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윤리사상\'교부철학\'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서양윤리사상\'교부철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교부철학
2.오리게네스
3.아우구스티누스

본문내용

총의 도움 없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인간이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한다면 인간은 죄에 정복당하고 만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지에 의해서 자유롭게 하는 이 해방자를 믿고 은총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 법은 은총이 추구되기 위해서 주어지고 은총은 법이 완수되기 위해서 주어진다. 법은 우리의 의지가 연약함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은총이 그 의지의 연약함을 치유하기 위해서이다. 은총 없이는 충족될 수 없는 그것을 가르치고 명령하는 법이 인간에게 그의 연약함을 보여줌은 이렇게 밝혀진 그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구세주에게 도움을 청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구세주의 치유에 의해서 의지는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불가능하다고 알아낸 바를 행할 수 있게 된다.
3.54 악
도덕적 완성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 즉 의지로 하여금 하느님을 향하게 하여 다른 모든 능력, 가령 감각들을 이 방향으로 조화시키는데 있다고 한다면 악은 의지의 방향을 하느님으로부터 멀리하는데 있다. 그러나 악 그 자체 즉 도덕적 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적극적인 것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악이란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어떤 적극적인 것일 수 없다. 말하자면 도덕적 악의 원인은 창조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의지에 있다. 선한 것들의 원인은 하느님의 선하심이지만 악의 원인은 불변하는 선을 외면하는 피조물의 의지이다. 즉 악이랑 불변의 무한한 선을 피조물의 의지가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은 엄밀하게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라는 이 말은 하나의 적극적인 실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일 도덕적 악이 하나의 적극적인 실재라고 한다면 무(無)로부터 무엇을 창조하는 적극적인 능력을 피조물에게 들릴 수 없으므로 그 악은 창조자에게 돌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악은 “본질로부터 이탈하여 비존재로 향하는 그것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질서와 척도가 있는 모든 것은 그 원인을 하느님에게 돌려야 하겠지만 하느님을 외면하는 의지에는 무질서가 있다. 의지 그 자체는 선이지만 그러나 인간 행위에 책임이 있는 올바른 질서가 없거나 오히려 그것을 결하고 있는 것은 악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악이란 피조물의 의지에 있어서 올바른 질서의 결여에 지나지 않는다.
악을 하나의 결여로 생각하는 것은 플로티노스의 학설이며 거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악이 하나의 결여이고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면 도덕적 악의 탓을 선한 창조자에게 돌리거나 악의 원인이 되는 악의 어떤 궁극적 원리를 생각해 내는 일은 더 이상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 설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일반적으로 스콜라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으며 그리고 유명한 여러 철학자들 가운데서 예컨대 라이프니츠에서 그 지지자를 찾아볼 수 있다.
3.55 두 개의 나라
도덕성의 원리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며 악의 본질은 하느님으로부터의 일탈이라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인류는 두 개의 커다란 진영으로 갈라질 수 있다. 즉 하느님을 사랑하여 자기보다도 차라리 하느님을 택하는 진영과 하느님보다도 차라리 자기를 택하는 진영으로 갈라지게 된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어느 진영에 속하는가는 의지를 지배하고 있는 사랑의 성격에 달려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류의 역사를 이 두 원리의 변증법의 역사로 보고 있는데 하나는 예루살렘의 나라를 이루고 다른 하나는 바빌론의 나라를 형성하는데 있다.
각자는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라. 그러면 그는 자신이 어느 나라에 속하는 시민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두 종류의 사랑이 있다. …이 두 종류의 사랑은 인류 가운데서 건설되는 두 나라로 구별되고 있다. …말하자면 그 두 나라가 혼합하는 가운데서 세월은 지나고 있다. 당신들은 두 나라가 있다는 것을 듣고 알고 있다. 그 두 나라는 현재에는 스스로 혼합되어 있으나 마음 가운데서는 분리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역사가 매우 중요함은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 타락한 것도 역사에서이며 인간이 구원받는 것도 역사에서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이 지상에서 점진적으로 성장 발전하여 하느님의 계획이 전개되는 것은 역사 안에서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계시의 내용을 떠난 역사는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역사를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았고 또 그의 견해가 우선 영성적이며 도덕적이었다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서 역사 철학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 철학이라는 말을 그리스도적인 예지라는 넓은 의미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의 사실에 대한 인식은 주로 자연적 인식 예컨대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 제국의 존재와 발전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해석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그것을 판단하는 원리는 사실 그 자체로부터 얻어지지 않는다. 일시적이고 지나가는 것은 영원한 것에 비추어서 판정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바빌로니아 국가의 화신(도덕적인 의미에서)이라고 생각되었던 아시리아의 측면만을 주시하려는 그의 경향이 현대의 역사가에게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보통의 의미에서의 역사가가 지니는 역할을 수행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마음에 그렸던 그대로 역사의 철학을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해했던 그대로 역사의 철학이란 역사적인 현상과 사건들의 영성적이며 도덕적인 의미를 알아보는 일이었다. 사실 적어도 역사철학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한에서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적인 역사철학만이 충분한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에 동의할 것이다. 비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컨대 유태인들의 위치는 그리스도인이 보기에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리스도인의 위치가 역사의 신학적 해석이며 교의에 비추어서 역사를 보는 것이라고 반록된다고 할지라도- 이는 분명히 그럴 수 있지만- 이 반론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아무런 어려움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 반론이 나타내고 있듯이 신학과 철학을 철저하게 분리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 가격1,9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3.07.23
  • 저작시기2009.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6481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