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인과 호남사상 (남도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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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호남인과 호남사상 (남도화를 중심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호남인과 호남사상

남도화를 중심으로


1. 머리말
2. 학포 양팽손(학포 양팽손)
3. 공재 윤두서(공재 윤두서)
4. 소치 허련(소치 허련)
5. 미산 허형(미산 허형)
6. 맺는 말

본문내용

같은 일화가 전한다.
“허형은 큰형에 비하여 풍모가 떨어지고 얼굴은 마마를 앓은 흔적이 있어서 아버지 허련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았고, 손님들에게 머슴으로 소개될 정도였다. 그래서 허형은 화가로 성장할 만한 계기가 없었으나 큰형이 세상을 떠난 뒤 15세 되던 해에 아버지의 제자인 김람전이 혼자 그림 그리는 것을 보고 화흥이 생겨 람전의 붓을 빼앗아 모란을 그렸는데 허련은 그 그림을 보며 남전의 것인 줄로 잘못 알고 칭찬해 주었다. 그런데 그 모란도가 남전이 아닌 허형의 것으로 밝혀지고 허형이 그 앞에서 사군자를 그려 보이자 그의 재능에 놀라 부인에게 「형이 큰아들보다 화재가 뛰어나니 대를 잇게 해야겠다」고 하며 새 옷을 입히고 버선을 신겨 그림공부만 하도록 지시하였다고 한다. 그 후로 허형은 아버지에게 정식으로 그림을 배웠고 산수화, 묵로란, 사군자 등의 화재에서 허련의 화풍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허형은 그림의 재능을 인정받았을 뿐이고 그의 그림은 아버지의 문기나 화격을 따르지 못하였으며 특히 산수화에 있어서는 허련의 품격과는 거리가 많다. 결국 허형은 한낱 지방 작가로 그의 화재를 다 펴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연유는 대체로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사회상, 가세가 어려웠던 점, 근대화단의 동향과 거의 접촉하지 않은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래서 의제 허백련도 미산에 대하여 「어려서부터 아버지 소치를 닮아 화재가 뛰어났으나 견문이 좁은 데다가 화론이 정립되지 않았고 또 워낙 가세가 빈한하여 다작을 한 탓으로 화재에 비해 좋은 그림을 많이 남기지 못한 것이 애석할 뿐」이라고 평하였다.
비록 그의 그림은 수준에 못 미쳐 소외되었지만 아들인 남농 허건, 방계손인 의제 허백련 등 허련으로부터 남도의 양대 화맥과 전통을 잇게 해준 교량 역할을 하였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위치는 자못 크다고 하겠다.
허형의 회화는 산수화, 묵모란, 화조화, 사군자 등 여러 소재에 걸쳐 있고 다작을 남겼는데 대개 백락병을 비롯해서 병풍으로 꾸미기 위한 대중적인 것이 많아 그의 그림과 가세가 밀접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때문인지 정상적인 화가 수업을한 작가의 그림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작품도 눈에 띄지만 그의 재능을 감지하게 해주는 것들도 상당수가 있다.
그러한 허형의 그림 중에서 대담한 수묵 구사의 묵모란이나 사군자 작품은 허련의 양식화한 경향을 그대로 전수하였으니 산수화에 있어서는 천편일률적이고 어색한 구도와 색감으로 전혀 아버지의 작품에 근접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 나름대로의 토속적인 냄새, 즉 화보나 아버지의 그림을 모본으로 하였으면서도 남도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향토적인 냄새를 맡을 수가 있었다.
특히 그의 모란이나 소나무, 사군자의 수묵 그림은 아버지 허련에 버금간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잘 알려졌고 허련 말년의 퇴락하고 거친 필치의 작품에서 보다 안정감 있고 온화한 느낌을 주어 오히려 당시의 일반인들에게는 호응이 컸을 듯 싶기도 하다.
출저:향 따라 여백 찾아가는 길(곽의진)
6. 맺는 말
지금까지 양팽손과 윤두서일가, 남도화풍의 근간이었던 허련을 통하여 이 지역의 화맥을 알아보았다. 물론 이들 외에 이 지역 출신의 작가나 이 지역 화단의 폭을 넓혀 준 이들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초기의 호랑이를 잘 그렸다는 하천 고운(1945~?), 말기의 나비와 사군자를 잘 그린 사호 송수면(1847~1916), 허련 계열로 미단 김익노(1845~1915), 호석 임삼현(1874~1948)들이 그들이다.
여하튼 지역 화단을 이끌었고 한국 회화사에 남긴 공헌도로 미루어 양팽손, 윤두서일가, 허련에 뿌리를 둔 허형은 그들 당대의 회화사조를 이끈 선두주자는 아니었지만 한국회화사에 남긴 족적은 거론할 만하다. 이들이 한국회화사에 남긴 업적과 그 위치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초기의 양팽손은 안견화풍을 따른 선비화가로 안견이 수용했던 곽희화풍을 좀더 우리 풍토에 맞게 정착시킨 화가이다. 중기와 후기의 과도기에 활동한 윤두서는 중기의 전통화풍을 계승하였으며 부분적으로 영,정조시대에 새롭게 전개되었던 남종화풍, 풍속화, 서구화풍의 수용 및 후기화론의 선구적 위치에 놓여 있기도 하다. 말기의 허련은 김정희의 영향으로 남종화론을 바탕으로 하면서 중국적인 취향이 강하였지만 독자적 필치의 심화로 김정희일파 가운데서도 남종화풍을 개성적으로 토착화한 작가로 주목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양팽손과 윤두서 회화가 허련 이후의 양식과 큰 차이가 있으면서도 그 성향은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이곳 남도가 형성시킨 풍토감각이랄까. 이들에 의해 형성된 조선시대 회화는 그 특징이 세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사화나 파당을 피하여 낙향했거나 정착한 후손들에 의해서, 또한 역량있는 문사들의 유배에 자극되어 형성된 점이다. 이처럼 형성된 이 지역의 회화는 조선시대에 이 지역이 정치세력에서 소외된 선비들의 은거지 혹은 유배지가 되어 문학,음악,학문 등 다른 분야의 문화에서 이루어진 현상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둘째는 위의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을 지연성과 전통성, 보수적인 경향이다 이는 이 지역의 화가가 보여준 그들 전시대 전통화풍의 계승에서 나타난다. 즉 16세기 전반의 양팽손은 15세기 안견의 화풍을, 17세기 말?18세기 초의 윤두서는 16,7세기 절파계화풍을 19세기의 허련은 18세기 남종화풍을 유지하였다. 특히 이들은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화풍이나 회화세계를 이룬 경우에도 새로운 유행이나 화풍보다 전통화풍을 고수하였다는 데서 그 성격이 더욱 확실해진다.
세째로는 전통성과 보수성에 의해 자극된 토착성이다. 이는 수도권에서 떨어진 지방이기 때문에 다른 문화유형이나 조형작품에서도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여겨진다. 토착화의 문제는 외래문화를 수용, 변모시킨 한국적 특징을 추출하는 관건이 되기도 하는데 남도의 현존하는 예를 들어보면 삼국시대 영산강 유역의 옹관묘제, 고려시대 화순 도암 운주사의 불탑을 비롯한 불교미술 등이 내재적인 표현력과 거친 미완의 힘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들과 전통회화의 특징을 관련시키는데는 무리가 따르지만 남도회화의 토착적인 거칠고 호방한 화풍은 동질의 정서를 지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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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5.28
  • 저작시기2013.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49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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