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세
1. 국제정세
2. 베르사이유 체제
1) 파리 강화회의
2) 각국의 이해관계
3. 베르사이유 체제 이후의 평화 조약들
1) 생제르망(St. German) 조약
2) 느이(Neuilly) 조약
3) 트리아농(Trianon) 조약
4) 세브르(Svres) 조약
4. 워싱턴 체체
Ⅲ. 결론
참고문헌
Ⅱ.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세
1. 국제정세
2. 베르사이유 체제
1) 파리 강화회의
2) 각국의 이해관계
3. 베르사이유 체제 이후의 평화 조약들
1) 생제르망(St. German) 조약
2) 느이(Neuilly) 조약
3) 트리아농(Trianon) 조약
4) 세브르(Svres) 조약
4. 워싱턴 체체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일본 세력을 견제하려는 열강의 전략상의 필요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목적을 지닌 '워싱턴회의'는 1921년 11월에 시작되었다. 1922년 2월까지 미국을 비롯한 9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중국, 벨기에, 네델란드, 포르투갈)이 참가한 이 회의는 해군군축, 태평양 문제, 그리고 극동 문제 등 다양한 내용을 다루었으며, 6개의 조약과 태평양에 관한 1개의 4개국 선언과 12개의 결의안을 낳았다.
먼저 '주력함 축소회의'에서는 주력함의 건조를 중지하고 각국의 보유량의 비율을 정했다. 각국은 英 5:美 5:日 3:佛 1.67:伊 1.67의 비율로 주력함을 보유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비율은 종래 해군력의 절대 우위를 자랑하던 영국으로서는 커다란 양보였는데, 대서양에서는 영국이 패권을 쥐되, 태평양에서의 패권은 미국에 양보하겠다는 영국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말하자면 '워싱턴회의'는 양 대양에서의 의기투합된 美, 英 양국이 대서양에서의 프랑스와 태평양에서의 일본 해군력의 신장을 억제하기 위해 합의한 결과인 것이다.
둘째는 '태평양에 관한 문제'이다. 미국은 일본의 중국 대륙 진출을 견제하고 아시아의 문호개방과 기회균등을 내세우는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위배되는 '英日동맹'을 폐기시키려 하였다. 英日동맹은 1902년 체결되어 1905년과 1911년에 각각 연장되어 양국간의 관계를 이끌어 주었는데, 1904년 러일전쟁에서 주로 일본을 위해 작동하였고, 1차대전 때는 주로 영국의 목적을 위해 작용하였다. 그러나 대전 후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양국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미국의 개입에 의해 1921년 '워싱턴회의'에서 폐기되었다. '英日동맹'의 폐기는 해군군축의 압력과 함께 열강의 일본에 대한 고립화와 견제정책을 의미하며, 이는 일본 국내정치의 불만의 원인으로 대두되었고, 극우적인 군벌세력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는 '극동에서의 중국의 위상에 관한 문제'이다. '베르사이유회의'에서 좌절을 경험한 중국은 그에 동정적인 미국의 주도하에 개최되는 '워싱턴회의'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국권회수를 위한 기회로 삼았다. 중국은 자국내 열강의 세력범위를 철폐함으로써 문호개방과 기회균등을 철저히 시행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의도는 태평양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려는 미국의 '문호개방선언'과 부합되었으며, 이는 1922년 2월의 제 6차 총회에서 결정된 '9개국 조약'에 잘 나타나 있다. '9개국 조약'은 중국의 영토보존과 문호개방, 그리고 기회균등의 원칙을 명문화하였으며, 일본의 중국에 대한 특수이익을 인정한 美,日간의 '석정-랜싱협약'이 폐기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일본으로부터 산동반도를 돌려받고 1921년의 中,日간의 21개조 요구를 일부 거절할 수 있게 되었다.
