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아(一雅) 변선환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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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아(一雅) 변선환의 생애와 사상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변씨 집안’에서 내돌림을 당해야 했고 그 때부터 외로운 ‘구도자(求道者)’의 길이 시작되었다. ‘그 끝없는 만남을 향하여 -일아 변선화의 생애와 사상의 흐름’ 이덕주, 감신.
1952년 봄, 일아의 목회가 시작되었으니 예산지방 봉산교회를 개척한 것이다. ‘신학생 전도사’로 2년 남짓 시무하고 1953년 12월. ‘군번 226573 육군 대위 변선환’의 군목생할은 ‘공식적으로’ 1961년 7월에 끝나지만, 그는 계속 ‘신학생’. 1958년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바르트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 온 박봉랑 교수를 찾아 한국신학대학원에 들어 간 것이다. 군목 8년이 끝나고 일아에게 주어진 첫 직장은 이화여자고등학교 교목실. 그리고 1962-3년과 1966-67년 두 차례 미국으로 건너 가 감리교 명문 드루신학 신학부로 유학을 가게 된다. 두 번째 드루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1967년 여름부터 일아는 그처럼 자랑스럽게 여기던‘모교’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과 철학을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간에(1965년) 처음 부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고통을 겪었으나 3년 후 이화여대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신옥희 교수를 만나 ‘인생의 반려자’로 ‘학문의 동반자’로 결합함으로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도 하였다. 1971년 일아는 다시 유학길에 오르니, 이번에도 스승을 찾아 길 떠나는 구도자의 순례였다. 그는 드루에서 그의 ‘지평을 열어 주었던’ 부리가 있는 스위스 바젤로 가게 된다. 바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일아는 감신에서 계속해서 조직신학을 강의하며 해천과 함께 감신의 신학 ‘토착화 신학’을 정립해 나갔다. 그러나 일아가 깊게 들어가면 갈수록, 넓게 펼칠수록 그의 신학은 ‘전위신학(前衛神學, Frontier Theology)\' 모습을 띌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생태적으로 ’방어와 공격‘ 전술에 뛰어난 ’전투적‘ 보수주의 신학과 교회로부터 경계와 견제를 받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감신에서 쫓겨나듯 은퇴하기까지 20년은 ’열린 교회와 열린 신학‘을 추구하는 일아와 ’배타적인 폐쇄적‘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치열한 ’전투‘로 점철되었다. 첫 번째 ’전투‘의 서막은 1977년 <월간목회>에서 근본주의적 보수주의 신학자 박아론의 논쟁이었다. 두 번째 시비는 1982년 6월, 일아가 ’현대사회연구소‘가 주최한 ’불교의 기독교의 대화모임‘에서 행한 강연 내용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단에서의 ’신앙고백서‘ 제출 요구로 일단락 마무리 지어졌다. 1988년 9월 일아는 학장이 되었으니 그것이 그가 져야 할 마지막 십자가였다. ’전투‘가 재개된 것은 1991년. 이번에도 시작은 일아의 강연, 1990년 11월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이 주체한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불타와 그리스도”라는 그의 논문 때문이었다. 결국 1992년 2월 보수쪽 인사들로 구성된 서울 연회 재판위원회(위원장:고재영)는 감신 교수와 학생, 감리교회를 염려하는 인사들, 국내외 진보적 신학자달의 항의와 호소에도 아랑곳없이 ’일사천리‘로 재판을 진행하여 3개월만인 5월 7일 교회법상 최고형인 “출교(黜敎)를 선고하였으니 그가 피고인으로 섰던 금람교회 예배당은 바로 ’빌라도 법정‘이고 ’보름스 의회‘”였다. 1992년 11월 감리교 기관지 <기독교 세계>에 감독회장(곽전태) 명의로 ”변선환, 홍정수가 1992년 10월 24일부로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출교되었음을 공고함“으로 끝났으니 ’공식적으로‘ 일아는 더 이상 감리교 목사가 아니었다. 그나마 그 와중에 1992년 8월 임기를 마치고 감신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 위로라면 위로랄까?
“난데없는 서울 하늘 어두운 먹구름 천둥 번개 치던 어느 날” 1995년 8월 8일 오후 늦은 때, 영등포구 당산동 아파트 서재에서 “주무시듯 홀연히 숨 거두시니” ‘좌탈(座脫)’하였다. 그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쓰다가 간 글, 원광대학에서 열릴 ‘한·일 종교심포지움’에서 맡은 기조 강연 원고였는데, 그 제목은 “한·일 양국의 근대화와 종교”. 19세기 말 한국 ‘근대화’를 몸으로 체험한 ‘진남포’ 태상이 새삼 ‘세계화’를 외치고 있는 20세기 말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이렇게 끝나고 있었다.
“오늘의 한국은 서구의 근대화를 피상적으로 모방하지만 말고 겸손히 깊이 있게 선진국을 배우면서 한국 종교 속에 움트고 있었던 적극적인 요소들과 만나면서 참으로 알찬 한국적으로 토착화된 근대화 모델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변선환, “한일 양국 근대화의 종교” ‘그 끝없는 만남을 향하여 -일아 변선화의 생애와 사상의 흐름’ 이덕주, 감신.
3. 초기사상 - 신석구목사와 바르트의 영향
변선환의 영혼 속에 그리스도가 찾아온 것은 그가 18세 되던 해 신석구 목사와 만남을 통해서다. 청년 변선환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라!”는 신석구 목사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적 실존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한학자인 신석구 목사의 내면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났던 기독교에 대한 변증적 이해는 세계종교와 동서양 성현들을 알고 있었던 변선환에게 놓칠 수 없는 신학적 주제가 되었다. 이정배,『한국 개신교 전위(前衛) 토착신학 연구』-대한기독교서회, 171
신석구 목사를 신앙과 영혼의 아버지로 모신 변선환은 1948년 평양 성화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성화신학교는 감리교 서부연회의 직영신학교로서 공사주의 이데올로기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의 박해가 심했고 그럴수록 신학교의 분위기는 경건했고 사랑이 넘쳤다. 경건을 학문보다 우위에 놓아야 한다는 감리교 정신이 싹튼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정배,『한국 개신교 전위(前衛) 토착신학 연구』-대한기독교서회, 172
경건한 신앙 분위기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체험하였고, “소박한 신앙생활”에 익숙해 있던 변선환은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신학자들(구약-박대선, 신약-김용옥, 조직신학-김용련)로부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조직신학을 가르친 김용련 목사가 교재로 사용한〈기독교신학개론〉을 통해 자유주의 신학자 정경옥을 알게 되었고, 다시 그를 통해 슐라이어마허, 리츨, 슈바이처, 바르트 등 서구의 진보적 신학을 알게 되었고 변선환의 신학 탐구는 서서히 ‘진보’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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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5.10
  • 저작시기2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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