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백암 박은식 선생, 만해 한용운 시인,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열사, 오의선 열사, 독립운동가 백야 김좌진 장군,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의사,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 도마 안중근 의사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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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립운동가 백암 박은식 선생, 만해 한용운 시인,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열사, 오의선 열사, 독립운동가 백야 김좌진 장군,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의사,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 도마 안중근 의사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독립운동가 백암 박은식 선생

Ⅱ.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시인
1. 불교혁신운동의 전개
2. 3‧1운동의 주도
3.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전개

Ⅲ.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열사
1. 주자학도(1880 - 1905)
2. 애국계몽활동가(1905 - 10)
3. 혁명적 독립운동가(1910 - 36)

Ⅳ. 독립운동가 오의선 열사

Ⅴ. 독립운동가 백야 김좌진 장군

Ⅵ.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의사
1. 안창호의 성장 배경
2. 안창호의 독립운동에 투신한 배경
3. 안창호의 독립운동
1) 핵심
2) 활동
4. 안창호가 강조한 4대 정신
1) 무실
2) 역행
3) 충의
4) 용기

Ⅶ.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

Ⅷ. 독립운동가 도마 안중근 의사

참고문헌

본문내용

철저한 불교개혁과 대중화의 의지가 없이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심’, ‘조선청년과 수양’, ‘고통과 쾌락’, ‘무용의 노심’, ‘자아를 해탈하라’등의 논설과 수필을 번역, 소개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불교의 교리를 해설함과 함께 특히 청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사회계몽적 성격이 강하다. 이는 그가 추구하는 불교 대중화 작업의 일환일 뿐만 아니라 항일운동과 사회계몽운동의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2. 31운동의 주도
31운동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대규모적이고 획기적인 항일투쟁이었다. 만해의 31운동에 관한 활동과 업적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1) 1919년 1월 말경의 초기 계획단계부터 천도교측 대표들과 회합하며 계획 수립, 2) 유림과 불교계측의 참여 유도, 3) 민족대표로 서명, 4) 독립선언서의 불교계배포, 5) 3월 1일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식 주도, 6) 꿋꿋하고 의연한 옥중, 법정투쟁, 7) 옥중에서 독립사상을 정리한 ‘조선독립( 朝鮮獨立에 對한 感想’이란 논설발표 등을 들 수 있다. 이로써 볼 때 3.1운동시 만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고, 활동 또한 매우 괄목할 만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제 사실과 자료에 입각하여 31운동에서의 만해의 활동을 추적하고자 한다. 1905년 입산,승려가 된 이래 불교의 혁신과 대중화를 위해 전념하던 그가 31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었던 배경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여 볼 수 있다.
첫째, 종래 반봉건의식에 가려져 있던 그는 이제 반제투쟁을 보다 시급한 상위적 개념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그는 불교의 대중화뿐만 아니라, 그의 수필과 논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청년과 학생들에게 사회계몽적 차원에서 자각과 진취적 활동을 호소하고 있다. 세째, 그의 예리한 정세판단 능력과 상황변화에 대한 논리적 인식을 들 수 있다. 이상에서 독립만세시위의 계획부터 민족대표 독립선언식의 주도까지 만해의 활약상을 검토하여 보았다.
만해는 수감되어 있던 1919년 7월 10일 경성지방법원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논설을 작성하였다. 그는 이 글의 전문을 작은 글씨로 휴지에 적은 다음 간수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여러 겹으로 접어서 종이 노끈인 것처럼 위장하여 형무소로부터 차출하는 옷갈피에 끼워 밖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만해의 독립사상이 집약된 이 논설은 상해에서 발간되던 <독립신문(獨立新聞)> 1919년 11월4일자에 부록의 형식으로 게재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 논설은 <조선불교유신론>과 3.1운동의 참가 과정을 거치면서 현실의 인식을 통해 형성되고 심화된 그의 투사적 사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3.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전개
1921년 12월22일 가출옥, 석방된 만해는 다방면에 걸쳐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중 불교 혁신운동은 혁명가이자 승려인 그가 사회활동의 초기단계부터 추진하였던 사업의 계속이었다. 그는 이미 <조선불교유신론>의 저술로써 불교 개혁의 범위와 방향을 제기하였다. 이후 스스로의 경전연구에 전념함은 물론 불경을 번역, 간행하였고 전국의 각 사찰을 순회하며 포교에 노력하는 등 불교의 혁신과 대중화에 힘썼다. 특히 친일 매판불교음모의 격파와 임제종 종지수호운동을 주도하며 제국주의와 종교와의 관계를 간파하고 종정 불리투쟁을 전개한 바 있다.
만해에게 있어서 불교의 개혁은 단순한 불교계의 개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한 사회 전체의 개혁을 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해는 이러한 불교혁신을 통한 사회개혁운동을 주로 청년 불교도들을 통해 전개하고 있다. 당시 그가 불교계에서 차지하고 있던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예컨대 월간 불교잡지인 <불교(佛敎)>에서 실시했던 조선 불교의 대표적 인물에 대한 투표결과는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한편 만해는 불교의 대중화와 함께 민중계몽을 위하여 일간신문의 발행을 구상, 당시 운영난에 빠진 <시대일보>을 인수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바 있다. 그러나 1931년 불교잡지 <불교>를 권산로(權相老)로부터 인수, 속간하면서 불교 대중화와 민중계몽, 민족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1920년대 중반기에 있어 독립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즉 3.1운동을 기점으로 학생계층이 크게 성장하여 전면에 부상하였고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사조도 크게 유행하였다. 그런데 민족주의나 공산주의, 무정부진영 및 각기 이들 갈래로 흡수, 참여하게 되는 학생층이나 모두 독립이란 공동목표를 추구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그 자체의 사상에 몰두하기 보다는 독립에 이르는 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중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가 항일투쟁에 더욱 강렬함을 표방하였다. 그러던 중 공산진영과 민족진영, 사회인사와 학생들이 합세하여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였으니, 곧 1926년의 6.10만세 운동이다. 그러나 조선공산당과 천도교측 인사들의 계획이 6월6일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학생들이 주도한 계획만이 성공하여 6월10일 순종(純宗)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만해는 1927년 좌우합작의 민족단일당운동인 신간회에 참가하여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6.10만세운동에서 민족, 공산진영의 연대가능성이 시험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신간회가 창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해는 불교혁신 외에도 사회 각 방면의 계몽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은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비록 승려에 국한된 것이긴 하나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이와 같이 불교계 자체내의 혁신을 위한 그의 교육에 대한 인식은 3.1운동 이후 크게 변화하고 있다. 즉 불교계에서 식민지 학정에 신음하고 있는 일반 민중으로 시야와 관심이 확대된 것이다. 그는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에서도 수차 일제의 우민화를 위한 열등 교육정책을 비판하고 있으며, 출옥 수 조선인본위교육과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주도하는 등 교육진흥을 총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자유와 평등에 관하여 만해는 누구보다도 굳은 신념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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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4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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