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강화도의 특징
Ⅲ. 강화도의 역사
Ⅳ. 강화도 가는 편
Ⅴ. 강화도의 관광일정
Ⅵ. 강화도의 주요유물과 명소
1. 갑곳리탱자나무
2. 갑곶돈대
3. 광성보(사적 제 227호)
4. 전등사
5. 전등사 대웅전(보물 제178호)
1) 대웅전
2) 대웅전 삼존불
3) 약사전(보물 제179호)
4) 범종(보물 제393호)
6. 사고 (史庫)
7. 광성돈대
8. 갑곶돈대
9. 강화고인돌
Ⅶ. 강화도와 마니산
Ⅷ. 강화도와 강화도천도
참고문헌
Ⅱ. 강화도의 특징
Ⅲ. 강화도의 역사
Ⅳ. 강화도 가는 편
Ⅴ. 강화도의 관광일정
Ⅵ. 강화도의 주요유물과 명소
1. 갑곳리탱자나무
2. 갑곶돈대
3. 광성보(사적 제 227호)
4. 전등사
5. 전등사 대웅전(보물 제178호)
1) 대웅전
2) 대웅전 삼존불
3) 약사전(보물 제179호)
4) 범종(보물 제393호)
6. 사고 (史庫)
7. 광성돈대
8. 갑곶돈대
9. 강화고인돌
Ⅶ. 강화도와 마니산
Ⅷ. 강화도와 강화도천도
참고문헌
본문내용
고인돌
강하군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북방식 고인돌이다.(사적 제137호) 지금까지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 가운데 대형에 속한다. 지상에서의 높이 2.6m, 덮개돌은 길이 6.5m, 너비 5.2m 이며 화강암으로 되어있다. 남북으로 세워진 동쪽 굄돌은 약 15°서쪽 굄돌은 약 20°정도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서쪽의 굄돌은 길이 4.5m, 두께 0.6m, 높이 1.4m 이며, 동쪽의 굄돌은 길이 4.64m, 두께 0.8m, 높이 1.4m이다. 무게 약 50톤 되는 덮개돌이 굄돌위에 거의 수평을 유지하며 남북으로 길게 놓여있다. 이형구박사가 조사한 강화의 고인돌 중 14번이다. 강화고인돌은 부근리 고인돌군에 속하는 고인돌이다. 근처에 부근리 고인돌군이 있다. 강화군은 경기 만에 위치하는 강화도, 교동도, 석모도, 동검도, 서검도, 황산도 등의 여러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화도는 강화군의 주도이다.
Ⅶ. 강화도와 마니산
강화에서 가장 높은 마니산은 본래 고가도(古加島)라 하는 섬으로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던 것인데, 가릉포(嘉陵浦)와 선두포(船頭浦)에 둑을 쌓은 뒤로 육지가 되었다. 또한 이 산은 마리산, 머리산이라고도 물리는데, 마리란 고어로 머리를 뜻하니 강화 사람들이 마리산으로 부르는 이 산은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땅의 머리를 뜻한다. 게다가 산 정상에는 하늘에 제사하는 단이 있으니 강화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 민족, 전 국토의 머리 구실을 한다는 뜻이다.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마리산(摩利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아마도 불교의 영향을 받아 마니산으로 바뀌지 않았나 추측한다.
불교에서 마니(摩尼)는 악을 제거하는 탁한 것을 맑게 하며, 화(禍)를 없애 주는 보주(寶珠),
여의주를 의미한다. 그 이전의 문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마니산\'을 정식 명칭으로 사용한 문헌은 성종12년(1481)에 완성하고 성종17년(1486년)에 간행하였으며, 연산5년(1499)에 증보판을 내고, 중종25년(1530)에 전 55권으로 중수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마니산으로 부르기 시작한지 500년이 가깝다.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은 고려사나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단군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라 전하
고 있는데, 사적 136호인 이 참성단은 자연석을 다듬어 제단을 쌓았다. 기단은 지름 4.5m의 원형이고, 상단은 사방 2m의 네모꼴로 마련되어 있다. 참성단을 통해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사상이다. 『천부경』사상을 바탕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윗 단을 성소로 아랫단을 제사 올리는 곳으로 구분한 점 역시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는 성속관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단군은 북한의 묘향산에서 출현하여 그 후 평양에 도읍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고 다음에 기자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산신이 되었다 라고만 되어있어 마니산과 참성단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으나, 여지승람에는 단군이 평양에 도읍한 후 황해도에 있는 구월산에 옮겨 산신이 된 후에 이 마니산에서 지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또한 단군왕검께서(BC2282) 민족 만대의 영화와 발전을 위하여 춘추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역대 왕조가 거행했던 이곳 참성단의 행사를 보면 고구려 유리왕 19년에 사슴과 돼지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지냈고, 백제의 비류왕은 몸소 현지에 나와 제사를 지냈으며, 현재는 근세에 이르러 융희 황제 때까지 해방 후에는 전국체육대회가 부활되고 이곳에서 성화를 점화하였다. 성화 채화 시 군수가 제주가 되어 제천을 올린 뒤 7선녀에 의해 태양열을 화경으로 인화하거나 흐린 날에는 부싯돌로 성화를 점화하는데 7선녀의 유래는 단군께서 단을 쌓아 제천하실 때 神女가 합 그릇을 받들고 있었다는 기록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들이 고려 시대에는 왕과 제관이 직접 찾아가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조선시대까지도 이 제사 의식은 계속 되었다.
