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여진족의 기원
3. 여진족의 문화와 사회
4. 금나라의 건국5. 금나라와의 통교 1) 사대관계 수립 2) 정치현안
(1) 보주영유와 서서문제 (2) 고려 사신의 금인 폭행사건 (3) 신왕 책봉문제 (4) 사신의 왕래 (5) 경제교류6. 맺음말
2. 여진족의 기원
3. 여진족의 문화와 사회
4. 금나라의 건국5. 금나라와의 통교 1) 사대관계 수립 2) 정치현안
(1) 보주영유와 서서문제 (2) 고려 사신의 금인 폭행사건 (3) 신왕 책봉문제 (4) 사신의 왕래 (5) 경제교류6. 맺음말
본문내용
을 취하지않는 이유는 당시 금의 국내 사정을 보면 부모지국인 고려로부터 충성의 서서를 받아내는 것이 황제권의 안정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으로 보여진다.하지만 당시 고려의 입장에서나 고려내 여론이나 정서로 보아 여진에 대하여 은위지국으로 대접받아온 고려가 금수와 다름없는 그들에게 조공을 바쳐야 하는 것도 불쾌한데, 게다가 충성의 서약을 바치게 된 상황에 이르자 사신으로 선발된 자들까지도 공공연히 군사 천 명만 주면 금을 치겠다는 소신을 피력할 정도로 금나라에 대한 반발이 팽배해져 갔다 “정강의 변”에서 증명되었듯이 실질적으로 송조차 황제가 인질로 만주에 잡혀가 있고 또 그들을 구해 내려고 고려에 와서 도움을 청하는 등의 처지로 전락한 사실을 확인한 고려로서는 더 이상 금측의 서서 요구를 묵살 할 수는 없었다. 요컨대 서서란 형식상의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당시 문화 전통이 미약한 금 황실에 있어서는 선진의 송이나 특히 그들의 부모와 같은 존재였던 고려로부터 국가의 운명을 거는 충성을 맹세한 국서를 받아내는 일이란 대외적으로 그들의 열등감을 씻어 주는 것이며 안으로는 황실의 지배력을 강화시켜 주는 것으로 형식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일이라 하겠다.(2) 고려 사신의 금인 폭행사건인종 6년 12월 보유사 한방 등이 와서 고려에 전한「보주문제」가운데 사은사(謝恩使) 인종 3년 12월에 고려를 출발하여 이듬해 정월 금조정에 도착하여 양국의 사대관계를 재확인하고 투입 인구의 쇄환이 불가능함을 전하였던 사행이었음.
김자류 일행이 금에 가서 일으킨 금인 폭행사건에 대한 배상금의 지불 요구가 있었다.
금 태종은 수교 직후 고려에서 보낸 사은사 일행이 금나라 사람을 죽인 사건에 대하여 당시 금 조정에서는 이들에 대하여 죄값보다 가벼운 형량으로 이 문제를 처리하여 돌려 보냈으나 이제 금률(金律)에 따라 피해자의 집에 배상금으로 우마(牛馬)와 은(銀)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이 사은사 일행 가운데 종자(從者) 숭길(崇吉)이 금나라 사람과 싸워 금의 도부서(都部署)에 체포되어 장형을 맞고 귀국한 적이 있었는데 고려는 이들이 귀국하자 왕명을 욕되게 한 죄로 책임자인 정사 김자류를 면직시키는 것으로 이 문제의 처리를 끝낸 바 있다.
그러나 금 태종은 그동안 파견된 여러 사신을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한 보상금의 송부를 촉구하였고, 1년이 넘도록 고려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이에 대한 배상을 독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이미 처벌된 사람을 다시 소급하여 벌을 가할 수는 없는 형법불소급(刑法不遡及)의 원칙을 주장하며 금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런데 이때 고려가 이들의 법 적용을 금인(金人)을 다치게 했다는 폭행죄에 적용한 것이 아닌 ‘왕명을 손상시킨 죄’에 따라 형을 가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즉 고려 조정은 종자 숭길이 무례하게 상국의 백성과 싸워 그를 다치게 하였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려왕을 대신해 사신으로 나간 김자류가 부하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여 이국에까지 가서 왕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죄목으로 탄핵하고 처벌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죄목에 따라 고려 조정은 관직자 김자류에게는 왕명을 손상시킨 죄로 직전(職田)을 몰수하고 관직을 박탈하고 귀향 조치 했으며, 폭행 당사자인 숭길은 사람을 다치게 한 죄에 의거해 처벌하였다.
