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 청동기시대 취락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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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고학] 청동기시대 취락에 대해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2-1 청동기 시대 마을의 입지靑銅器時代 聚落 立地
2-2 마을의 구조聚落 構造

3. 결론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다면 신전이나 공공 집회소로 이용 되었을 것이다.
고상건물지
망루
진주 대평리 고상 건물지
지상건물 도면
저장공
저장공은 청동기 시대 전기에는 주거지 내부에 설치했던 호형 또는 심발형深鉢形 토기에 곡물을 저장했던 형태로 단기적인 저장시설이었다면, 후기에는 주거지 내부의 저장공은 대부분 사라지고 주거지 외부에 보다 더 큰 형태의 저장공이 만들어졌다. 여러기가 일정한 장소에 모여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러한 저장공이 군집을 이루는 모습은 개별 주거단위가 아닌 주거군별로 또는 마을 단위로 이 저장공이 관리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청동기 시대에 들어오면서 농경이 발달하고, 그에따라 잉여생산물들이 더욱 증가하면서 이 생산물들을 일괄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을 느낀 것의 영향이라 하겠다. 이러한 저장공에는 조, 피, 수수, 보리등의 곡물을 보관한다는 의견이나 견과류나 근경류를 겨울철동안 동결되지 않도록 보관한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 곡물저장의 의견이 지배적이라 할 수 있다.
저장용 토기
저장용 토기
저장공
저장공
우물
물은 인간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우물은 청동기 시대 취락 구성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음료수로서나 다른 용수문제를 생각해 봤을 때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마을의 입지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경이 생활 양식의 주가 되고 입지의 다양화, 규모가 확대되면서 우물은 중요하게 부각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의 우물이 발견되어 인정되는 예는 드물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 유적으로는 논산 마전리의 목조 우물과 대구 동천동의 석조 우물을 들 수 있다
우물
농경지
청동기 시대에도 지금과 같은 논이나 밭이 존재했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농경생활은 언듯 들으면 미개하고 낮은 기술력을 가지고 있을 듯 하지만 의외로 경작지의 입지 선택이나 기술력이 미개하지는 않다. 당시의 논을 보자면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구획까지 되어있으며, 놀랍게도 울산 야음동과 논산 마전리에서는 계단식 논까지 발견되었다. 밭은 몇몇의 청동기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그 입지가 하천이 범람하는 지방의 자연제방이 많아 당시의 사람들이 토지가 비옥한 곳이 어딘지 알 정도의 농경기술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재배 작물은 조, 피, 기장, 수수, 콩 등의 작물을 생산하였고 고랑과 이랑의 흔적도 살펴 볼 수 있다.
환호
환호는 취락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랑으로, 환구環構라고도 불린다. 취락을 감싸는 형태의 도랑이 만들어지는 시점은 청동기시대부터이다. 이런 마을을 환호 취락이라고 하며 대표적 유적으로는 검단리 환호유적과 송국리 환호유적이 있다. 원래 형태는 도랑에 물을 채우고 그 안쪽에 나무로 목책을 세운 형태이다.
환호는 그 입지에 따라 평지형과 구릉·산지형으로 나눌 수 있으며 단면의 형태는 U자형과 V자형이 있다. 환호는 마을 방어의 의미가 크지만 평면적이라 그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환호의 기능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였고, 그에따라 이 환로를 상징적인 의미로 파악 하거나 동물로부터 방어, 혹은 마을을 구분하는 기능을 하였다고 추측하고 있다.
환호
이중환호
함정
청동기 시대의 함정은 몇 년 전 발견된 유적으로 을주 입암리에서 26개가 발견된 것이 대표적이다. 함정의 형태는 V자형이나 Y자형으로 동물들이 쉽사리 빠져나가지 못하는 형태이며 바닥에는 창을 꽂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구멍이 존재하였다.
을주 압암리 함정유적
함정
3. 결론
지금까지 청동기 시대의 마을과 마을의 구조에 관하여 살펴 보았다. 우리가 흔하게 문명이 발달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청동기 시대이지만 당시에도 인류는 생존을 위해 자신들을 발전시켜 왔다는 것을 이 문서를 작성하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고 정리하면서 알게 되었다. 당시의 그들에게도 문화가 존재 하였고 생활양식이 존재 하였으며 그들만의 규칙과 법칙 또한 존재 하였다.
구석기 시대에는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여 정착이 아닌 이동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주거생활 모습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석기 시대가 되고 농경이 시작되어 청동기 시대에 이르면 사회 전면에 많은 발전, 즉 도구 제작의 기술이나 농업기술, 문화적 발달이 일어나게 되면서 완전한 정착을 이루게 된다. 농경이 중심이다 보니 생활의 양식은 공동체 생활이 주가 되었고 이에 따라 공동체가 거주할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로써 만들어 지게 되는 것이 취락, 즉 마을의 개념이라 하겠다.
적절히 배치되고 분할된 청동기 시대의 마을 양식을 이전의 신석기 시대를 떠올리며 정리해 나가자 청동기 시대가 어떠한 발전을 해 왔는지 느낄 수 있었다. 청동기 시대는 청동이라는 도구로서의 진화 뿐 만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을 했다. 마을과 마을의 구조도 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까지 너무 현재적 관점에서만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대의 관점에서, 나의 잣대로 대상들을 평가하다 보면 과거나 미래에 대한 시각은 비틀리기 마련이다. 그렇다 보니 여태까지 과거에 대한 역사, 혹은 선사에 대해 너무 비관적인 관점으로 바라 본 것이 아닌가 싶다. 수준 낮고 비관적인 시각은 미개하고 비관적인 생각을 발생 시킨다는 것을 이번 과제를 통해 알게 된 듯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나는 청동기 시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미개하고 비관적으로 평가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4. 참고 문헌
-엄윤정, 강경환,「청동기 시대 취락과 주거의 건축적 특성에 관한 연구」19권 2호, 大韓建築學會, 1990
-도영아, 「경주지역 청동기 시대 취락의 입지와 생업에 대한 검토」文化史學27, 2007
-사석태, 「취락 내 공동마당 입지에 대한 고찰」청주대대학원, 2011
-김성식, 「청동기 시대 울산지역 집자리 배치에 대한 연구」,영남대대학원, 2010
-이형원, 「청동기 시대 거주와 취락 연구의 쟁점 검토」,고고학지 제16집, 2010
-이형원, 『청동기 시대 취락구조와 사회조직』서경문화사, 2009
-김백범, 「청동기 시대 전기 수혈유구의 성격과 취락」, 공주대대학원, 2009
-하진호, 「대구지역 청동기시대 취락연구」, 경북대대학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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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13.03.03
  • 저작시기2012.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3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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