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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높은 절벽 아래에 문득 솟아오른 바위에 새겨진 3기의 불상과 그 앞바위에 자리한 사방불 4기를 합해 칠불이 있다하여 불려진 것이다. 선방골의 배리삼존석불은 신선암의 마애보살과 달리 밝고 맑은 미소를 담고 있는 입체불이다. 불상은 포석정이 위치한 포석골 남쪽의 선방골 입구 보호각 속에 있다.그외 윤을골의 마애삼체불좌성, 장창골의 삼존불 불골의 여래좌상 탑골의 2개의 마애조상군이 있다. 남산은 신라 불상의 보고이자 신라 조각의 산실이었다, 그것은 남산이 작게 갈라지는 편마암으로 이루어진 경주 주변의 다른 산과 달리 화강암 바위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곳은 신라사람 경주사람에게 희망과 한이 담긴 산이기 때문이다. 남산 자락에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탄생하였고,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견훤에게 죽음을 강요받았다. 남산은 신라 건국의 성스러운 곳이자 신라 멸망의 한 맺힌 곳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흼아을 기원하고 한을 풀기 위해 수많은 불상과 보살상 탑을 만들어 놓거나 혹은 바위에 새겼다. 그들은 예술작품을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 절실한 삶을 표현 하였다. 그것은 그대로 부처가 살고 있는 불국토가 되었고 그속에서 희망과 한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었다. 신라가 멸망이후에도, 문화가 계승되어 온 것은 최치원의 사상이 큰 역할을 하였다. 최치원의 사상과 이념은 고려 사회에서 신라계 유학지식인들이 신라계승의식을 표방하여 고려 사회속에서 신라의 전통이 이어지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 인종 23년 왕명을 받아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찬술하였다. 인종시절은 사회 번영의 문화적 기념물이 요구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문벌귀족간의 갈등과 대립이 심했고 묘청의 난 이후 혼란한 사회를 수습하고 귀족의 횡포에서 새로운 왕권의 확립을 꾀하며 분열과 갈등을 국가멸망의 원인으로 강조하여 현실 비판의 뜻을 후세에 알리기위해 삼국사리의 편찬이 필요하였다. 이 책은 유교정치 이념의 실현만이 아니라 국가 안녕을 염원하고 구현하려는 차원에서 편찬되었다. 김부식 또한 임금의 선악 신하의 충성과 간사함 나라의 편안함과 백성의 행동을 후세에 전하기위해 삼국사기를 편찬 하였다. 조선시대의 경주문화권의 계승은 사림과 학맥으로 이어졌다. 경주에는 사림활동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서원이 일찍부터 건립되었는데, 임고서원,옥산사원,용계서원,서악서원,송곡서원,입암서원,도잠서원등 초기 사림 세력의 매개로 옥산서원에 배향된 이언적을 위시하여, 조호익 장현광 등이 이황의 학맥을 계승 하였다. 조선중기의 성리학자인 이언적은, 경주권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명망이 높던 유학자이다. 관직의 등용하였으나 이른 나이 쫓겨났다. 이언적은 조선조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만년에 유배지에서 구인록 대학장구보유 등의 성리학 저술을 남겼다. 경주는 근대로와 동학의 발상지로 주목되는 곳이기도 하다 최제우는 경주에서 동학을 창도하였다. 이는 조선 왕조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은 민중을 제도할 능력을 잃었고 서학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오게 되자 전통적 의식과 가치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동학이 민심을 기반으로 보국안민과 광제창생 사회적 종교로 대두한 배경에는 세관과 사회변동기의 불안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 점이 엄청난 사람들이 동학을 따른 이유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는 1911년 6월 조선 불교계를 장악하기 위해 사찰령을 공포 하였는데, 사찰령은 30개의 본사를 정하여, 총 사찰을 분리 관할하게 하였으며, 독립 사찰의 주지는 반드시 총독의 인가를 받은 흔히 말하는 친일파를 앉혀 사찰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둘째로는 사찰에 속한 토지 와 기타 귀중품들을 그 사찰 임의로 처분하지 못하게 하였다. 경주에는 기림사가 30본산의 하나로 지정되어 동화사 은해사 고운사 금룡사와 함께 경상북도의 사찰을 통제하였고, 경주 지역의 중심으로 14개 사찰을 관할 하였다. 일제에 억압된 처지였지만 그 속에서 저항의지가 기림사에서 자라났다. 기림사에의 방동화 스님은 198년 제주도 중문의 법정사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하고, 1945 5월 기림사를 비롯한 경북 5본산이 설립한 오산불교학교의 학생들이 일본군 입대거부, 독립운동과 연락 도모등을 결의하였다. 현재 기림사는 아직도 그 정취를 유지하고 있는데 특히 다섯 가지의 맛을 내는 물로 신체가 웅장해 진다는 장군수와, 물 맛이 좋다는 오탁수, 기골이 장대해지고 눈이 맑아지는 명안수, 마음이 편안해지는 화정수,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과 같다는 물 감로수가 있다. 그러나 장군수 조선시대에 이 물을 먹고 반역을 모의해서 이를 메웠다는 설과, 일제시절 장군의 출현을 두려하여 이를 막았다는 전설이 있다.일제강점기시절, 독립을 위한 희생을 한 집안이 있다. 경주 최부잣집은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 봤을 법한 집안이다. 부자의 올바른 표상이라고 할수 있는 최부잣집은 대부호로 12대를 유지해 왔었는데, 항상 6가지의 가훈은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구현한 것으로 이를 항상 실현하려 노력한 덕분에 민란 와중에도 최부잣집은 건드리는 일이 없어, 최부잣집이 오랫동안 만석지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라고 본다. 또 최부잣집은, 의병의 피난처 구실을 하였고, 마지막 최부잣집이라 할 수있는 최준은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에 거액의 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에 아낌없는 지원을 하였고, 동아일보의 발기와, 교육사업에 투자를 한 민족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2부로 경주읍성을 떠나 경주 북부 문화권(포항과 영천)에 대한 부분이다. 포항의 지세는 태백산맥의 준령이 서쪽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동해와 접하여 넓은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다. 포항은 일찍부터 울진 강릉으로 이어지는 신라의 북변 진출로가 되었다. 포항 또한 신라의 멸망이후, 여전히 신라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였는데, 현재로는 한국 철강 산업의 메카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영천은 원래 골벌국 이였다가, 신라에게 병합 되었다. 영천의 지리적 특성은 보현산, 팔공산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북주를 제외한 서,남,동쪽에는 금호강 유역을 따라 넓은 영천들이 자리하였기에 일찍이 농업이 발달 하였다고 한다. 이지역은 성리학 수용에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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