Ⅷ. 강화도와 강화도천도
고려의 대몽항쟁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강화 천도는 1232년 최우에 의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행되었다. 이 강화 천도는 그 후 몽고로 하여금 침략의 구실을 보태어 주었고 몽고의 재침략을 촉진시켰으며, 민중의 처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행동으로 민심의 이탈을 가져왔다.
강화 천도는 몽고의 오만 불손한 행동이 고려의 반몽 의식을 자극시킨 점, 그리고 그들의 지나친 경제적 수탈, 게다가 단순한 공물의 징수에서 끝나지 않고 군사의 조달 등 인적 자원에까지 미침으로써 고려를 압박하였다는 점과 다루가치를 비롯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의 강화 등 위의 여러 가지 이유로 단행되었다. 또한 우리는 강화도의 지리적 조건도 간과 할 수 없다.
천도 이후의 강화 경영에 있어서도 그들은 연경궁과 최우의 저택을 見子山 부근에 위치시켰다. 한편, 강화도에는 갑작스럽게 인구가 유입되고, 무질서한 도시구조로 대형 화재의 발생이 빈번하였다. 방어 시설 면에서도 내성, 외성, 중성의 3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몽고측은 강도의 축성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한다. 이러한 강도 시대국가 재정의 전체적 고갈에도 불구하고 무인 정권은 그 나름대로 풍족하게 살았다고 보아진다.
전쟁의 전 기간을 통해 침략에 대한 항전의 주체적 역할을 한 것은 민병들로서 초기의 국내 통치 계급의 학정에 반대하여 궐기한 농민반란의 폭동군인 초적들과 노예나 부곡민들로 된 천민들이 주요한 항전세력이었다. 이들 농민, 천민의 항전이 바로 강력한 몽고 침략에 대하여 30년간이나 굳건하게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최의가 주살된 1258년 戊午정변으로 최씨 정권은 종말은 고하고 왕권복고의 절차가 취해졌다.
참고문헌
김경준, 강화도 역사산책, 신대종, 2001
김도현, 태백산 천제단과 마니산 참성단의 의례 비교, 동아시아고대학회, 2010
김경표, 최씨정권의 강화천도와 대몽항전 성격, 경기대학교, 2005
이형구, 강화도, 대원사, 1994
안종수, 한국관광지리, 백산출판사, 2009
정신문화연구회,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웅진출판사, 1991
강하군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북방식 고인돌이다.(사적 제137호) 지금까지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 가운데 대형에 속한다. 지상에서의 높이 2.6m, 덮개돌은 길이 6.5m, 너비 5.2m 이며 화강암으로 되어있다. 남북으로 세워진 동쪽 굄돌은 약 15°서쪽 굄돌은 약 20°정도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서쪽의 굄돌은 길이 4.5m, 두께 0.6m, 높이 1.4m 이며, 동쪽의 굄돌은 길이 4.64m, 두께 0.8m, 높이 1.4m이다. 무게 약 50톤 되는 덮개돌이 굄돌위에 거의 수평을 유지하며 남북으로 길게 놓여있다. 이형구박사가 조사한 강화의 고인돌 중 14번이다. 강화고인돌은 부근리 고인돌군에 속하는 고인돌이다. 근처에 부근리 고인돌군이 있다. 강화군은 경기 만에 위치하는 강화도, 교동도, 석모도, 동검도, 서검도, 황산도 등의 여러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화도는 강화군의 주도이다.
Ⅶ. 강화도와 마니산
강화에서 가장 높은 마니산은 본래 고가도(古加島)라 하는 섬으로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던 것인데, 가릉포(嘉陵浦)와 선두포(船頭浦)에 둑을 쌓은 뒤로 육지가 되었다. 또한 이 산은 마리산, 머리산이라고도 물리는데, 마리란 고어로 머리를 뜻하니 강화 사람들이 마리산으로 부르는 이 산은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땅의 머리를 뜻한다. 게다가 산 정상에는 하늘에 제사하는 단이 있으니 강화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 민족, 전 국토의 머리 구실을 한다는 뜻이다.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마리산(摩利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아마도 불교의 영향을 받아 마니산으로 바뀌지 않았나 추측한다.
