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무가의 정의와 종류
1. 정의
2. 무가의 종류
1) 서정무가
2) 교술무가
3) 서사무가
4) 희곡무가
3. 무가의 구연방식
Ⅲ. 무가의 역사
Ⅳ. 무가의 특성
Ⅴ. 화랭이 이용우
1. 출생, 학습과정
2. 이종만 당굿의 전수
Ⅵ. 화랭이 조한춘
Ⅶ. 화랭이 이충선
1. 제1기
2. 제2기
3. 제3기
Ⅷ. 화랭이 오수복
참고문헌
Ⅱ. 무가의 정의와 종류
1. 정의
2. 무가의 종류
1) 서정무가
2) 교술무가
3) 서사무가
4) 희곡무가
3. 무가의 구연방식
Ⅲ. 무가의 역사
Ⅳ. 무가의 특성
Ⅴ. 화랭이 이용우
1. 출생, 학습과정
2. 이종만 당굿의 전수
Ⅵ. 화랭이 조한춘
Ⅶ. 화랭이 이충선
1. 제1기
2. 제2기
3. 제3기
Ⅷ. 화랭이 오수복
참고문헌
본문내용
게 창조물로 남아있는 것은 대금산조이다. 대금산조는 음반으로 남아 있어서 그 창조의 세계가 어떠한가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충선의 피리산조는 새롭게 짜서 전해지고 있으나, 불행하게도 피리독주의 증거물은 경기도 살풀이에서 예술적 창조력을 구사하고 있을 따름이다. 대신에 다른 가야금산조가 칠현금산조로 남아있어서 이충선 창조음악의 편린만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충선의 창조음악에서 항상 따라다니던 음악적 자양분은 곧 경기도 무속음악의 생명력이다. 이충선이 창조의 원형으로 항상 경기도 무속음악을 잊지 않았고, 지영희 등과 합동 작업으로 대금의 명인 박종기의 음반을 통해서 유행한 산조음악을 합쳐서 놀라운 비약을 이룩하였다. 이충선의 대금산조가 두 가지가 전하는데, 그 음악의 실상에서 이충선이 경기도의 무속음악에 침잠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Ⅷ. 화랭이 오수복
경기도 도당굿에서 화랭이와 함께 요긴한 구실을 하는 인물은 미지이다. 미지는 여자 무당을 지칭하는 도당굿 예능인들의 은어이다. 미지는 추정하건대 지미라는 말을 뒤집은 것으로 생각한다. 지미는 ‘지어미’, ‘제미’ 등의 말로서 여성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경기도 도당굿의 사제 계승권이 부가계 내 고부 계승권의 기본틀을 유지하고 있으나, 실제로 세습에 의해서 무녀가 사제 계승권을 차지하는 사례가 그다지 흔하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경기도 화성에서 김태곤의 조사에 따라서 한 가지 사례가 보고 되어 있을 따름이다.
화랭이 가문에서 여성 무당을 보충하는 방식은 강신무들을 맞아들이거나 그러한 여성과 연대해서 굿을 할 수밖에 없는 실정으로 보인다. 실제로 현재까지 조사된 사례에 의하건대 거의 단골판이 훼손되어서인지 순수한 고부계승의 사제권은 경기도 도당굿 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화랭이와 짝이 되는 미지를 논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선다. 오히려 미지 노릇을 하는 인물에 초점을 두고 논의를 할 수밖에 없다.
경기도 도당굿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오수복은 유일하게 전통적인 경기도 도당굿의 화랭이와 굿을 함께 다닌 미지이다. 오수복의 인간문화재적 가치는 전통적 화랭이가 생존해 있을 때에 그들에게 예능과 소리를 순식간에 계승했다는 점에 있다. 탁월한 총기와 무녀의 자질이 경기도 도당굿의 전승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수복은 1924년 8월 9일에 경기도 용인군 용인면 역북리 해주 오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오수복은 갑자년(甲子年)생이다. 부친은 오찬용이고, 모친은 한언년이다. 오찬용은 두레패에서 농악놀이를 할 정도로 신명이 가득한 인물이었다. 오찬용은 호적도 잘 불었고, 이른바 건달의 기질이 완연하였다고 한다. 침도 아주 잘 놓았고, 맥도 잘 짚었다. 투전이나 씨름에도 능해서 잡기잡색에 능한 인물로 평가된다. 오수복은 아버지의 기질 가운데 하나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오수복은 맏이로 있었으며, 밑으로 오완근, 오이복, 오만복의 동생이 있었다.
오수복은 이 집안에서 잘 자랐다. 스스로 말하기를 호의호식하면서 곱디곱게만 자란 셈이다. 그러다가 오수복의 나이 18세에 김해 김씨 집안으로 출가하게 된다. 시댁은 용인군 기흥면 용수골에 있었다. 경주 김씨의 남편과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김응식, 김영숙, 김미선 등이 이들이다. 현재(1998년) 이들의 나이는 첫째가 57세, 둘째가 54세, 셋째가 52세이다.
