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제리 스프링거 쇼 소개
1) 쇼의 구성 및 성격
2) 쇼의 파급력
① 높은 시청률
② 이후 프로그램들의 동질화
③ 제리 스프링거의 유명세
Ⅱ. 미국 방송환경변화에 따른 제리 스프링거 쇼의 특징
1) 1970년대
2) 1980년대
Ⅲ. 미국 언론의 변화에 따른 쇼의 특징 분석
1) 탈규제를 통한 언론의 자유
① 표현의 자유
② 소유 규제
2) 시청률 경쟁
Ⅳ. 제리 스프링거 쇼의 특징과 언론윤리
1) 미국 언론(방송)의 상업화 양상
2) 상업언론의 보호
3) 언론윤리와의 갈등
Ⅴ. 이후의 미국 TV 토크쇼 양상
1) 제리 스프링거 쇼의 파급력 및 영향
2) 이후 미국 TV 토크쇼 양상 ㅡ오프라 윈프리 쇼, 리키 그리고 레터맨 쇼
3) 그 외의 토크쇼 프로그램 ㅡ치터스
Ⅵ. 결론
1) 쇼의 구성 및 성격
2) 쇼의 파급력
① 높은 시청률
② 이후 프로그램들의 동질화
③ 제리 스프링거의 유명세
Ⅱ. 미국 방송환경변화에 따른 제리 스프링거 쇼의 특징
1) 1970년대
2) 1980년대
Ⅲ. 미국 언론의 변화에 따른 쇼의 특징 분석
1) 탈규제를 통한 언론의 자유
① 표현의 자유
② 소유 규제
2) 시청률 경쟁
Ⅳ. 제리 스프링거 쇼의 특징과 언론윤리
1) 미국 언론(방송)의 상업화 양상
2) 상업언론의 보호
3) 언론윤리와의 갈등
Ⅴ. 이후의 미국 TV 토크쇼 양상
1) 제리 스프링거 쇼의 파급력 및 영향
2) 이후 미국 TV 토크쇼 양상 ㅡ오프라 윈프리 쇼, 리키 그리고 레터맨 쇼
3) 그 외의 토크쇼 프로그램 ㅡ치터스
Ⅵ. 결론
본문내용
환경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표현의 자유가 바로 제리 스프링거 쇼가 가진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2) 쇼의 파급력
미국에서 높은 시청률을 올리는 프로그램인 ‘제리 스프링거 쇼’는 주로 남녀상열지사와 관련된 자극적인 주제를 올려놓고 당사자들을 출연시켜 토론을 벌이는데, 말은 토론이지만 결국 상대방을 헐뜯는 험담이 오가고 주먹다짐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 때문에 이 프로그램 제작진은 아예 건장한 사내들을 예닐곱씩 ‘뜯어말리기용’으로 고용해서 스튜디오 안에 항시 대기시켜둔다.
물론 이 프로그램은 지난 98년에 ‘모든 상황은 미리 짜인 각본 대로이고 사전에 연습까지 하고 제작에 들어간다.’는 폭로가 나와서 타격을 입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사람들은 여전히 이 ‘쇼’를 즐기고 있다.
① 높은 시청률
자본과 정치권력에 의한 공공영역(Public Sphere)의 쇠퇴를 논한 하버마스를 언급 할 필요도 없이 공적 영역으로서의 방송의 역할은 이미 상당부분 쇠퇴해 왔다. 쇠퇴의 배경에는 물론 자본윤리와 상업성에 따른 방송의 시청률경쟁에 있다. 오늘날 방송의 내용에 결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권력보다는 자본이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시청률이다. 1994년부터 쇼는 정치적인 내용에서 자극적인 내용으로 그 구성을 바꾸어 시청률이 높아지면서 1998년까지 670만 명의 시청자를 불러들였다.