불교에서 마니(摩尼)는 악을 제거하는 탁한 것을 맑게 하며, 화(禍)를 없애 주는 보주(寶珠),
여의주를 의미한다. 그 이전의 문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마니산\'을 정식 명칭으로 사용한 문헌은 성종12년(1481)에 완성하고 성종17년(1486년)에 간행하였으며, 연산5년(1499)에 증보판을 내고, 중종25년(1530)에 전 55권으로 중수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마니산으로 부르기 시작한지 500년이 가깝다.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은 고려사나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단군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라 전하
고 있는데, 사적 136호인 이 참성단은 자연석을 다듬어 제단을 쌓았다. 기단은 지름 4.5m의 원형이고, 상단은 사방 2m의 네모꼴로 마련되어 있다. 참성단을 통해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사상이다. 『천부경』사상을 바탕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윗 단을 성소로 아랫단을 제사 올리는 곳으로 구분한 점 역시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는 성속관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단군은 북한의 묘향산에서 출현하여 그 후 평양에 도읍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고 다음에 기자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산신이 되었다 라고만 되어있어 마니산과 참성단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으나, 여지승람에는 단군이 평양에 도읍한 후 황해도에 있는 구월산에 옮겨 산신이 된 후에 이 마니산에서 지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또한 단군왕검께서(BC2282) 민족 만대의 영화와 발전을 위하여 춘추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역대 왕조가 거행했던 이곳 참성단의 행사를 보면 고구려 유리왕 19년에 사슴과 돼지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지냈고, 백제의 비류왕은 몸소 현지에 나와 제사를 지냈으며, 현재는 근세에 이르러 융희 황제 때까지 해방 후에는 전국체육대회가 부활되고 이곳에서 성화를 점화하였다. 성화 채화 시 군수가 제주가 되어 제천을 올린 뒤 7선녀에 의해 태양열을 화경으로 인화하거나 흐린 날에는 부싯돌로 성화를 점화하는데 7선녀의 유래는 단군께서 단을 쌓아 제천하실 때 神女가 합 그릇을 받들고 있었다는 기록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들이 고려 시대에는 왕과 제관이 직접 찾아가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조선시대까지도 이 제사 의식은 계속 되었다.
Ⅷ. 강화도와 강화도천도
고려의 대몽항쟁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강화 천도는 1232년 최우에 의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행되었다. 이 강화 천도는 그 후 몽고로 하여금 침략의 구실을 보태어 주었고 몽고의 재침략을 촉진시켰으며, 민중의 처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행동으로 민심의 이탈을 가져왔다.
강화 천도는 몽고의 오만 불손한 행동이 고려의 반몽 의식을 자극시킨 점, 그리고 그들의 지나친 경제적 수탈, 게다가 단순한 공물의 징수에서 끝나지 않고 군사의 조달 등 인적 자원에까지 미침으로써 고려를 압박하였다는 점과 다루가치를 비롯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의 강화 등 위의 여러 가지 이유로 단행되었다. 또한 우리는 강화도의 지리적 조건도 간과 할 수 없다.
천도 이후의 강화 경영에 있어서도 그들은 연경궁과 최우의 저택을 見子山 부근에 위치시켰다. 한편, 강화도에는 갑작스럽게 인구가 유입되고, 무질서한 도시구조로 대형 화재의 발생이 빈번하였다. 방어 시설 면에서도 내성, 외성, 중성의 3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몽고측은 강도의 축성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한다. 이러한 강도 시대국가 재정의 전체적 고갈에도 불구하고 무인 정권은 그 나름대로 풍족하게 살았다고 보아진다.
전쟁의 전 기간을 통해 침략에 대한 항전의 주체적 역할을 한 것은 민병들로서 초기의 국내 통치 계급의 학정에 반대하여 궐기한 농민반란의 폭동군인 초적들과 노예나 부곡민들로 된 천민들이 주요한 항전세력이었다. 이들 농민, 천민의 항전이 바로 강력한 몽고 침략에 대하여 30년간이나 굳건하게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최의가 주살된 1258년 戊午정변으로 최씨 정권은 종말은 고하고 왕권복고의 절차가 취해졌다.
참고문헌
김경준, 강화도 역사산책, 신대종, 2001
김도현, 태백산 천제단과 마니산 참성단의 의례 비교, 동아시아고대학회, 2010
김경표, 최씨정권의 강화천도와 대몽항전 성격, 경기대학교, 2005
이형구, 강화도, 대원사, 1994
안종수, 한국관광지리, 백산출판사, 2009
정신문화연구회,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웅진출판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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