그런데 오수복의 남편인 경주 김씨가 염병을 앓다가 왜정시대에 죽게 된다. 오수복의 나이 29세 때의 일이다. 오수복은 자식들을 기르기 위해서, 그리고 해수병을 앓는 시어머니와 2남 2녀나 되는 경주 김씨 가문의 식구들을 구명도생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오수복이 했던 일로 떡장사, 옷장사, 기름장사, 미군빨래일 등을 위시해서 동가숙 서가식하는 봇짐장사도 어지간히 했다고 전한다.
오수복이 갖은 고생을 다해서 얻은 것은 얼굴에 노란 꽃이 피는 병이었다. 이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지네 열 마리를 세 춤이나 먹고 해도 잘 낫지 않았다. 오수복이 고생한 내력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 전에도 고치 절구를 찧다가 손을 다쳤는데, 그것이 악연이 되어서 손을 일곱 달 동안 못쓰게 되었다. 왜냐하면 물빨래도 겸해서 손에 덧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손이 허방이 져서 못쓰게 되었을 때에 물참나무 불기운으로 시댁외숙모가 ‘코코찜질’을 하자말자, 손에서 고갱이가 빠져 나와서 간신히 손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민간요법의 병 치료가 단순하지 않고, 핵심을 깨우쳐서 병 치료를 할 수 있는 경험을 오수복은 한 셈이다.
오수복이 매교다리 근처에서 살 때에 외숙모님이 인연이 되어서 폐병말기 병을 치료하려 하였으나, 잘되지 않았다. 다만 병을 죽을병이라고 해서 심상치 않은 병이라고 하였다. 31세 되던 해에 친정 6촌 언니가 광화문의 이학사 할아버지에 점을 치러 갔다. 그런데 그곳에 가게 된 까닭은 ‘개만도 못한 네 팔자, 왜 그런지 알아보자’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이학사 할아버지의 점에는 ‘입술 안에 점이 들었으니 입으로 벌어먹을 팔자요, 부채살이 끼었으니 무당이 될 팔자’라고 점괘가 나왔다. 무당이 되다니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그래서 무당이 되지 않기 위해서 몇 날을 울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몸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 없어서 도립병원에 가보니 폐병 4기였다고 했다. 오수복은 죽기를 각오하고 이 병에 맞서게 되었다. 오수복의 시퍼런 오기가 오장육부에서 뻗쳐 나왔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김태곤 - 한국무가연구,1 :무가의 전승실태, 한국민속학회, 1994
김헌선 - 경기도 도당굿 화랭이 이용우(1899년-1987년)의 구비적 개인사, 한국구비문학회, 1994
김헌선 - 경기도 도당굿 화랭이 연행자 연구 : 광주 이충선과 수원 오수복을 예증삼아, 한국구비문학회, 1998
박경신 - 한국 무가의 역사적 전개, 한국구비문학회, 1997
윤동환 - 동해안 필사본 무가의 존재양상과 기능적 특성, 한국무속학회, 2007
전형대 외 1명 - 경기도 지역 화랭이 무가 연구 : 조한춘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구비문학회, 1995
이충선의 창조음악에서 항상 따라다니던 음악적 자양분은 곧 경기도 무속음악의 생명력이다. 이충선이 창조의 원형으로 항상 경기도 무속음악을 잊지 않았고, 지영희 등과 합동 작업으로 대금의 명인 박종기의 음반을 통해서 유행한 산조음악을 합쳐서 놀라운 비약을 이룩하였다. 이충선의 대금산조가 두 가지가 전하는데, 그 음악의 실상에서 이충선이 경기도의 무속음악에 침잠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Ⅷ. 화랭이 오수복
경기도 도당굿에서 화랭이와 함께 요긴한 구실을 하는 인물은 미지이다. 미지는 여자 무당을 지칭하는 도당굿 예능인들의 은어이다. 미지는 추정하건대 지미라는 말을 뒤집은 것으로 생각한다. 지미는 ‘지어미’, ‘제미’ 등의 말로서 여성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경기도 도당굿의 사제 계승권이 부가계 내 고부 계승권의 기본틀을 유지하고 있으나, 실제로 세습에 의해서 무녀가 사제 계승권을 차지하는 사례가 그다지 흔하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경기도 화성에서 김태곤의 조사에 따라서 한 가지 사례가 보고 되어 있을 따름이다.
화랭이 가문에서 여성 무당을 보충하는 방식은 강신무들을 맞아들이거나 그러한 여성과 연대해서 굿을 할 수밖에 없는 실정으로 보인다. 실제로 현재까지 조사된 사례에 의하건대 거의 단골판이 훼손되어서인지 순수한 고부계승의 사제권은 경기도 도당굿 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화랭이와 짝이 되는 미지를 논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선다. 오히려 미지 노릇을 하는 인물에 초점을 두고 논의를 할 수밖에 없다.