많은 사람들이 쇼를 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폭력성의 재현이 인기가 있는지 보여준다. 사람들은 폭력성을 오락이라는 인식 하에 보고 있으며, 쇼의 높은 시청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는 시청자들이 폭력성을 오락으로 본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② 이후 프로그램들의 동질화
방송은 광고주에 기댈 수밖에 없고, 광고주들은 시청률 낮은 프로그램에 광고비를 투자하지 않는다. 언론학자 허버트 쉴러가 말한 것처럼,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투자한 프로그램에 보다 많은 소비자, 즉 대중이 모여들어 광고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며, 방송은 보다 많은 대중을 끌어들이기 위해 ‘동질화’ 한다. ‘동질화’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바로 오락이다.
제리 스프링거쇼 이전의 토크 프로그램도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도 일정부분이 이미 오락화되어 가고 있었으며, 그 프로그램들은 주제 선정이나 패널 선정, 그리고 진행기법상 다분히 오락적 성격을 띤 파격성을 선보이고 있다. 우후죽순 생겨나는 토크 프로그램들의 경쟁 속에서 시청률, 즉 자본의 논리가 최우선되어 오락화가 되었던 것이다.
방송사의 입장에서는 적은 자본을 들여 높은 시청률을 얻었기에 이런 프로그램의 성격을 쉽게 버릴 수 없었으며. 후에 제리 스프링거쇼의 내용과 방송방식을 다른 프로그램이 많이 모방하여 ‘동질화’를 꾀하기도 했다.
③ 제리스프링거의 유명세
제리 스프링거는 1971년 신시내티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캔들로 인해 사직을 하기도 했지만. 1975년, 자신의 정직함을 입증해 다시금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1977년에 시장으로 임명되었고 1년간 일했다. 그는 신시내티의 시장직을 맡고 있을 때, 그의 방송 생활을 시작했다. 채널 WLWT TV정치 기자와 평론가를 맡았고 뉴스 앵커를 맡기도 했으며. 에미상의 수상경력도 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이곳에 있지 않고 파격적으로 제리 스프링거쇼를 이끌고 새로운 장르를 이끌었다는 것에 있다. 그의 쇼를 기반으로 한 연극과 영화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그의 유명세는 줄어들 줄 모르고 있다.
Ⅱ. 미국 방송환경변화로 본 제리 스프링거 쇼의 특징
파격적인 소재와 연출로 시대적 관심을 받게 된 제리 스프링거 쇼는 단순히 우연에 의해 등장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미국 TV의 보급과 확산의 과정에서 변화되어가는 방송환경과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난 결과물로써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의 방송 프로그램들은 상업방송으로써 공익성과 사회적 유익함 보다는 시청률과 광고시장 확보에 더 중점을 두었고 그러한 의도들이 프로그램의 내용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제리 스프링거 쇼가 방영되기 시작한 1990년대 이전의 방송 프로그램들은 어떠한 변화를 겪고 있었을까.
1) 1970년대
70년대 들어서 현대화 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바빠진 사람들은 점점 독서나 신문과 같은 활자매체를 멀리하게 되었다. 대신 뉴스와 토크쇼와 같은 TV프로그램에 의지해 정보를 얻는 경향이 짙어졌는데, TV프로그램들 제작자들은 더 많은 시청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프로그램 포맷의 변화를 시도하며 정보를 확대해 제공하기도 하고 자극적인 소재를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토크쇼나 뉴스 진행자나 등장하는 게스트들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과거 남성 중심적이고 정형화 된 모습을 지닌 출연자들이 70년대 들어서는 다소 변화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성 진행자들과 패널들이 나와 법원, 의회와 빈민가 등을 누비기도 하며 당시만 해도 남성중심적이었던 정치문제에 대해 논하기도 하였다. 또 정갈한 양복이 아닌 일상복을 입고 뉴스와 토크쇼를 진행하기도 하였으며 히피족과 사회 운동권의 사람들이 나와 프로그램의 한자리를 메우기도 하였다. 이런 부분들은 여러 계층의 대중들을 겨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고, 더 나아가 편안한 분위기의 진행으로 등장인물과 방청객, 시청자들간의 깊은 호흡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당시 인기를 끌던 인기 여성 진행자 필 도나휴는 가만히 앉아서 게스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방청석을 돌아다니며 직접 질문을 받고 의견을 들었다.
