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나라의 남북 분열의 원인에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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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스라엘 나라의 남북 분열의 원인에대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수도를 유다와 이스라엘의 중간 지점이며 유다에게도 이스라엘에게도 속해 있지 않았던 여부스 족속의 도시인 예루살렘으로 옮겨 유다와 이스라엘을 공평하게 통치하려 애를 썼다.
(2) 야웨 종교의 상징(iconography)이며 이스라엘 지파들과 사울왕조가 존중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예루살렘을 남북종교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유다지역 출신으로 추정되는 레위인들을 지방 행정관으로 기용함으로써 다윗의 이스라엘 통치력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통일정책을 통해 다윗은 정치적으로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 놓았지만 다윗 왕국에는 여전히 구분된 유다와 이스라엘이 존재해 있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환궁할 때 유다사람, 이스라엘 사람, 베냐민 사람등이 개별적으로 다윗을 영접한 것을 볼 때 적어도 유다와 이스라엘이 별개의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삼하 19:40-43).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때 다윗은 솔로몬이 \"이스라엘과 유다의\"(왕상 1:35) 왕이 될 것을 선언하였고 솔로몬의 통치 영역을 묘사할 때도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왕상 4:25) 등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을 구분하여 언급하였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구분은 오랜 역사를 지닌 구분이었으며 정치적인 남북 분열은 다만 이러한 구분을 표면화 시킨 것이었다.
2. 예루살렘과 지파의 구분 - 정치적 요인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것은 아도니야와 왕위 계승 투쟁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 솔로몬을 지지한 인물들을 보면, 제사장 사독, 예언자 나단, 왕비 밧세바, 용병대장 브나야 및 다윗왕 직속의 용사들 등으로 주로 예루살렘 출신 인물들과 외국인 용병들을 포함한 다윗왕의 친위부대 소속 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도니야를 지지한 인물들을 보면, 민병대장 요압, 아나돗 출신의 제사장 아비아달 등으로 주로 지파들을 지휘하고 지도하는 인물들이었다. 솔로몬이 왕위를 차지함으로써 예루살렘을 중심한 집단들의 위상은 한층 더 높아졌으며 지파들의 위상과 세력은 상대적으로 낮아질 수 밖에 없었고 예루살렘과 지파간의 괴리 현상은 점점 더 심화되어 갔다. 솔로몬이 즉위할 때 당연히 있어야 할 \"지파들에 의한 기름부음\"이 없었다는 것은 이 괴리현상을 명백히 보여주는 실례이다(왕상 1:39).
사실 이 괴리현상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 성을 \"다윗의 성\"이라 불렀을 때 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그 때까지 그 곳에 살고 있었던 여부스 족속을 그대로 남겨 두었으며 예루살렘을 다윗의 직할 성읍 내지 다윗 개인의 사유지로 만들었다. 다윗의 통치 방식은 지파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운영되었다기 보다 다윗 직속의 용병부대들의 활약을 중심한 통치 방식이었으며 많은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 시켰지만 통치는 예루살렘을 중심한 방식이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통치하였고 지파들을 소외 시켰지만, 다윗 역시 유다 지파 출신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을 우선적으로 기용한 면은 찾아 볼 수 있다. 유다지역 출신으로 여겨지는 레위인들을 영토 전역에 지방 행정관으로 파견하여 왕국의 행정을 이끌어 갔으며 예루살렘이 유다 지역에 있었으므로 당연히 유다는 다른 어느 지파보다도 친다윗의 경향을 띨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다지파도 다윗왕실을 옹호하는데 있어서는 적극적이라기 보다는 소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북분열 때 유다지파는 다윗왕조인 르호보암 편에 섰지만 반란을 일으킨 이스라엘의 지파들과 대항한 흔적이 없고 이스라엘 지파들의 쿠테타 슬로건에도 유다를 공격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 다윗에게 우리의 분깃이 어디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
우리가 상속할 것이 없다. 오 이스라엘아 너희들의 장막
으로 ! 다윗이여 너는 이제 너의 집이나 돌아보라.\"
(왕상 12:16 [삼하 20:1] )
미미한 지파였던 유다는 유다출신인 다윗의 상승으로 다른 어느 지파보다도 다윗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으며 이로 인해 남북분열 때 소극적인 자세 였지만 다윗왕실과 보조를 같이 하였다. 남북분열로 유다왕국과 이스라엘왕국은 서로 나누어 졌지만 이스라엘은 유다에게 화살을 겨냥하지 않았고 예루살렘에 있었던 다윗왕실을 겨냥하였다. 즉 이스라엘의 지파들과 유다지파는 구분되어 있었지만 이 모든 지파들이 예루살렘과는 또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다윗왕조의 지파들과 거리를 두고 존재 해왔던 \"다윗의 성 예루살렘\"이라는 독특한 요인이 결국 남북분열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3. 종교적 요인
여로보암이 솔로몬 휘하에서 요셉 족속의 부역 감독관으로 있었을 때 실로 출신 예언자 아히야가 장차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10지파의 왕이 될 것이라 예언 하였고 이 예언은 공개적인 예언으로 솔로몬도 알게 되어 여로보암은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왕상 11:29-40). 아히야의 예언은 단순한 종교적 권면이 아니라 다윗 왕조에 대한 반역 행위를 유발 시킬 수도 있었으며 반역 행위를 지지하는 강력한 정치적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대변하는 역할도 하였다.
야웨 종교의 기원을 분명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북쪽에서의 야웨 종교는 실소 성소에 있었던 법궤의 모습속에서 그 초기의 일면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울의 몰락과 다윗의 상승으로 이스라엘 지파들의 종교적 상징인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버렸으며 실소 성소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렘 26:9). 예루살렘에 야웨 성전이 세워지고 법궤가 예루살렘 성전에 안치됨에 따라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몰려 들었고 이로 인해 지파들의 지방 성소들은 점점 종교적 세력이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레위인들이 지방 행정관으로써 또한 종교적 지도자로써 지방에서 행세를 하는 것도 지방 종교 지도자로써는 못마땅한 노릇이었다.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는 실로를 비롯한 지방성소들의 종교 지도자들은 다윗왕조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고 급기야 아히야같은 인물이 반역의 행동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남북 분열 이후 이스라엘에서 취한 종교정책은 철저히 예루살렘 중심의 종교권력을 분산 시키고 예루살렘에 집중되는 순례행렬을 막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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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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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07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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