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제주도의 선사시대
1) 구석기시대
2) 신석기시대
3) 청동기시대
3. 고대국가 탐라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1) 고대국가 탐라시대
2) 고려시대의 제주도
3) 삼별초의 항쟁
4) 조선시대의 제주도
4. 제주도의 민중 항쟁
1) 조선말기 제주도의 민란
(1) 제주도 민란의 배경
(2) 임술년 농민란
(3) 방성칠의 난
(4) 천주교의 난(신축년 항쟁, 이재수의 난)
(5) 제주도 민란의 성격과 의의
2) 세화리 해녀 투쟁
3) 제주도 4·3민중 항쟁
(1) 4·3항쟁의 배경
(2) 4·3항쟁의 전개
(3) 4·3항쟁의 성격과 의의
5. 맺음말
2. 제주도의 선사시대
1) 구석기시대
2) 신석기시대
3) 청동기시대
3. 고대국가 탐라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1) 고대국가 탐라시대
2) 고려시대의 제주도
3) 삼별초의 항쟁
4) 조선시대의 제주도
4. 제주도의 민중 항쟁
1) 조선말기 제주도의 민란
(1) 제주도 민란의 배경
(2) 임술년 농민란
(3) 방성칠의 난
(4) 천주교의 난(신축년 항쟁, 이재수의 난)
(5) 제주도 민란의 성격과 의의
2) 세화리 해녀 투쟁
3) 제주도 4·3민중 항쟁
(1) 4·3항쟁의 배경
(2) 4·3항쟁의 전개
(3) 4·3항쟁의 성격과 의의
5. 맺음말
본문내용
이 투쟁이 해녀인 여성들이 들고 일어선 투쟁이라는 점을 깊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3) 제주도 4·3민중 항쟁
(1) 4·3항쟁의 배경
제주도 4·3 항쟁은 남·북한 통일정부수립이라는 쟁점에 대하여 남로당의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그 시기를 같이하여 1948년 4월 3일,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뒤 최초로 발생한 반미무장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이 발발한 이유와 그 배경은 제주도의 민중들이 조선시대 말기부터 겪어야 했던 역사적 경험과 해방 당시 제주도에서 전개되었던 좌익계열의 활동과 미군정의 대한반도정책과 당시 해방후의 제주도의 사회, 경제적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서 일어나게 되었다.
(2) 4·3 항쟁의 전개
4·3 항재의 전개에 대한 설명은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하므로 여기에서는 항쟁에 대한 시기구분만 하기로 하겠다.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한라산과 제주지역의 89개 오름에 일제히 봉화가 오르면서 시작된 4·3 항쟁의 전개는 제주지역 해방공간의 전체적 상황전개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1946년의 상황은 민중의 자치정부 수립과 자주교육운영의 시기이고, 1947년 상황은 민주의 평화항쟁과 민중과 미군정의 대립시기이며, 1948년 상황은 본질적으로 민중이 미군정에 정면으로 맞서는 민중항쟁과 또한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단독정부수립 관철과 이에 비롯한 민중 대탄압의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구분은 주체들의 대응과 전략적 내용 및 객관적 정세변화와 상황변화를 고려한 것이다. 먼저 제 1시기는 민중과 남로당이 공동으로 미군정과 치열한 대결을 벌여 단선·단정 투쟁을 성공적으로 거부한 것이 가장 특징적인 양상이다. 제 2시기는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성립됨으로서 항쟁의 성격이 변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항쟁지도부가 축소되며 민중은 생존의 길로, 잔류 항쟁지도부는 방어적·고립적 게릴라전의 길로 나뉘어 간다. 아울러 이 시기에 미국의 조종, 지원을 받은 이승만 세력은 지속적인 대토벌작전과 민중대학살을 감행한다. 제 3시기는 항쟁지도부가 무너져 종결된다. 그리고 민중은 4·3공포증이라는 굴레를 짊어지게 되고 6·25전선에서 반공전사로서의 희생을 강요받게 된다.
(3) 4·3항쟁의 성격과 의의
4·3항쟁은 폭동, 반란, 민중수난, 무장투쟁, 민중항쟁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보는 시각에 따른 역사관의 차이에 기인한다. 민중적 관점에서 4·3항쟁의 본질을 캐내려면 항쟁의 주체와 내용 및 투쟁방법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상황 속에서 민중의 삶과 투쟁을 살펴야 한다.
항쟁의 주체는 민중이었다. 남로당이 일정한 문제제기와 투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은 민중이 삶 속에서 민중생존과 민족해방의 과제를 수용하고 통일운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였다. 민중이 항쟁의 주체가 된 원동력은 1945년에서 1946년 사이의 자치정부 구성과 자주교육의 운용과 1947년의 평화항쟁을 주체적으로 경험하였다는 데 있다. 그리고 4·3항쟁에서의 봉화투쟁과 삐라투쟁, 완벽한 단선거부의 투쟁에도 민중은 주체적으로 참여하였다. 따라서 4·3항쟁에서 민중과 남로당의 관계는 남로당은 지도세력이었고 민중은 실질적인 주도세력이었다.