경기도 도당굿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오수복은 유일하게 전통적인 경기도 도당굿의 화랭이와 굿을 함께 다닌 미지이다. 오수복의 인간문화재적 가치는 전통적 화랭이가 생존해 있을 때에 그들에게 예능과 소리를 순식간에 계승했다는 점에 있다. 탁월한 총기와 무녀의 자질이 경기도 도당굿의 전승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수복은 1924년 8월 9일에 경기도 용인군 용인면 역북리 해주 오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오수복은 갑자년(甲子年)생이다. 부친은 오찬용이고, 모친은 한언년이다. 오찬용은 두레패에서 농악놀이를 할 정도로 신명이 가득한 인물이었다. 오찬용은 호적도 잘 불었고, 이른바 건달의 기질이 완연하였다고 한다. 침도 아주 잘 놓았고, 맥도 잘 짚었다. 투전이나 씨름에도 능해서 잡기잡색에 능한 인물로 평가된다. 오수복은 아버지의 기질 가운데 하나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오수복은 맏이로 있었으며, 밑으로 오완근, 오이복, 오만복의 동생이 있었다.
오수복은 이 집안에서 잘 자랐다. 스스로 말하기를 호의호식하면서 곱디곱게만 자란 셈이다. 그러다가 오수복의 나이 18세에 김해 김씨 집안으로 출가하게 된다. 시댁은 용인군 기흥면 용수골에 있었다. 경주 김씨의 남편과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김응식, 김영숙, 김미선 등이 이들이다. 현재(1998년) 이들의 나이는 첫째가 57세, 둘째가 54세, 셋째가 52세이다.
그런데 오수복의 남편인 경주 김씨가 염병을 앓다가 왜정시대에 죽게 된다. 오수복의 나이 29세 때의 일이다. 오수복은 자식들을 기르기 위해서, 그리고 해수병을 앓는 시어머니와 2남 2녀나 되는 경주 김씨 가문의 식구들을 구명도생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오수복이 했던 일로 떡장사, 옷장사, 기름장사, 미군빨래일 등을 위시해서 동가숙 서가식하는 봇짐장사도 어지간히 했다고 전한다.
오수복이 갖은 고생을 다해서 얻은 것은 얼굴에 노란 꽃이 피는 병이었다. 이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지네 열 마리를 세 춤이나 먹고 해도 잘 낫지 않았다. 오수복이 고생한 내력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 전에도 고치 절구를 찧다가 손을 다쳤는데, 그것이 악연이 되어서 손을 일곱 달 동안 못쓰게 되었다. 왜냐하면 물빨래도 겸해서 손에 덧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손이 허방이 져서 못쓰게 되었을 때에 물참나무 불기운으로 시댁외숙모가 ‘코코찜질’을 하자말자, 손에서 고갱이가 빠져 나와서 간신히 손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민간요법의 병 치료가 단순하지 않고, 핵심을 깨우쳐서 병 치료를 할 수 있는 경험을 오수복은 한 셈이다.
오수복이 매교다리 근처에서 살 때에 외숙모님이 인연이 되어서 폐병말기 병을 치료하려 하였으나, 잘되지 않았다. 다만 병을 죽을병이라고 해서 심상치 않은 병이라고 하였다. 31세 되던 해에 친정 6촌 언니가 광화문의 이학사 할아버지에 점을 치러 갔다. 그런데 그곳에 가게 된 까닭은 ‘개만도 못한 네 팔자, 왜 그런지 알아보자’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이학사 할아버지의 점에는 ‘입술 안에 점이 들었으니 입으로 벌어먹을 팔자요, 부채살이 끼었으니 무당이 될 팔자’라고 점괘가 나왔다. 무당이 되다니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그래서 무당이 되지 않기 위해서 몇 날을 울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몸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 없어서 도립병원에 가보니 폐병 4기였다고 했다. 오수복은 죽기를 각오하고 이 병에 맞서게 되었다. 오수복의 시퍼런 오기가 오장육부에서 뻗쳐 나왔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김태곤 - 한국무가연구,1 :무가의 전승실태, 한국민속학회, 1994
김헌선 - 경기도 도당굿 화랭이 이용우(1899년-1987년)의 구비적 개인사, 한국구비문학회, 1994
김헌선 - 경기도 도당굿 화랭이 연행자 연구 : 광주 이충선과 수원 오수복을 예증삼아, 한국구비문학회, 1998
박경신 - 한국 무가의 역사적 전개, 한국구비문학회, 1997
윤동환 - 동해안 필사본 무가의 존재양상과 기능적 특성, 한국무속학회, 2007
전형대 외 1명 - 경기도 지역 화랭이 무가 연구 : 조한춘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구비문학회,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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