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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립운동가 백야 김좌진 장군, 독립운동가 강기동 의병대장,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 독립운동가 우남 이승만 대통령, 독립운동가 동암 김가진, 독립운동가 도마 안중근 의사,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독립운동가 백야 김좌진 장군
1. 완루구 전투
2. 천수평 전투
3. 어랑촌 전투

Ⅱ. 독립운동가 강기동 의병대장
1. 먼저 일어서 창의한 것이 민권의 선진일 뿐
2. 한국 빈민을 구휼함은 우리 의병의 의무
3. 제이의 이은찬, 창의원수부 중군장 강기동
4. “우리는 이 곳에 있다. 싸울 의사가 있으면 속히 오너라”

Ⅲ.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

Ⅳ. 독립운동가 우남 이승만 대통령

Ⅴ. 독립운동가 동암 김가진

Ⅵ. 독립운동가 도마 안중근 의사

Ⅶ.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은찬 마저 일경에 피체되어 이은찬 연합부대는 사실상 와해되어 하나의 구심점을 잃게 되고 의병들은 도주와 민가잠복 등 몸을 숨기기에 분주하다 1909년 6월 이은찬의 처형소식이 전해져 강기동은 이은찬의 뒤를 이어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전개할 것을 하늘에 맹세 후 의병투쟁을 재개하기 시작하였다.
3. 제이의 이은찬, 창의원수부 중군장 강기동
제이의 이은찬을 선언하며 이은찬이 사용한 창의원수부 중군장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계승, 사용하며 의진을 정비한 강기동은 의병투쟁을 개시하였으나 일제의 의병토벌작전 때문에 직접전투는 못하고 군자금확보와 군기마련 등 조직 강화에 주력하였다. 그 후 일본헌병보조원당시 같은 의병을 밀고하여 사상자를 내게 한 양주군의 밀고자들을 처단하고 빈약한 화력속에서 계속적인 일본군 및 친일주구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감행하였으며 보급투쟁과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는 밀정을 단죄하는 등 고전 속에서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강기동의 본격적 대일투쟁은 그해 가을로 접어들어 시작되었는데 한 달 간 17차례에 걸친 활동을 전개하며 직접전투는 피하고 소규모 부대를 편성하여 산악을 근거로 유격전을 전개하였고, 연기우의병부대의 포천지역 이동을 접한 강기동은 연합작전을 실시하려하였으나 실패하고 독립적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해, 겨울 강원도 금화수비대 15명과 일본인 6명의 일행을 급습하여 피해를 주고 포천군에 나타나 의병의 밀고행위에 대한 경고를 한 뒤 극적으로 연기우 부대와 만나 연합부대를 구성하였으나 일본군의 토벌로 대규모가 산악을 이동한다는 것은 위험을 내포한 일이므로 다시 독립부대로 활동하다 대규모 전투시 상호연합작전을 구사하는 이른바 ‘분합작전’을 전개하는데 지나지 않아 강기동, 연기우 연합부대는 포천헌병들과 교전이 있은 후 다시 분산하여 각기 분리하여 행동하게 된다.
4. “우리는 이 곳에 있다. 싸울 의사가 있으면 속히 오너라”
연기우 부대와 결별 후 양주군 노원면을 내습, 군자금을 확보하고 이듬해 건천면을 방문 군자금 조달을 명하는 등 주로 군자금 모금활동와 반봉건, 반제투쟁을 전개하며 직접전투를 할 수 없는 일면을 농민의병의 참여가 넓어지고 1910년 포천군 외소면에서 우편물 약탈을 계획하였으나 이장의 밀고로 실패하게 되고 다시 연기우와 연합하여 게릴라전을 감행하였는데 이에 일제측은 강기동의 진을 궤멸코자 하여 포천군 외처면에서 양주헌병분견소와 의정부 헌병분견소로 이루어진 연합수색대와 충돌, 전투하였으나 패퇴하여 퇴각하였다.
그리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은 강기동은 모금한 군자금으로 해외에서 항일투쟁을 하려하였으나 군자금부족으로 뒤로 미루고 다시 여러 차례 교전을 벌이다 그해 6월 강기동 의병부대의 우익장 강원호 등이 헌병에게 피체되는 등 점차 그 세력을 잃어 6월 이후 강기동은 유격전에 한계를 뼈저리게 느껴 해외망명을 굳히고 서울잠입을 시도하다 일경에 피체될 뻔하고 다시 경기 북부 일원에서 활동하다 9월에서 11월까지의 일본군 황해도 지역 내 의병 대토벌작전으로 투쟁근거지마저 위협을 받자 북간도지역으로 망명키 위해 이동하던 중 1911년 원산에 피체되어 식민지의 아들로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서울 용산에서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총살당하였다.
Ⅲ.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
김구는 한번 품은 사상에는 일편단심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그의 정신은 그의 민족 사상. 운동에도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민족을 위해 조국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할 정도라면 보통 신념과 의지로서는 불가능하고 상해에 모여든 사람들은 거의 이러한 인사들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 중에서도 김구는 특히 두드러진 사람이었고 그의 이같이 강한 신념은 상해 임정의 간판을 끝까지 고수하여 8.15후 귀국할 때 임정 주석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그것을 잘 말해준다. 이러한 집념이 없이는 일제하에 항일 독립운동이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김구는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애초에 임시정부의 문파수를 지원하였던 것이 경무국장으로, 노동국 총판으로, 내무총장으로 ,국무령으로, 오를 대로 다 올라가 다시 국무위원이 되고 주석이 되었다. 이것은 문파수의 자격이던 내가 진보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없어진 때문이었다. 비기건대 이름났던 대가가 몰락하여 거지의 소굴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 때는 중국인은 물론이오 눈 푸르고 코 높은 영·미·법 등 외국인도 정청에 찾아오는 일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양 사람이라고는 불란서 순포가 경관을 대동하고 사람을 잡으러 오거나 밀린 집세 채근을 오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한창 적에는 천여 명이나 되던 독립운동자가 인제는 수십 명도 못 되는 형편이었다.
머지않아 독립의 서광이 비치리라던 조선의 운명은, 나날이 강해지는 듯이 세력을 뻗쳐 가는 일제의 욱일승천(旭日昇天)과 같은 \'발전\'에 독립투사들은 모두 기가 죽고 절망해 김구가 개탄한 바와 같이 이광수, 정인과 같은 임정간부들이 일제에 투항, 귀국해 버렸다. 또한 그간 국내 각도 각 군에 조직되어 있던 연통제도 발각되어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고 게다가 생활난까지 겹쳐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임정에는 돈도 사람도 모이지 않아 이승만도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박은식이 대통령이 되었고 이상룡이 국무령이 되어 서간도부터 상해로 취임하러 왔으나 각원을 고르다가 지원자가 없어서 다시 서간도로 돌아갔다. 다음 홍진이 선임되어 진강으로부터 왔으나 역시 내각조직에 실패하고 되돌아갔다. 이리하여 임정은 한때 정부 없는 상태가 되고 결국 김구가 국무령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의 자신의 생활에 관해 김구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나는 임시 정부 청사에서 자고 , 밥은 돈벌이 직업을 가진 동포의 집으로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얻어먹었다.
동포의 직업이라야 전차회사의 차표 검사원이 대부분이어서 70명 가량 되었다. 나는 이들의 집으로 다니며 아침저녁을 빌어먹는 것이니 거지 중에도 상거지였다......
이것이 1920년대 후반기에서 30년대에 걸친 김구의 숨김없는 생활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불운에 좌절할 김구는 아니었다. 바로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한 것이 이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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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4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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