항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의 세계지배전략과 미군정의 정책에 있다. 미군정은 한국의 점령자였고, 한국의 분단고착화를 추진했고 민중을 억압했다. 미군정이 해방공간에 제주지역에서 보여준 것은 잔인한 억압과 수탈이었다. 1945년에서 1946년 사이의 자치정부 및 자주교육의 와해와 서북청년단의 투입에 따른 무자비한 횡포, 1947년의 평화항쟁의 진압과 제2모스크바로의 규정, 분단구조화의 추진과 민중의 지지없는 단독정부의 추진 등은 미국의 전략과 정책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따라서 4·3항쟁의 원인은 미제국주의의 한반도 전략과 민중의 억압에 있다. 이 원인을 기본 축으로 인식할 때, 좌우의 대결은 부수적인 원인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전략에서 비롯되어짐이 명백해진다.
4·3항쟁의 성격은 민중의 생존을 위한 자치투쟁, 민중의 평화를 짓밟는 세력에 대한 항쟁, 민족의 통일을 저해하는 세력에 대한 자주 항쟁이다. 따라서 4·3항쟁은 역사적으로 이어 온 제주민중의 자치주의 사상과 민중의 평등을 이루려고 한 항쟁이었다.
제주도 4·3항쟁의 의의는 제주도라는 협소한 경계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 항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 속에서 식민구조를 부과하고 분단구조화를 꾀하려던 외세와 분단지향세력들에 저항했던 민족해방운동의 하나였다. 이 항쟁은 한국에서의 좌우익간 충돌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타 지역에서의 대결의 진행을 촉진하였고, 남로당으로 하여금 승리할 수 없는 때에 전면적인 무장투쟁으로 치닫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항쟁 주체가 민중이었다는데 있다. 4·3항쟁은 제주민중이 주체가 된, 제2차 세계대전 종전후 최초로 발생한 조직적인 반미무장투쟁의 성격을 갖는 민족해방투쟁이자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제주도는 우리나라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로서 자연 경관이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를 찾고 있다. 그러나 이곳으로 관광을 오는 이들은 제주의 태고적인 역사와 설화, 제주의 아픔을 기억하지 못하고 오직 재미와 즐거움을 찾고 있다. 이러한 것을 벗어 던지고 내 자신과 우리 학생들만이라도 제주를 올바르게 보고, 제주에 대하여 올바른 것을 우리의 민중들에게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제주인들이 섬사람으로서 육지 사람들에게 당한 억압은 역사와 민중들의 의례와 민요 등을 통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제주에 대하여 올바르게 인식하고 배우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참고문헌>
제주대학교박물관, 1993, 제주도의 상고문화.
고창훈외, 1991, 제주 기행, 백산서당.
김홍식외, 1988, 한국의 발견 - 제주도, 뿌리깊은 나무(한국 브리트래커사).
제주도 연구회, 1988, 제주도 연구 제5집.
제주도 연구회, 1989, 제주도 연구 제6집.
목포대학교 사학과 학생회, 1992, 92년 춘계 답사자료집.
고창훈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4, 한길사.
3) 제주도 4·3민중 항쟁
(1) 4·3항쟁의 배경
제주도 4·3 항쟁은 남·북한 통일정부수립이라는 쟁점에 대하여 남로당의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그 시기를 같이하여 1948년 4월 3일,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뒤 최초로 발생한 반미무장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이 발발한 이유와 그 배경은 제주도의 민중들이 조선시대 말기부터 겪어야 했던 역사적 경험과 해방 당시 제주도에서 전개되었던 좌익계열의 활동과 미군정의 대한반도정책과 당시 해방후의 제주도의 사회, 경제적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서 일어나게 되었다.
(2) 4·3 항쟁의 전개
4·3 항재의 전개에 대한 설명은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하므로 여기에서는 항쟁에 대한 시기구분만 하기로 하겠다.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한라산과 제주지역의 89개 오름에 일제히 봉화가 오르면서 시작된 4·3 항쟁의 전개는 제주지역 해방공간의 전체적 상황전개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1946년의 상황은 민중의 자치정부 수립과 자주교육운영의 시기이고, 1947년 상황은 민주의 평화항쟁과 민중과 미군정의 대립시기이며, 1948년 상황은 본질적으로 민중이 미군정에 정면으로 맞서는 민중항쟁과 또한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단독정부수립 관철과 이에 비롯한 민중 대탄압의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구분은 주체들의 대응과 전략적 내용 및 객관적 정세변화와 상황변화를 고려한 것이다. 먼저 제 1시기는 민중과 남로당이 공동으로 미군정과 치열한 대결을 벌여 단선·단정 투쟁을 성공적으로 거부한 것이 가장 특징적인 양상이다. 제 2시기는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성립됨으로서 항쟁의 성격이 변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항쟁지도부가 축소되며 민중은 생존의 길로, 잔류 항쟁지도부는 방어적·고립적 게릴라전의 길로 나뉘어 간다. 아울러 이 시기에 미국의 조종, 지원을 받은 이승만 세력은 지속적인 대토벌작전과 민중대학살을 감행한다. 제 3시기는 항쟁지도부가 무너져 종결된다. 그리고 민중은 4·3공포증이라는 굴레를 짊어지게 되고 6·25전선에서 반공전사로서의 희생을 강요받게 된다.
