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문제작을 통한 추체험 역사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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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신문제작을 통한 추체험 역사학습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미지를 부각시키며 19C 이후에는 항왜원조 라 하며 일본에 대항하여 조선을 도와주었다는 측면을 부각시켰다.
2. 임진왜란의 원인
가. 일본의 상황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을 통일하여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도요토미는 국내 통일에 이용한 제후들의 힘을 밖으로 돌려 자체의 불안을 없애려 했다. 특히 당시 유럽에 의해 발전한 신흥 상업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서도 대륙 침략을 꿈꾸게 되었다.
나. 조선의 상황
선조 때에 지배계급은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였다. 이와 같은 파쟁으로 중앙에서는 국방정책조차도 마련하지 않고 변화하는 동양의 국제 정세를 명나라와의 친선 관계만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또 안일 속에서 고식적인 대책에만 만족하던 지배층은 인접국가인 일본이나 대륙의 여진족의 정치적 변동이나 상황을 구체적으로 탐지하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16세기말에 일본에 파견된 사신들도 당파적인 엇갈림에 치우쳐 상반된 내용을 보고하였다.
또 병력은 장부상으로만 존재하였으며, 군은 실제로 무력한 대역인으로만 편성되어 병력의 부재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갔다. 결국 임진왜란을 치러야 할 선조 때에 와서는 경군(중앙군)과 향군(지방군) 모두 병부의 편제상의 정원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실병력은 거의 없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3. 임진왜란의 경과
가. 일본의 침략
나. 수군의 승리와 이순신
다. 의병의 봉기
라. 명의 참전과 반격
마. 휴전의 성립과 강화의 결렬
사. 정유재란
4. 임진왜란의 영향
임진왜란은 조선. 명. 일본에 다 같이 큰 영향을 주었다. 싸움터였던 조선이 전쟁으로 입은 타격은 매우 심각하여 오랫동안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가. 조선
정치상에 있어서는 비변사가 강화되고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 기구의 개편이 시작되었다. 비변사는 원래 변경의 방비를 위한 기관이었으나, 임진왜란을 당하자 그 기능이 더욱 커졌다. 즉, 이전에는 군사 문제에만 관여했으나 이제는 국정의 전반을 다루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의정부는 유명무실해졌으며 비변사가 국가의 모든 행정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조선 전기의 군사 제도는 양인인 농민이 군역의 의무를 지는 병농 일치를 기반으로 하는 제도로, 궁궐의 수비와 수도의 방비를 담당하였던 중앙군은 중위. 전위. 후위. 좌위. 우위의 5위를 기간 보대로 하였다. 이러한 군사 조직의 개병제 원칙은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잘 지켜졌으나, 16세기 이후 현역 복무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겨 다른 사람을 대신시키는 등 점차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종래 군사 제도의 허약함이 드러나자 월급을 주고 군인을 고용하는 군대인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그 뒤 계속해서 어영청. 총융청. 금위영. 수어청을 설립하여 5군영 제도가 마련되었으며, 지방에는 속오군을 창설하였다.
한편 여러 무기도 제작되었다. 이장손이 비격진천뢰를, 변이중이 화차를 발명하였으며 이순신이 거북선을 제조하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왜의 조총이 보급되고 명군으로부터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포가 소개되었다.
임진왜란 전에는 농지 면적이 170만 결에 달했으나 전란이 끝나고 광해군 시대에는 54만결로 줄어, 그만큼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국가의 조세 수입도 감소하였다. 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상자를 내어 인구가 줄고 가옥과 재산의 손실도 막대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인심이 흉흉하여 이몽학의 난과 같은 반란도 일어났다. 그리고 전쟁 중에 군량을 모으기 위해 발행한 공명첩은 조선 왕조의 신분 제도를 붕괴시키는 데 한몫을 하였다.
문화적인 면에서도 국보급의 문화재가 거의 불타 없어졌으며 많은 책과 미술품들이 약탈되었다. 또한 전염병이 돌자 허준이 동의보감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명의 군사 원조를 받아 숭명사상이 더욱 강화되어 훗날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초래하는 한 이유가 된다.
나. 일본
임진왜란 전에 일본은 조선보다 문화적인 면에서 뒤떨어져 조선 문화를 동경하고 열망하였다. 왜군은 조선에 침입하자 한편으로는 싸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문화약탈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에 영향을 미친 조선 문화로는 공예품. 인쇄술. 성리학 등을 꼽을 수 있다. 공예품 중에서도 일본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도자기 제작 기술이었다. 원래 일본의 도자기 제작술은 유치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능가할 만한 도자기 제조 국가로 성장하였다. 왜란 당시 일본은 도자기가 형편없이 질이 나빠 조선과 명으로부터 수입한 자기를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장수들은 다투어서 자기를 약탈하고, 포로들 중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 이로써 일본 도자기업은 획기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일본의 유학은 임진왜란 때 약탈해 간 많은 서적과 납치해 간 조선 유학자들에게 의하여 발달하였다. 본래 일본의 학문은 보잘 것 없었으나 조선의 유학이 전래되면서 차차 학문이 발달하여, 성리학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의 대표적인 학문이 되었다. 일본 성리학은 퇴계 이황이 학문 계통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이처럼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하고 학자와 기술자를 납치해 감으로써 문화가 급성장하여 에도 막부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다. 명
명은 전란이 터지기 전 당쟁이 시작되었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명은 급속히 국력이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나타나 여진족의 3대 부족을 통일하고 중원을 노리게 되었고 결국 이자성이 반란을 일으켜 자금성이 함락되게 된다. 명의 장수 오삼계는 반란군을 토벌하러 50만군을 이끌고 자금성으로 가지만 자금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험한 요충지인 산해관으로 들어간다. 이 일은 청 태조인 누르하치에게 상당히 걱정을 끼친다. 중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해관을 거쳐야 하는데 험하디 험한 곳에 50만이란 대군을 이끌고 있으니 통과하려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하고 통과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드는 곳이다. 그러나 일은 쉽게 풀린다. 이자성이 오삼계의 가족을 죽이면서 오삼계는 청에 투항하게 되고... 청은 결국 산해관을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통과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중원을 청에게 내어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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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6.07
  • 저작시기2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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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5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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