이러한 양국의 입장차이 때문에 고려는 상해자에게 보상금을 지불하라는 금측의 요구에 대하여 이미 형을 집행한 사건이니 지금에 와서는 고급해 가중처벌을 할 수 없다고 하였고, 아울러 이미 죄 값을 치른 상태이므로 금률에 따라 피해자 집에 보상물로은과 우마를 보내라는 요구는 “도형(徒刑)과 속징(屬徵)은 겸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들며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제를 통해 우리는 당시 고려를 대표해 사신으로 간 사람조차 금에 대한 거부감이 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사건 당사자인 숭길은 관직자가 아닌 한갓 짐꾼이나 말단 수행원 정도에 지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며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인물로 보기는 어려다. 그러나 대외적인 공무를 수행한 사람으로서 상대국 사람과 싸우는 경우란 거의 드문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은 그만큼 고려인들의 대금인관(對金人觀), 즉 금건국 후에도 여진인을 무시하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 하겠다.
(3) 신왕 책봉문제
책봉(冊封)은 사대외교의 형식인 조공관계를 공표하는 대표적인 의례의 하나이다. 광종2년(951) 후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을 때 후주 세종이 광종을 고려 국왕에 책봉한 사례가 그 최초이다. 물론 고려가 화친의 뜻으로 사신을 보내면 상대편 국가에서 고려왕을 책봉하는 관례는 송과 거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초기 한중 관계에서부터 보여왔던「조공 - 책봉」의 절차 더구나 송과 거란은 통교 처음뿐만 아니라 고려가 조공을 할때마다, 혹은 그들 황제가 새로 즉위할 때, 연호를 바꿀 때, 상존호(上尊號)의 책예(冊禮)를 거행할 때도 고려왕을 가책(加冊)하였다. 따라서 성종과 문종의 경우는 처음 책봉 이외에 별도로 4회 이상의 가책을 받기도 하였음.
는 금나라와의 관계에서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금측은 송이나 거란이 고려의 조공사신을 맞이한 후 바로 고려 왕을 책봉한 것과 달리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에야 책봉을 하였으며, 가책의 사례는 한 번도 없었다. 당시 금의 국력이 남송과 고려의 유대가능성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는 점에서 책봉이 늦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서서(誓書)문제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의 금에 대한 태도가 의심스러운 측면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인종 사후 즉위한 의종에 대하여는 3년상을 마치자 마자 책봉사를 보내왔다. 하지만 무신집권기에 즉위한 왕들의 책봉은 고려측의 몇차례 즉위를 알리는 고주사(告奏使)와 책봉을 요구하는 청책사(請冊使) 등의 사신 왕래가 있은 후에야 책봉을 하였는데 이는 정상적이지 못한 왕위계승 때문이었다. 따라서 무신정권기에 가장 심각했던 외교현안은 신왕의 책봉문제였다. 하지만 명종에 대한 책봉으로 금의 고려에 대한 정책의 성격을 파악한 무신정권은 향후 최충헌에 의해 명종 신종이 강제 페위되고 신왕을 오
김자류 일행이 금에 가서 일으킨 금인 폭행사건에 대한 배상금의 지불 요구가 있었다.
금 태종은 수교 직후 고려에서 보낸 사은사 일행이 금나라 사람을 죽인 사건에 대하여 당시 금 조정에서는 이들에 대하여 죄값보다 가벼운 형량으로 이 문제를 처리하여 돌려 보냈으나 이제 금률(金律)에 따라 피해자의 집에 배상금으로 우마(牛馬)와 은(銀)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이 사은사 일행 가운데 종자(從者) 숭길(崇吉)이 금나라 사람과 싸워 금의 도부서(都部署)에 체포되어 장형을 맞고 귀국한 적이 있었는데 고려는 이들이 귀국하자 왕명을 욕되게 한 죄로 책임자인 정사 김자류를 면직시키는 것으로 이 문제의 처리를 끝낸 바 있다.
그러나 금 태종은 그동안 파견된 여러 사신을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한 보상금의 송부를 촉구하였고, 1년이 넘도록 고려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이에 대한 배상을 독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이미 처벌된 사람을 다시 소급하여 벌을 가할 수는 없는 형법불소급(刑法不遡及)의 원칙을 주장하며 금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런데 이때 고려가 이들의 법 적용을 금인(金人)을 다치게 했다는 폭행죄에 적용한 것이 아닌 ‘왕명을 손상시킨 죄’에 따라 형을 가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즉 고려 조정은 종자 숭길이 무례하게 상국의 백성과 싸워 그를 다치게 하였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려왕을 대신해 사신으로 나간 김자류가 부하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여 이국에까지 가서 왕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죄목으로 탄핵하고 처벌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죄목에 따라 고려 조정은 관직자 김자류에게는 왕명을 손상시킨 죄로 직전(職田)을 몰수하고 관직을 박탈하고 귀향 조치 했으며, 폭행 당사자인 숭길은 사람을 다치게 한 죄에 의거해 처벌하였다.
