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철학,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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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예술철학,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ffection)이다. 다시 말하면, 신이라는 말뿐인 소리(signifiant, 중세의 의미에서 flatus vocis)에 개념 설정(signifie)이 덧붙여져서, 그것이 갑자기 존재론적으로 대상이 될 뿐만이 아니라(가벼운 반질거리는 종이조각 위의 그림 일뿐 것이) 인식론적으로 과거를 담고 미래에 참여하는 의미(그림 속에 추억과 삶의 흔적에 대한 이야기와 미래의 희망에 부풀었던 아련한 기억이 솟아나는 것으로)가 생겨난다. 이런 측면에서 완성과 충만에로의 의미를 들뢰즈(Deleluze, 1921-1955)는 『차이와 반복(1969)』에서 첨가한다(soutirer), 사색한다(contempler), 문제 제기한다(questionner) 라고 말한다. 인간이 왜 무의미한 한 장의 복사된 그림에서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를 투영하게될 때, 하찮은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의미를 창발한다. 마치 무의식이 의식으로 솟아나려는 것과 같기에 때문에, 꿈과 실언, 실수행위, 나아가 어린이의 행동, 미친 이의 이상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프로이드가 의미 있다고 했듯이, 예술 작품에서 솟아오르는 이 새로운 창발은 그만큼 의미 있다. 이의미가 플라톤이 최고미에서 이루어지는 미로서 \'미의 신성\'과 같은 의미 일 것이다. 이 신성이 인식론적으로 최고라고 한다고 해서, 진리의 최고치, 도덕의 최고선, 종교의 최고 성스럼과 같은 위계 속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메타퍼에 속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 서로 위상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메타퍼에 속지 말자. 플라톤이 진리를 설명할 때조차도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우화처럼 메타퍼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언어의 번역불가능성처럼, 종교의 성스럼을 언어로 말할 수 없다고 말했듯이. 예술의 미도 개념적으로 정의해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가 말(parole)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쓴다. 그래서 말로 표현되면서 개념에 이미 아우라가 묻어들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화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이미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가끔 예술가가 자기 작품을 만들다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중간에 버리는 작품을 깨끗이 사라지게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듣곤 했다. 마치 한인간이 살아가다가 자신의 미래를 더 이상 이어가거나 생성 발전해나갈 수 없다는 포기로서 끝을 맺고 그리고 사라지고자 원할 때 어떤 흔적도 남김없이 사라지고자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될까? 19세기 생물학이 발전함에 따라, 살아온 생명의 과정과 최고의 완성도(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를 죽음에서 보고 다음세대도 이를 거쳐간다고 하면, 죽음의 끝은 물질적 발전 과정으로서 매우 중요하고, 그 최고치의 연구는 다음에 투영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의 이 글인 초고도 휴지통으로 사라져 없어져 버릴 한갓 헛된 것일 지라도, 이 홈페이지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삶에서 밟고 지나가는 것만큼, 그 문제에 대해 발전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난제는, 유전의 방식을 인정하는 자에 한에서 그 인간이 과거의 조상의 과거를 잊고 일정부분을 다시 학습(수련)함에도 불구하고, 누구(조상의 계보)의 유전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전은 논리처럼 단일 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분배적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분배적 차이는 외연의 차이가 아니라, 실질(hyle)과 내용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 각각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누구나 다르다, 같기 때문이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평등과 자유를 이야기한다. 이 다르다는 것은 계급적 위계가 아니라 위상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지배한다 말인가? 사는 노력만큼, 개혁과 혁명의 노력만큼 세상을 변형(transformation)시킬 수 있다. 보수라는 이름 앞에 개혁적 혁명적이란 접두어로 위장하는 것은 보수자가 자신의 길을 밟고 지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은 당연하다, 누가 죽기를 바라는가? 그러나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인간을 스스로 반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 텔레스의 사상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부터 말하겠습니다
고대그리스때 플라톤이라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플라톤은 참된 세계는 이데아 세계라면서
이데아 세계란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 가능한 영원 불변의 참다운 세계라고 정의했고
현상의 세계(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는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가변적이고 일시적인 세계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이원론적 세계관이라고 하는데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 즉 이데아 세계,이원론적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본질의 세계는 현실 속에 잠재되어 있다는 말로 일원론적 세계관을 내세우며
\"실재로 존재하는 구체적인 세계\"를 현상계라고 말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세계관은 \'목적론적 세계관\'으로써
\"모든 사물은 어떤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라면서
인간의 존재 방식인 이성에 알맞은 덕스러운 활동을 강조했고 여기서 이성을 중시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대표적인 사상은 \'주의주의\'와 \'중용의 덕\'이 있습니다
우선 주의주의부터 말할께요
마찬가지로 고대그리스때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너 자신을 알라\"라고 한분)
소크라테스는 \"무엇이 올바른지 아는 사람은 그 아는 것을 행한다.\"
\"그릇된 행위는 선악이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無知)에서 비롯된다.\"
\"덕은 지식의 결과이고, 악덕은 무지의 산물\"
이라고 했는데요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주지주의\'를 강조했다는 겁니다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란 한마디로 악한 행동은 알지 못함에서 오니깐 알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주장(주지주의)를 받아들이면서 한가지 더 보탭니다.
바로 주의주의 인데요. 주의주의란 선한 행동을 할 때는 아는 것만으로 안되고 실천하려는 선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용의 덕이 있습니다
중욕의 덕이란 이성에 의해 정욕 등을 억제함으로써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의지를 습관화한 덕입니다.
말이 좀 어렵죠? 예를 들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전쟁중이라고 칩시다
치열한 전투가 있는 도중에 우리쪽이 압도적으로 불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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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88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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