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남사당놀이(남사당패놀이)의 정의
Ⅲ. 남사당놀이(남사당패놀이)의 특징
Ⅳ. 남사당놀이(남사당패놀이)의 종목
1. 풍물
2. 버나
3. 살판
4. 어름
5. 덧뵈기
6. 덜미
Ⅴ. 남사당놀이(남사당패놀이)와 남사당패
참고문헌
Ⅱ. 남사당놀이(남사당패놀이)의 정의
Ⅲ. 남사당놀이(남사당패놀이)의 특징
Ⅳ. 남사당놀이(남사당패놀이)의 종목
1. 풍물
2. 버나
3. 살판
4. 어름
5. 덧뵈기
6. 덜미
Ⅴ. 남사당놀이(남사당패놀이)와 남사당패
참고문헌
본문내용
몇 가지 기예를 보여주고 터굿, 샘굿, 조왕굿 등을 마치고 마지막에 성주굿을 하는데 이때 곡식과 금품을 상 위에 받아놓고 비나리를 왼 다음 받아놓은 곡식과 금품을 그들의 수입으로 하 는 것이다.
남사당패는 꼭두쇠(우두머리) 밑으로 4,5명의 연희자를 갖는 연희집단으로 이미 여러 문헌에서 지적되었듯이 일정한 거소(居所)가 없는 독신 남자들만의 남색사회이다. 간혹 어름산이(줄꾼)나, 그밖에 한두 사람의 여자가 낀적도 있으나 이것은 남사당패 말기에 들어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꼭두쇠를 정점으로 한 대집단은 그들의 여섯 가지 놀이를 가지고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만 제공 받으면 마을의 큰 마당에서 밤새워 서민들만의 놀이를 논 패거리이다. 그들이 계간(鷄姦)을 팔았다는 오점은 숨길 수 없는 것이나 그들의 연희 내용에서 보이는 진취적 민중지향성은 비싸게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대광대패(竹廣大), 솟대쟁이패, 중매구, 굿중패 등 남사당패의 배경을 보는데 연관되어야만 할 패거리들이 있으나 솟대쟁이패와 굿중패를 제외하고는 그 내용을 상고할 방법이 없음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걸립패, 중매구, 남사당패는 명칭상으로나 내용상 비슷한 패거리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형성 배경을 보면 별개의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사당패나 걸립패, 중매구 등은 완전히 사찰을 배경으로 하여 서로간의 계산된 이해에 의하여 사찰을 그들의 거점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1900년대 초 이후 남사당패는 점차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으나 걸립패만은 그나마 명맥을 이을 수 있었음은 아마도 사찰과의 관계에서였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걸립패는 자기들은 남사당패와는 달리 불사를 돕는 불자라는 것을 반드시 내세우는가 하면, 남사당패 출신도 그들대로 \"우리는 동냥을 하지는 않았다.\"며 걸립패와는 성격이 다름을 말하고 있다.
참고문헌
구자순(2011), 새로운 환경에 따른 무형문화재의 중요성과 가치 : 남사당놀이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산업학회
남동현(2008), 남사당놀이 용재로서의 음악에 관한 연구, 추계예술대학교
심우성(1993), 남사당패, 한국역사연구회
양근수(2007), 무형문화유산 교육프로그램 연구 : 남사당놀이 사례를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지춘상(1970), 남사당놀이 고, 전남교육사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신문방송학과(2006), 신명나는 우리의 놀이, 남사당 : 시간의 흐름 속에 올드 미디어를 만나다, 한양대학교
남사당패는 꼭두쇠(우두머리) 밑으로 4,5명의 연희자를 갖는 연희집단으로 이미 여러 문헌에서 지적되었듯이 일정한 거소(居所)가 없는 독신 남자들만의 남색사회이다. 간혹 어름산이(줄꾼)나, 그밖에 한두 사람의 여자가 낀적도 있으나 이것은 남사당패 말기에 들어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꼭두쇠를 정점으로 한 대집단은 그들의 여섯 가지 놀이를 가지고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만 제공 받으면 마을의 큰 마당에서 밤새워 서민들만의 놀이를 논 패거리이다. 그들이 계간(鷄姦)을 팔았다는 오점은 숨길 수 없는 것이나 그들의 연희 내용에서 보이는 진취적 민중지향성은 비싸게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대광대패(竹廣大), 솟대쟁이패, 중매구, 굿중패 등 남사당패의 배경을 보는데 연관되어야만 할 패거리들이 있으나 솟대쟁이패와 굿중패를 제외하고는 그 내용을 상고할 방법이 없음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걸립패, 중매구, 남사당패는 명칭상으로나 내용상 비슷한 패거리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형성 배경을 보면 별개의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사당패나 걸립패, 중매구 등은 완전히 사찰을 배경으로 하여 서로간의 계산된 이해에 의하여 사찰을 그들의 거점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1900년대 초 이후 남사당패는 점차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으나 걸립패만은 그나마 명맥을 이을 수 있었음은 아마도 사찰과의 관계에서였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걸립패는 자기들은 남사당패와는 달리 불사를 돕는 불자라는 것을 반드시 내세우는가 하면, 남사당패 출신도 그들대로 \"우리는 동냥을 하지는 않았다.\"며 걸립패와는 성격이 다름을 말하고 있다.
참고문헌
구자순(2011), 새로운 환경에 따른 무형문화재의 중요성과 가치 : 남사당놀이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산업학회
남동현(2008), 남사당놀이 용재로서의 음악에 관한 연구, 추계예술대학교
심우성(1993), 남사당패, 한국역사연구회
양근수(2007), 무형문화유산 교육프로그램 연구 : 남사당놀이 사례를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지춘상(1970), 남사당놀이 고, 전남교육사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신문방송학과(2006), 신명나는 우리의 놀이, 남사당 : 시간의 흐름 속에 올드 미디어를 만나다, 한양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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