 〈서울로 간 허수아비〉같은 작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방정환은 1931년에 세상을 떠났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아깝다. 그래서 방정환은 누구에게나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될 것이다. 방정환이 소년운동을 시작하면서 이런 〈천사〉를 번안하여 새해를 맞이하는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려 한 것을 보면 우리에게 영원히 청년으로 기억되는 방정환의 그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방정환이야 말로 그 당시 누구보다도 난쟁이로 상징될 수 있는 그 어렵고 힘든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사람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자기 온 몸을 던진 방정환은 결코 자기 스스로 영웅이 되려한 사람이 아니었다. 방정환은 영원히 낮은 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존재하려한 그야말로 어린 난쟁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어린이로 존재하려 한 방정환을 뒤에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한 사람의 영웅으로 만들어 놓고, 그 영웅의 그늘 안에 안주하려는 자세를 보이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방정환은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되며, 그 자신 영원히 어린이로 부활하여 자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그 생명을 이어가는 열린 존재인 것이다.
방정환이 그 당시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이야기를 얼마나 겸손하게 수용하였는 지는 한정동이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소금쟁이〉란 동요가 일본사람의 작품을 번안한 번안동요인지, 아니면 창작동요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던 그 당시 동아일보 문단시비란(1926.9.23 이후)에 실렸던 소금쟁이 논쟁만 봐도 알 수 있다. 방정환은 엉뚱하게 소금쟁이 논쟁에서 표절시비에 말려들게 되었는데, 그때 방정환이 보인 태도를 봐서도 충분히 알 수는 것이다.
사제는 먹히는 존재'라는 말이 있는데, 어찌 종교의 길을 걷는 사제들분일까. 방정환이야말로 그 당시 어린이들에게 완전히 먹힌 존재였다. 그래서 어린이들의 가슴에서 영원히 부활한 생명의 존재인 것이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도 말을 했지만 이제 우리는 너무 조급하게 쫓기듯이 앞으로만 달려가는 발걸음을 조금 멈추고,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비추어 보기 위해서라도 방정환의 삶과 문학속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
방정환은 그 자신 스스로 어린이의 삶과 문학을 위해 먹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한 사람이니, 방정환이 어린이의 삶에 던진 그 열정, 그리고 그 열정을 바탕으로 해서 벌였던 여러 가지 운동의 결과들을 하나 하나 곱씹어 먹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방정환의 삶과 문학이 우리들 가슴에도 들어와 하나의 씨앗이 되어 꽃피어나게 해야 할 것이다.
요즘 같이 우리 아동문학운동이 겉보기에는 상당히 화려하고 분주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같은데 그 내용을 보면 너무나 속이 비어있는 허전한 상황에서 새삼 방정환의 삶과 문학이 그립고 소중하게 생각된다.
방정환이 번안하였던 외국동화에 대하여 이 밖에도 여러 작품을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사〉라는 작품 하나만을 살펴보았는데 방정환의 삶과 문학에 대해서 앞으로도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편집자의 부탁을 받고 한 번을 쓰기로 하였는데, 두서 없이 이야기를 하다 두 달이나 쓰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이야기할 자리를 내가 빼앗은 것 같아 여간 죄송한게 아니다.
// 아동문학평론가 이재복 글
방정환은 왜 안데르센의 〈천사〉를 그 당시 우리 아이들에게 읽히려 했을까. 〈천사〉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쉽게 방정환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천사에 등장하는 자연물이나 사람이나 모두 뭔가 중심에서 밀려나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바로 일제시대 우리 어린이들, 우리 빼앗긴 자연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방정환은 이런 〈천사〉같은 동화를 통해서 이렇게 고통받는 존재들에게 뭔가 구원의 희망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끝모를 어둠속에 내던져저서 어찌할 수 없이 해체된 존재가 되어 버렸지만, 그 고통의 어둠을 지나고 나면 우리는 언젠가는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안겨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방정환은 아동문학은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동문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희망, 다시말해 부활의 정신을 길러주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안데르센의 〈천사〉는 어린 아이들에게 한 번쯤 읽어줄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천사〉라는 동화가 갖고 있는 긍정적인 면과 아울러, 역시 이 동화가 갖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고통받던 아이들이 나중에 하늘에 올라가 구원을 받는 이런 구조를 옛이야기에서는 '감천부활구조'라고 한다. 하늘이 감동하여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구원해준다는 것이다.(《한국설화연구》. 최운식. 집문당.1991. 230쪽)
옛이야기나, 창작동화나 그 문학이 갖고 있는 본질은 결코 다르지 않다. 아이들에게 부활의 정신을 길러주는 문학이 되어야 하는 건 아동문학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의무인데, 그 부활에는 다음 두 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옛이야기 형식에서 자주 보이는 감천부활구조가 있을 것이요,또 하나는 창작동화에서 보이는 뭔가 납득할만한 인과관계를 갖고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부활구조가 있을 것이다.