(3) 4·3항쟁의 성격과 의의
4·3항쟁은 폭동, 반란, 민중수난, 무장투쟁, 민중항쟁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보는 시각에 따른 역사관의 차이에 기인한다. 민중적 관점에서 4·3항쟁의 본질을 캐내려면 항쟁의 주체와 내용 및 투쟁방법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상황 속에서 민중의 삶과 투쟁을 살펴야 한다.
항쟁의 주체는 민중이었다. 남로당이 일정한 문제제기와 투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은 민중이 삶 속에서 민중생존과 민족해방의 과제를 수용하고 통일운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였다. 민중이 항쟁의 주체가 된 원동력은 1945년에서 1946년 사이의 자치정부 구성과 자주교육의 운용과 1947년의 평화항쟁을 주체적으로 경험하였다는 데 있다. 그리고 4·3항쟁에서의 봉화투쟁과 삐라투쟁, 완벽한 단선거부의 투쟁에도 민중은 주체적으로 참여하였다. 따라서 4·3항쟁에서 민중과 남로당의 관계는 남로당은 지도세력이었고 민중은 실질적인 주도세력이었다.
항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의 세계지배전략과 미군정의 정책에 있다. 미군정은 한국의 점령자였고, 한국의 분단고착화를 추진했고 민중을 억압했다. 미군정이 해방공간에 제주지역에서 보여준 것은 잔인한 억압과 수탈이었다. 1945년에서 1946년 사이의 자치정부 및 자주교육의 와해와 서북청년단의 투입에 따른 무자비한 횡포, 1947년의 평화항쟁의 진압과 제2모스크바로의 규정, 분단구조화의 추진과 민중의 지지없는 단독정부의 추진 등은 미국의 전략과 정책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따라서 4·3항쟁의 원인은 미제국주의의 한반도 전략과 민중의 억압에 있다. 이 원인을 기본 축으로 인식할 때, 좌우의 대결은 부수적인 원인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전략에서 비롯되어짐이 명백해진다.
4·3항쟁의 성격은 민중의 생존을 위한 자치투쟁, 민중의 평화를 짓밟는 세력에 대한 항쟁, 민족의 통일을 저해하는 세력에 대한 자주 항쟁이다. 따라서 4·3항쟁은 역사적으로 이어 온 제주민중의 자치주의 사상과 민중의 평등을 이루려고 한 항쟁이었다.
제주도 4·3항쟁의 의의는 제주도라는 협소한 경계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 항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 속에서 식민구조를 부과하고 분단구조화를 꾀하려던 외세와 분단지향세력들에 저항했던 민족해방운동의 하나였다. 이 항쟁은 한국에서의 좌우익간 충돌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타 지역에서의 대결의 진행을 촉진하였고, 남로당으로 하여금 승리할 수 없는 때에 전면적인 무장투쟁으로 치닫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항쟁 주체가 민중이었다는데 있다. 4·3항쟁은 제주민중이 주체가 된, 제2차 세계대전 종전후 최초로 발생한 조직적인 반미무장투쟁의 성격을 갖는 민족해방투쟁이자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제주도는 우리나라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로서 자연 경관이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를 찾고 있다. 그러나 이곳으로 관광을 오는 이들은 제주의 태고적인 역사와 설화, 제주의 아픔을 기억하지 못하고 오직 재미와 즐거움을 찾고 있다. 이러한 것을 벗어 던지고 내 자신과 우리 학생들만이라도 제주를 올바르게 보고, 제주에 대하여 올바른 것을 우리의 민중들에게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제주인들이 섬사람으로서 육지 사람들에게 당한 억압은 역사와 민중들의 의례와 민요 등을 통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제주에 대하여 올바르게 인식하고 배우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참고문헌>
제주대학교박물관, 1993, 제주도의 상고문화.
고창훈외, 1991, 제주 기행, 백산서당.
김홍식외, 1988, 한국의 발견 - 제주도, 뿌리깊은 나무(한국 브리트래커사).
제주도 연구회, 1988, 제주도 연구 제5집.
제주도 연구회, 1989, 제주도 연구 제6집.
목포대학교 사학과 학생회, 1992, 92년 춘계 답사자료집.
고창훈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4,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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