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누가 청교도(Puritans)들이었는가?
2. 청교도 전성기
3. 제임스 1세의 통치
4. 청교도 상위 시대
5. 청교도들의 이야기에 대한 해명
6. 청교도에서 추구하였던 영성
7. 청교도 운동의 종식
8. 청교도의 지속적인 영향
2. 청교도 전성기
3. 제임스 1세의 통치
4. 청교도 상위 시대
5. 청교도들의 이야기에 대한 해명
6. 청교도에서 추구하였던 영성
7. 청교도 운동의 종식
8. 청교도의 지속적인 영향
본문내용
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기간(1588~1603)에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대진리들을 강조하는 목회자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들의 강조점은 성경 말씀에 충실하기, 강해 설교, 목회적 돌봄, 개인 경건과 생활 전반에 걸친 실제적인 거룩이었다. 청교도라는 말은 이처럼 철저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쓰여지기 시작했다. 경건한 자들 혹은 명칭만의 교인이 아닌 자들을 청교도라고 불렀다. 또한 복음을 귀히 여기고 복음 전파에 힘쓰는 자들을 청교도라고 칭하였다. 성경의 경고처럼 경건한 자들은 그들의 거룩한 삶 때문에 놀림당할 것을 각오해야 했다. 그래서 당신의 경건한 교인에게는 \'흥을 깨는 사람\' 혹은 \'청교도\'라는 별명이 붙어 다녔다. 그러다가 청교도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가 부가되었다. 이것은 알마니안/칼빈주의 논쟁에서 기인되었다. 그 결과 은혜 교리를 따르는 잉글랜드의 목사들을 청교도라고 불렀다. 그래서 윌리엄 로드(William Laud)라는 대 주교가 목회자 승진 인사 목록을 올렸을 때 청교도들의 이름 옆에는 그들의 신앙 노선에 대한 경고로 청교도인 약자로 P자로 적고 다른 이름 옆에는 정통이라는 약자인 O자를 적었다. 이로써 대주교의 해석에 따라 결정된 정통 목사들은 승진이 가하다는 것이었는데 윌리엄 로드는 사실상 독단적인 알마니안주의자였다. 청교도라는 이름은 경멸의 명칭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1641년 헨리 파커는 \'교황파들, 감독들, 궁중간신들, 무대 시인들, 방랑 시인들, 광대들, 술주정꾼들, 불량배들 등등의 사람들을 청교도들\'이라고 실컷 놀려댔다.
2. 청교도 전성기
1603년과 1662년 사이의 기간은 격동기였다. 왕권과 의회가 갈라져서 급기야는 심니전쟁으로 비화되었다. 1640년대에는 종교적인 다원화 현상이 고개를 쳐들었다. 청교도 운동은 이 시기에 절정에 이르렀는데 특히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 이제 서술하려는 다음 다섯 가지 단계의 역사는 청교도 이해에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
첫 단계는 제임스 1세 통치,
둘째 단계는 찰스 1세와 로드 대주교,
셋째 단계는 시민 전쟁과 올리버 크롬웰의 활약
넷째 단계는 청교도 상위 시대
다섯째 단계는 군주제의 회복과 청교도의 쇠퇴이다.
3. 제임스 1세의 통치
엘리자베스 1세는 1603년 사망했다. 그녀는 잉글랜드를 대국으로 만들려고 힘썼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년는 성격이 고르지 못한 편이었다. 때때로 역정을 부리고 기분이 언짢으면 말을 하지 않으며 사리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통치는 정치적으로 안정을 가져왔다. 이것은 곧 이어지는 17세기 후반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적지 않은 업적이다. 앞에서 살폈듯이 17세기 초반의 청교도는 잉글랜드 국효회 목회자들의 약 10퍼센트에 불과했다 청교도들은 새왕(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라고 부르고, 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 1세라 칭함) 이 장로교가 국교인 스코틀랜드에서 왔기 때문에 교회 개혁에 동조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교도들은 1천
2. 청교도 전성기
1603년과 1662년 사이의 기간은 격동기였다. 왕권과 의회가 갈라져서 급기야는 심니전쟁으로 비화되었다. 1640년대에는 종교적인 다원화 현상이 고개를 쳐들었다. 청교도 운동은 이 시기에 절정에 이르렀는데 특히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 이제 서술하려는 다음 다섯 가지 단계의 역사는 청교도 이해에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
첫 단계는 제임스 1세 통치,
둘째 단계는 찰스 1세와 로드 대주교,
셋째 단계는 시민 전쟁과 올리버 크롬웰의 활약
넷째 단계는 청교도 상위 시대
다섯째 단계는 군주제의 회복과 청교도의 쇠퇴이다.
3. 제임스 1세의 통치
엘리자베스 1세는 1603년 사망했다. 그녀는 잉글랜드를 대국으로 만들려고 힘썼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년는 성격이 고르지 못한 편이었다. 때때로 역정을 부리고 기분이 언짢으면 말을 하지 않으며 사리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통치는 정치적으로 안정을 가져왔다. 이것은 곧 이어지는 17세기 후반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적지 않은 업적이다. 앞에서 살폈듯이 17세기 초반의 청교도는 잉글랜드 국효회 목회자들의 약 10퍼센트에 불과했다 청교도들은 새왕(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라고 부르고, 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 1세라 칭함) 이 장로교가 국교인 스코틀랜드에서 왔기 때문에 교회 개혁에 동조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교도들은 1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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