이러한 대중적인 분위기를 잘 이용하여 대통령이 된 경우도 있었다. 1976년 대통령에 당선된 지미 카터는 선거운동 당시 토크쇼에 자주 출연하여 국민들과의 거리감을 없애려 노력하였다. TV를 통해 지미카터의 일상적인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된 국민들은 다른 대선후보들과 달리 그를 친근하고 편안하게 인식하게 되었고, 결국 그에게 표를 던지게 되었다. 이는 당시의 TV프로그램 제작자들이 의도하였던 프로그램의 성향과 시대의 흐름이 맞아 떨어진 일로 볼 수 있다.
2) 1980년대
70년대를 거쳐 80년대로 들어서면서 토크쇼와 뉴스는 좀 더 상업적인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주 타겟으로 선정되는 연령층도 좀 더
2) 쇼의 파급력
미국에서 높은 시청률을 올리는 프로그램인 ‘제리 스프링거 쇼’는 주로 남녀상열지사와 관련된 자극적인 주제를 올려놓고 당사자들을 출연시켜 토론을 벌이는데, 말은 토론이지만 결국 상대방을 헐뜯는 험담이 오가고 주먹다짐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 때문에 이 프로그램 제작진은 아예 건장한 사내들을 예닐곱씩 ‘뜯어말리기용’으로 고용해서 스튜디오 안에 항시 대기시켜둔다.
물론 이 프로그램은 지난 98년에 ‘모든 상황은 미리 짜인 각본 대로이고 사전에 연습까지 하고 제작에 들어간다.’는 폭로가 나와서 타격을 입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사람들은 여전히 이 ‘쇼’를 즐기고 있다.
① 높은 시청률
자본과 정치권력에 의한 공공영역(Public Sphere)의 쇠퇴를 논한 하버마스를 언급 할 필요도 없이 공적 영역으로서의 방송의 역할은 이미 상당부분 쇠퇴해 왔다. 쇠퇴의 배경에는 물론 자본윤리와 상업성에 따른 방송의 시청률경쟁에 있다. 오늘날 방송의 내용에 결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권력보다는 자본이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시청률이다. 1994년부터 쇼는 정치적인 내용에서 자극적인 내용으로 그 구성을 바꾸어 시청률이 높아지면서 1998년까지 670만 명의 시청자를 불러들였다.
많은 사람들이 쇼를 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폭력성의 재현이 인기가 있는지 보여준다. 사람들은 폭력성을 오락이라는 인식 하에 보고 있으며, 쇼의 높은 시청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는 시청자들이 폭력성을 오락으로 본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② 이후 프로그램들의 동질화
방송은 광고주에 기댈 수밖에 없고, 광고주들은 시청률 낮은 프로그램에 광고비를 투자하지 않는다. 언론학자 허버트 쉴러가 말한 것처럼,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투자한 프로그램에 보다 많은 소비자, 즉 대중이 모여들어 광고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며, 방송은 보다 많은 대중을 끌어들이기 위해 ‘동질화’ 한다. ‘동질화’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바로 오락이다.
제리 스프링거쇼 이전의 토크 프로그램도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도 일정부분이 이미 오락화되어 가고 있었으며, 그 프로그램들은 주제 선정이나 패널 선정, 그리고 진행기법상 다분히 오락적 성격을 띤 파격성을 선보이고 있다. 우후죽순 생겨나는 토크 프로그램들의 경쟁 속에서 시청률, 즉 자본의 논리가 최우선되어 오락화가 되었던 것이다.