감동을 주는 창작동화는 〈천사〉에서 보는 것처럼 하늘로 올라가 구원을 받는다는 이런 식의 조금은 종교에서 따온 듯한 도식적인 관념에 의존하기 보다는 삶의 현장 안에서 그 목숨이 서로 부대끼며 이어지는 과정을 하나의 이야기로 승화시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부활의 정신을 아이들에게 감동깊게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라면 이원수의 〈루루와 라일락〉이라든가, 〈쑥〉, 그리고 권정생의 〈강아지똥〉이나, 윤기현의 〈서울로 간 허수아비〉같은 작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방정환은 1931년에 세상을 떠났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아깝다. 그래서 방정환은 누구에게나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될 것이다. 방정환이 소년운동을 시작하면서 이런 〈천사〉를 번안하여 새해를 맞이하는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려 한 것을 보면 우리에게 영원히 청년으로 기억되는 방정환의 그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방정환이야 말로 그 당시 누구보다도 난쟁이로 상징될 수 있는 그 어렵고 힘든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사람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자기 온 몸을 던진 방정환은 결코 자기 스스로 영웅이 되려한 사람이 아니었다. 방정환은 영원히 낮은 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존재하려한 그야말로 어린 난쟁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어린이로 존재하려 한 방정환을 뒤에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한 사람의 영웅으로 만들어 놓고, 그 영웅의 그늘 안에 안주하려는 자세를 보이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방정환은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되며, 그 자신 영원히 어린이로 부활하여 자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그 생명을 이어가는 열린 존재인 것이다.
방정환이 그 당시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이야기를 얼마나 겸손하게 수용하였는 지는 한정동이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소금쟁이〉란 동요가 일본사람의 작품을 번안한 번안동요인지, 아니면 창작동요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던 그 당시 동아일보 문단시비란(1926.9.23 이후)에 실렸던 소금쟁이 논쟁만 봐도 알 수 있다. 방정환은 엉뚱하게 소금쟁이 논쟁에서 표절시비에 말려들게 되었는데, 그때 방정환이 보인 태도를 봐서도 충분히 알 수는 것이다.
사제는 먹히는 존재'라는 말이 있는데, 어찌 종교의 길을 걷는 사제들분일까. 방정환이야말로 그 당시 어린이들에게 완전히 먹힌 존재였다. 그래서 어린이들의 가슴에서 영원히 부활한 생명의 존재인 것이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도 말을 했지만 이제 우리는 너무 조급하게 쫓기듯이 앞으로만 달려가는 발걸음을 조금 멈추고,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비추어 보기 위해서라도 방정환의 삶과 문학속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
방정환은 그 자신 스스로 어린이의 삶과 문학을 위해 먹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한 사람이니, 방정환이 어린이의 삶에 던진 그 열정, 그리고 그 열정을 바탕으로 해서 벌였던 여러 가지 운동의 결과들을 하나 하나 곱씹어 먹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방정환의 삶과 문학이 우리들 가슴에도 들어와 하나의 씨앗이 되어 꽃피어나게 해야 할 것이다.
요즘 같이 우리 아동문학운동이 겉보기에는 상당히 화려하고 분주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같은데 그 내용을 보면 너무나 속이 비어있는 허전한 상황에서 새삼 방정환의 삶과 문학이 그립고 소중하게 생각된다.
방정환이 번안하였던 외국동화에 대하여 이 밖에도 여러 작품을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사〉라는 작품 하나만을 살펴보았는데 방정환의 삶과 문학에 대해서 앞으로도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편집자의 부탁을 받고 한 번을 쓰기로 하였는데, 두서 없이 이야기를 하다 두 달이나 쓰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이야기할 자리를 내가 빼앗은 것 같아 여간 죄송한게 아니다.
// 아동문학평론가 이재복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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