9개국 조약의 성립은 미국에게도 큰 수확이었다. 이는 미국이 여지껏 주장해온 '문호개방선언'을 정식조약으로 승인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정치에 있어서 강력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제1차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는 베르사이유체제를 주축으로 한 유럽질서와 미국이 주도하는 워싱턴 체제가 병존하는 가운데 안정과 혼란이 겹친 양상을 보였다. 베르사이유 체제는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영토의 분할을 통하여 英,佛 등의 전승국에게만 유리한 현상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워싱턴 체제는 태평양의 신흥 세력인 미국과 아시아의 신흥세력인 일본이 태평양에서의 이해를 상호 조정한 뒤 강대국 외교에 입각해 세계질서를 재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31년의 만주사변, 상해사변, 中日전쟁에 이어 제2차대전을 통해 혹심한 국가적인 어려움을 겪은 중국이 워싱턴 체제 이후 세계 5대국의 하나로 부상, 아시아 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워싱턴회의는 군비축소시도가 최초로 성공한 회의였다. 그러나 워싱턴회의는 英, 美 양국이 공동전선에 의하여 일본의 퇴각을 강요한 만큼 일본의 불만이 커 일본의 각 신문은 주력함 비율, 산동반환, 영일동맹의 폐기 등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였다.
Ⅲ. 결론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난 후, 국제 사회는 가급적이면 서로간의 충돌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국제연맹을 통한 집단안보체제와 워싱턴 체제를 필두로 하는 군비협상이 그 예로 볼 수 있으나, 1930년대에 있었던 대공황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상황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베르사이유 체제의 최대 피해국인 독일과, 전승국들 사이에서 소외되었던 이탈리아 등지에서 전체주의 국가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전체주의 국가의 등장은 1919~1939년 사이의 국제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기를 불러일으켰다.
국제 사회에 대한 간섭보다는 고립주의를 내세운 미국과, 독일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한 프랑스, 그리고 유럽에서 프랑스의 패권 장악을 막는데에만 몰두한 영국 등이 서로 맞물려가면서 대공황이라는 변수로 인해 독일은, 히틀러라는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의 등장으로 이들 국가간의 갈등을 교묘히 이용하여 베르사이유 체제의 붕괴를 의도했고, 어느 정도의 성공을 가져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독일 의도의 성공이란 것은 독일 그 자체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인류 사회에 미친 영향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독일이 의도한 것들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여러 국가들이 지키고자 하였던 평화체제가 무너져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고, 인류는 다시 한 번 더 전쟁의 회오리 속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김용구, 『세계외교사하』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0
노명식이광주 역, 『20세기 현대사』 청람 1981
리히트하임,G,유재건 역,『유럽현대사』 백산서당 1982
마우,H.,오인석 역, 『독일현대사』 1981
미쉘, H.,김용자 역, 『제2차세계대전』 탐구당 1986
윌리엄 카,『독일근대사』,이민호강철구 역, 탐구당, 1988
이범석,「바이마르 공화국의 역사 : 독일 민주주의의 좌절」『조의설 기념논총』, 1967
이주영,「베르사이유 조약과 대독 배상문제」『서양사론 78합집』, 1967
콘,H.,민석홍 역, 『현대사』 을유문화사 1958
휴즈,H.스튜어트, 박성수 역, 『서양현대사』
먼저 '주력함 축소회의'에서는 주력함의 건조를 중지하고 각국의 보유량의 비율을 정했다. 각국은 英 5:美 5:日 3:佛 1.67:伊 1.67의 비율로 주력함을 보유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비율은 종래 해군력의 절대 우위를 자랑하던 영국으로서는 커다란 양보였는데, 대서양에서는 영국이 패권을 쥐되, 태평양에서의 패권은 미국에 양보하겠다는 영국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말하자면 '워싱턴회의'는 양 대양에서의 의기투합된 美, 英 양국이 대서양에서의 프랑스와 태평양에서의 일본 해군력의 신장을 억제하기 위해 합의한 결과인 것이다.