방송사의 입장에서는 적은 자본을 들여 높은 시청률을 얻었기에 이런 프로그램의 성격을 쉽게 버릴 수 없었으며. 후에 제리 스프링거쇼의 내용과 방송방식을 다른 프로그램이 많이 모방하여 ‘동질화’를 꾀하기도 했다.
③ 제리스프링거의 유명세
제리 스프링거는 1971년 신시내티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캔들로 인해 사직을 하기도 했지만. 1975년, 자신의 정직함을 입증해 다시금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1977년에 시장으로 임명되었고 1년간 일했다. 그는 신시내티의 시장직을 맡고 있을 때, 그의 방송 생활을 시작했다. 채널 WLWT TV정치 기자와 평론가를 맡았고 뉴스 앵커를 맡기도 했으며. 에미상의 수상경력도 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이곳에 있지 않고 파격적으로 제리 스프링거쇼를 이끌고 새로운 장르를 이끌었다는 것에 있다. 그의 쇼를 기반으로 한 연극과 영화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그의 유명세는 줄어들 줄 모르고 있다.
Ⅱ. 미국 방송환경변화로 본 제리 스프링거 쇼의 특징
파격적인 소재와 연출로 시대적 관심을 받게 된 제리 스프링거 쇼는 단순히 우연에 의해 등장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미국 TV의 보급과 확산의 과정에서 변화되어가는 방송환경과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난 결과물로써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의 방송 프로그램들은 상업방송으로써 공익성과 사회적 유익함 보다는 시청률과 광고시장 확보에 더 중점을 두었고 그러한 의도들이 프로그램의 내용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제리 스프링거 쇼가 방영되기 시작한 1990년대 이전의 방송 프로그램들은 어떠한 변화를 겪고 있었을까.
1) 1970년대
70년대 들어서 현대화 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바빠진 사람들은 점점 독서나 신문과 같은 활자매체를 멀리하게 되었다. 대신 뉴스와 토크쇼와 같은 TV프로그램에 의지해 정보를 얻는 경향이 짙어졌는데, TV프로그램들 제작자들은 더 많은 시청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프로그램 포맷의 변화를 시도하며 정보를 확대해 제공하기도 하고 자극적인 소재를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토크쇼나 뉴스 진행자나 등장하는 게스트들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과거 남성 중심적이고 정형화 된 모습을 지닌 출연자들이 70년대 들어서는 다소 변화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성 진행자들과 패널들이 나와 법원, 의회와 빈민가 등을 누비기도 하며 당시만 해도 남성중심적이었던 정치문제에 대해 논하기도 하였다. 또 정갈한 양복이 아닌 일상복을 입고 뉴스와 토크쇼를 진행하기도 하였으며 히피족과 사회 운동권의 사람들이 나와 프로그램의 한자리를 메우기도 하였다. 이런 부분들은 여러 계층의 대중들을 겨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고, 더 나아가 편안한 분위기의 진행으로 등장인물과 방청객, 시청자들간의 깊은 호흡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당시 인기를 끌던 인기 여성 진행자 필 도나휴는 가만히 앉아서 게스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방청석을 돌아다니며 직접 질문을 받고 의견을 들었다.
이러한 대중적인 분위기를 잘 이용하여 대통령이 된 경우도 있었다. 1976년 대통령에 당선된 지미 카터는 선거운동 당시 토크쇼에 자주 출연하여 국민들과의 거리감을 없애려 노력하였다. TV를 통해 지미카터의 일상적인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된 국민들은 다른 대선후보들과 달리 그를 친근하고 편안하게 인식하게 되었고, 결국 그에게 표를 던지게 되었다. 이는 당시의 TV프로그램 제작자들이 의도하였던 프로그램의 성향과 시대의 흐름이 맞아 떨어진 일로 볼 수 있다.
2) 1980년대
70년대를 거쳐 80년대로 들어서면서 토크쇼와 뉴스는 좀 더 상업적인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주 타겟으로 선정되는 연령층도 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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