이러한 양국의 입장차이 때문에 고려는 상해자에게 보상금을 지불하라는 금측의 요구에 대하여 이미 형을 집행한 사건이니 지금에 와서는 고급해 가중처벌을 할 수 없다고 하였고, 아울러 이미 죄 값을 치른 상태이므로 금률에 따라 피해자 집에 보상물로은과 우마를 보내라는 요구는 “도형(徒刑)과 속징(屬徵)은 겸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들며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제를 통해 우리는 당시 고려를 대표해 사신으로 간 사람조차 금에 대한 거부감이 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사건 당사자인 숭길은 관직자가 아닌 한갓 짐꾼이나 말단 수행원 정도에 지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며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인물로 보기는 어려다. 그러나 대외적인 공무를 수행한 사람으로서 상대국 사람과 싸우는 경우란 거의 드문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은 그만큼 고려인들의 대금인관(對金人觀), 즉 금건국 후에도 여진인을 무시하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 하겠다.
(3) 신왕 책봉문제
책봉(冊封)은 사대외교의 형식인 조공관계를 공표하는 대표적인 의례의 하나이다. 광종2년(951) 후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을 때 후주 세종이 광종을 고려 국왕에 책봉한 사례가 그 최초이다. 물론 고려가 화친의 뜻으로 사신을 보내면 상대편 국가에서 고려왕을 책봉하는 관례는 송과 거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초기 한중 관계에서부터 보여왔던「조공 - 책봉」의 절차 더구나 송과 거란은 통교 처음뿐만 아니라 고려가 조공을 할때마다, 혹은 그들 황제가 새로 즉위할 때, 연호를 바꿀 때, 상존호(上尊號)의 책예(冊禮)를 거행할 때도 고려왕을 가책(加冊)하였다. 따라서 성종과 문종의 경우는 처음 책봉 이외에 별도로 4회 이상의 가책을 받기도 하였음.
는 금나라와의 관계에서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금측은 송이나 거란이 고려의 조공사신을 맞이한 후 바로 고려 왕을 책봉한 것과 달리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에야 책봉을 하였으며, 가책의 사례는 한 번도 없었다. 당시 금의 국력이 남송과 고려의 유대가능성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는 점에서 책봉이 늦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서서(誓書)문제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의 금에 대한 태도가 의심스러운 측면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인종 사후 즉위한 의종에 대하여는 3년상을 마치자 마자 책봉사를 보내왔다. 하지만 무신집권기에 즉위한 왕들의 책봉은 고려측의 몇차례 즉위를 알리는 고주사(告奏使)와 책봉을 요구하는 청책사(請冊使) 등의 사신 왕래가 있은 후에야 책봉을 하였는데 이는 정상적이지 못한 왕위계승 때문이었다. 따라서 무신정권기에 가장 심각했던 외교현안은 신왕의 책봉문제였다. 하지만 명종에 대한 책봉으로 금의 고려에 대한 정책의 성격을 파악한 무신정권은 향후 최충헌에 의해 명종 신종이 강제 페위되고 신왕을 오
키워드
추천자료
정치과정의 의의, 한국정치과정의 문제 및 한국정치과정의 개혁과제
2007년 2학기 한국경제의이해 중간시험과제물 A형(60~70년대 한국경제)
2007년 2학기 한국경제의이해 중간시험과제물 D형(한국농업경영변화)
2007년 2학기 한국경제의이해 중간시험과제물 C형(한국농업정책전개)
2006년 2학기 한국경제의이해 중간시험과제물 A형(60-70년대 한국경제)
2006년 2학기 한국경제의이해 중간시험과제물 B형(한국농업정책)
2006년 2학기 한국경제의이해 중간시험과제물 C형(한국농업변화)
2015년 1학기 한국사회문제 중간시험과제물 D형(한국 노동현실에서 중요한 현안)
[한국사회문제] 노동현장에서의 파견근로의 현황 문제점 과제 - 파견근로, 비정규직, 노동현...
2017년 1학기 한국사회문제 중간시험과제물 C형(한국 도시가 확장되는 과정에서의 문제점)
2017년 1학기 한국사회문제 중간시험과제물 B형(한국 사회에서 노년의 삶이 사회문제)
2017년 1학기 한국사회문제 중간시험과제물 E형(한국사회 노동현실의 문제점)
방통대 환경보건학과 한국사회문제 중간과제물 A형 한국사회 청년문제의 핵심
[한국어교육] 다문화 사회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국어교육의 해결과제와 발전방안에 대한 의견...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