둘째는 '태평양에 관한 문제'이다. 미국은 일본의 중국 대륙 진출을 견제하고 아시아의 문호개방과 기회균등을 내세우는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위배되는 '英日동맹'을 폐기시키려 하였다. 英日동맹은 1902년 체결되어 1905년과 1911년에 각각 연장되어 양국간의 관계를 이끌어 주었는데, 1904년 러일전쟁에서 주로 일본을 위해 작동하였고, 1차대전 때는 주로 영국의 목적을 위해 작용하였다. 그러나 대전 후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양국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미국의 개입에 의해 1921년 '워싱턴회의'에서 폐기되었다. '英日동맹'의 폐기는 해군군축의 압력과 함께 열강의 일본에 대한 고립화와 견제정책을 의미하며, 이는 일본 국내정치의 불만의 원인으로 대두되었고, 극우적인 군벌세력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는 '극동에서의 중국의 위상에 관한 문제'이다. '베르사이유회의'에서 좌절을 경험한 중국은 그에 동정적인 미국의 주도하에 개최되는 '워싱턴회의'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국권회수를 위한 기회로 삼았다. 중국은 자국내 열강의 세력범위를 철폐함으로써 문호개방과 기회균등을 철저히 시행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의도는 태평양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려는 미국의 '문호개방선언'과 부합되었으며, 이는 1922년 2월의 제 6차 총회에서 결정된 '9개국 조약'에 잘 나타나 있다. '9개국 조약'은 중국의 영토보존과 문호개방, 그리고 기회균등의 원칙을 명문화하였으며, 일본의 중국에 대한 특수이익을 인정한 美,日간의 '석정-랜싱협약'이 폐기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일본으로부터 산동반도를 돌려받고 1921년의 中,日간의 21개조 요구를 일부 거절할 수 있게 되었다.
9개국 조약의 성립은 미국에게도 큰 수확이었다. 이는 미국이 여지껏 주장해온 '문호개방선언'을 정식조약으로 승인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정치에 있어서 강력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제1차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는 베르사이유체제를 주축으로 한 유럽질서와 미국이 주도하는 워싱턴 체제가 병존하는 가운데 안정과 혼란이 겹친 양상을 보였다. 베르사이유 체제는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영토의 분할을 통하여 英,佛 등의 전승국에게만 유리한 현상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워싱턴 체제는 태평양의 신흥 세력인 미국과 아시아의 신흥세력인 일본이 태평양에서의 이해를 상호 조정한 뒤 강대국 외교에 입각해 세계질서를 재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31년의 만주사변, 상해사변, 中日전쟁에 이어 제2차대전을 통해 혹심한 국가적인 어려움을 겪은 중국이 워싱턴 체제 이후 세계 5대국의 하나로 부상, 아시아 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워싱턴회의는 군비축소시도가 최초로 성공한 회의였다. 그러나 워싱턴회의는 英, 美 양국이 공동전선에 의하여 일본의 퇴각을 강요한 만큼 일본의 불만이 커 일본의 각 신문은 주력함 비율, 산동반환, 영일동맹의 폐기 등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였다.
Ⅲ. 결론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난 후, 국제 사회는 가급적이면 서로간의 충돌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국제연맹을 통한 집단안보체제와 워싱턴 체제를 필두로 하는 군비협상이 그 예로 볼 수 있으나, 1930년대에 있었던 대공황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상황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베르사이유 체제의 최대 피해국인 독일과, 전승국들 사이에서 소외되었던 이탈리아 등지에서 전체주의 국가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전체주의 국가의 등장은 1919~1939년 사이의 국제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기를 불러일으켰다.
국제 사회에 대한 간섭보다는 고립주의를 내세운 미국과, 독일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한 프랑스, 그리고 유럽에서 프랑스의 패권 장악을 막는데에만 몰두한 영국 등이 서로 맞물려가면서 대공황이라는 변수로 인해 독일은, 히틀러라는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의 등장으로 이들 국가간의 갈등을 교묘히 이용하여 베르사이유 체제의 붕괴를 의도했고, 어느 정도의 성공을 가져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독일 의도의 성공이란 것은 독일 그 자체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인류 사회에 미친 영향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독일이 의도한 것들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여러 국가들이 지키고자 하였던 평화체제가 무너져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고, 인류는 다시 한 번 더 전쟁의 회오리 속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김용구, 『세계외교사하』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0
노명식이광주 역, 『20세기 현대사』 청람 1981
리히트하임,G,유재건 역,『유럽현대사』 백산서당 1982
마우,H.,오인석 역, 『독일현대사』 1981
미쉘, H.,김용자 역, 『제2차세계대전』 탐구당 1986
윌리엄 카,『독일근대사』,이민호강철구 역, 탐구당, 1988
이범석,「바이마르 공화국의 역사 : 독일 민주주의의 좌절」『조의설 기념논총』, 1967
이주영,「베르사이유 조약과 대독 배상문제」『서양사론 78합집』, 1967
콘,H.,민석홍 역, 『현대사』 을유문화사 1958
휴즈,H.스튜어트, 박성수 역, 『서양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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