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로마 제국주의의 동기
Ⅲ. 팽창전쟁의 전개
Ⅲ-1. 페티알레스 법
Ⅲ-2. 제1차 포에니 전쟁
Ⅲ-3. 제2차 포에니 전쟁
Ⅲ-4. 속주의 통치체제
Ⅳ. 결론(포에니 전쟁의 결과)
Ⅱ. 로마 제국주의의 동기
Ⅲ. 팽창전쟁의 전개
Ⅲ-1. 페티알레스 법
Ⅲ-2. 제1차 포에니 전쟁
Ⅲ-3. 제2차 포에니 전쟁
Ⅲ-4. 속주의 통치체제
Ⅳ. 결론(포에니 전쟁의 결과)
본문내용
어나자 프라이토르의 숫자는 6명까지 늘어났으며, 이 중 둘은 로마에 남고 나머지 넷은 속주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라이토르의 숫자를 무한정 늘릴 수 없었기 때문에 2세기 중반 이후 만들어진 속주들은 기존 행정관의 임기를 연장하여 통치하였다. 이는 로마인들이 가능한 한 직접 지배보다는 간접 지배를 선호한 이유 중 하나였다.
Ⅳ. 결론(포에니 전쟁의 결과)
카르타고와의 전쟁은 로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전쟁으로 로마는 동부 지중해 국가들과 대립하게 되었고 또한 세계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의 헬레니즘 세계정복은 포에니 전쟁이 시작한 사회적 변화를 가속화 시켰다. 거대한 영토를 정복함에 따라 광범위한 제국에 적용하기 힘든 불합리한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한 헬레니즘 세계로부터 오리엔트의 사상과 관습이 대거 로마에 소개되고 사치스러운 분위기가 팽배해졌고 노예의 유입도 급격히 증가하며 계급간의 격차가 한층 심화된다. 로마는 경제, 사회, 정치분야에서 혁명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전쟁포로가 대규모로 유입되어 노예의 숫자가 대규모로 증가했고, 값싼 농산물의 유입으로 대토지 농장제도가 도입되어 중소자영농민층이 점차 몰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영 농민층의 몰락은 시민군의 약화를 초래했으며, 고용의 기회를 상실한 노동자들은 무산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로마의 군사적 경제적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한 중소 자영 농민층은 전쟁의 결과로 오히려 몰락하는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다. 평민들의 이러한 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지배계층은 풍요로움을 구가하고 있었다. 로마는 사치와 방종이 지배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로 변하고 있었다. 국가에 대한 전통적인 봉사와 헌신은 사라지고 향락과 부귀가 추구되었다. 이런 가운데 카토를 중심으로 한 소수의 원로원 귀족들은 과거의 선(善)을 회복하고 로마사회의 사악한 경향을 제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노예제도를 옹호하고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적인 철학을 비판하는 내재적인 모순 때문에 이들의 노력은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참고문헌>
김진경 외 『서양고대사강의』(한울 아카데미, 1996)
에드워드 맥널 번즈 외 『서양 문명의 역사Ⅰ』(소나무, 1994)
루카 드 블로와 외 『서양 고대 문명의 역사』(다락방, 2003)
조인형 『주제 중심의 서양사 탐구』(강원대학교 출판부, 2003)
http://blog.naver.com/winlee96/60059406674
Ⅳ. 결론(포에니 전쟁의 결과)
카르타고와의 전쟁은 로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전쟁으로 로마는 동부 지중해 국가들과 대립하게 되었고 또한 세계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의 헬레니즘 세계정복은 포에니 전쟁이 시작한 사회적 변화를 가속화 시켰다. 거대한 영토를 정복함에 따라 광범위한 제국에 적용하기 힘든 불합리한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한 헬레니즘 세계로부터 오리엔트의 사상과 관습이 대거 로마에 소개되고 사치스러운 분위기가 팽배해졌고 노예의 유입도 급격히 증가하며 계급간의 격차가 한층 심화된다. 로마는 경제, 사회, 정치분야에서 혁명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전쟁포로가 대규모로 유입되어 노예의 숫자가 대규모로 증가했고, 값싼 농산물의 유입으로 대토지 농장제도가 도입되어 중소자영농민층이 점차 몰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영 농민층의 몰락은 시민군의 약화를 초래했으며, 고용의 기회를 상실한 노동자들은 무산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로마의 군사적 경제적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한 중소 자영 농민층은 전쟁의 결과로 오히려 몰락하는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다. 평민들의 이러한 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지배계층은 풍요로움을 구가하고 있었다. 로마는 사치와 방종이 지배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로 변하고 있었다. 국가에 대한 전통적인 봉사와 헌신은 사라지고 향락과 부귀가 추구되었다. 이런 가운데 카토를 중심으로 한 소수의 원로원 귀족들은 과거의 선(善)을 회복하고 로마사회의 사악한 경향을 제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노예제도를 옹호하고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적인 철학을 비판하는 내재적인 모순 때문에 이들의 노력은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참고문헌>
김진경 외 『서양고대사강의』(한울 아카데미, 1996)
에드워드 맥널 번즈 외 『서양 문명의 역사Ⅰ』(소나무, 1994)
루카 드 블로와 외 『서양 고대 문명의 역사』(다락방, 2003)
조인형 『주제 중심의 서양사 탐구』(강원대학교 출판부,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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